-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15 00:11:00수정됨
Name   머랭
Subject   우울증과 나
우울증의 시작이 언제인지는 늘 명확하지만 끝은 그렇지 못하다. 따져보면 왜 우울했는지 내가 왜 그랬는지 변명은 할 수는 있지만 결과는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나. 그런 생각이 든다. 난 늘 뭔가 핑계를 대 왔지만 지금 내가 어떤지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코로나가 온 뒤로 엄마는 나에게 감히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요즘 나는 그렇다. 싫다고도 좋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게 안전하니까. 어딘가 안전한 구석 한 군데로 숨기는 숨는데 고양이 같은 기분이다. 꼬리가 나온다. 내가 보이기 싫은 것들을 감출 기운조차 없어.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뭐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거 참 우울증 환자 같구만. 맞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오늘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내가 우울해서 찍은 사진을 앨범 커버로 쓰고 싶다고 했다. 난 왜요라고 묻는 대신 그래요 그거 써요 하고 말았다. 먼저 물어보다니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요즘엔 내 기대가 이 정도다. 그렇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왜요? 하고 생각했다. 전문 사진가도 아니고 그냥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인데. 요즘 나는 직업이 여럿이다. 그 중 하나도 벌이가 시원치않다. 그러니 이것저것 한다. 그러면 어느정도 따라가지만 그래도 별로 평균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런다. 다재다능하구나! 빌어먹을. 난 그런 말이 싫다. 진짜 빌어서 꾸역꾸역 입에 먹는 느낌이기 때문에.

포토그래퍼 누구 하고 쓰인 내 이름은 낯설었다. 동시에, 유튜브에서는 누가 내 영상을 도용했다는 댓글이 올라왔다. 제가 님에게 영어 자막을 달아드렸어요. 퍽 자랑스럽게 그런 댓글이 달렸다. 저작권 개념이 없을수도 있지, 메일을 달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신고 버튼을 눌렀다. 그게 별 소용이 안 되는걸 알면서도. 뭐라도 되는 듯이 떠벌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가난한 주머니보다는 부유한 주머니가 좀 낫지 않을까요. 훔쳐갈 것도 없어요. 그냥, 먹고 살게만 해 주세요. 애원을 해 볼까? 아직 그걸 못할 것 같으니 배는 부른 것 같다.

우울증이 시작할 때는, 난 한 이주 전부터 느낌이 온다. 우스운 말이지만 프로우울증러니까. 내가 분명 망할 거라는 건 온 몸으로 느끼는데 이거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게 올 때가 있다. 그럴 떄면 난 아주 조용히 정신과를 가고, 시간에 맞춰 약을 먹고, 그래도 소용이 없어서 상담 예약을 했다. 상담소 서가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이 몇, 안 읽은 책이 한 권 있었고 그 책이 마음에 들었다. 잠시 기다리는 십 분동안 책을 읽으려고 세번쯤 일찍 갔나. 저자는 필사적으로 자살을 말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말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려는 중이었디. 그 사람이 죽고 싶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그리고 살고싶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런 책을 썼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책, 마지막 장은 내게는 소리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옛 소련의 연설 같기도 했다.

반면 상담 선생님을 어떘을까. 그림을 그린다면 눈에 광원을 넣고 싶다. 투명하고 동그란 두 눈동자에 한참 힘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요, 하고 묻는 소리가 강해 보이는 게  때로 이상해 보이고는 한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한 주에 뭘 했어요, 그 말이 좋아서 노력할 때도 있다고. 모두들 내가 알아서 잘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래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적어도 말뿐이라도 그런 것은 그 사람 뿐이라 낯설기도 하다.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삼켰다. 그리고 적당한 농담으로 시작해 본다. 이번 주도 망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항상 많이 들으시죠? 웃음은 가볍고, 날 감춰준다. 그런 기분이다.

올 해 나는 책도 써 봤고 앨범 커버도 찍고 유튜버도 돼 봤고 이거저거 다 해봤고 여전히 가난뱅이다. 몇 년 내에 이건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인다. 난 가난뱅이인가봐, 누구한테 말하면 좀 멋진 것 같은데 그래봐야 뜻은 그대로다. 2020년에 직업을 한 네 개쯤 더 만든 것 같고 곧 하나를 실행할 예정이다. 우울증은 올해쯤 왔으니 적어도 두 해는 조용하겠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남자친구가 말했다. 난 아직도 자기랑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싶어.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 너무 무서워. 난 엄마가 되기 싫어. 그리고 다 싫어. 게다가 난 가난뱅이야. 더 싫어.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뭐가 상관이야?
난 상관있어.
왜?
묻지 마. 상관 있어.
그래, 그래.
그래그래 라고 하지 마.
알았어.


알았어라고도 하지 말라고 하려다 입을 딱 다물었다. 이번 우울증은 지나간다. 언제 또 올까. 그건 모르겠지만 내년에는 직업이 한 다섯개 정도 더 생길 것 같은 느낌이다. 여전히 가난뱅이겠지만.



1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228 일상/생각우울증과 나 1 머랭 20/12/15 5650 11
    11328 경제혼돈의 부동산 시장, 2021년 투자대처법 (김경민 교수) 25 토끼모자를쓴펭귄 21/01/09 5650 2
    3947 IT/컴퓨터유쁠 매장에서 아이폰7 수령해왔습니다. 20 Leeka 16/10/18 5651 0
    4670 사회미군 기지촌 위안부 사건이 법원에서 일부 인용되었습니다 13 다람쥐 17/01/21 5651 8
    11050 음악앉은 자리에서 사라지기 14 바나나코우 20/10/14 5651 9
    2971 영화워크래프트 (2016) - IMAX 3D 시사회 후기 11 리니시아 16/06/08 5652 1
    2919 일상/생각자네도 '불량' 군의관이 였나.... 34 Beer Inside 16/05/30 5652 0
    3868 일상/생각(뒷북주의) 한글이 파괴된다고요? 38 범준 16/10/10 5652 0
    7231 게임하스스톤 새 확장팩 '마녀숲' 3 저퀴 18/03/13 5652 0
    9333 음악[팝송] 칼리 레이 젭슨 새 앨범 "Dedicated" 6 김치찌개 19/06/21 5652 1
    12471 역사자주포란 무엇인가? - (1) 자주포 이전의 대포 14 요일3장18절 22/01/26 5652 9
    3773 영화개봉한, 개봉중인, 개봉 예정인 애니매이션들 (데이터 주의) 7 별비 16/09/26 5653 0
    4325 일상/생각오늘은 문득 뒤늦은 자기반성을 해봅니다. 16 아나키 16/12/08 5653 5
    4347 일상/생각면접으로 학부신입생 뽑은 이야기 45 기아트윈스 16/12/10 5653 17
    8367 일상/생각레포트용지 소동 9 OshiN 18/10/14 5653 10
    8495 오프모임[급벙]2시간 달립니다. 22 무더니 18/11/09 5653 7
    6971 방송/연예역대 사이버포뮬러 TV ~ OVA 1~3위들 18 Leeka 18/01/19 5654 0
    7027 게임2018 시즌 리그 오브 레전드 탑 유저들에게 '나르' 하세요 9 싸펑피펑 18/01/31 5654 2
    10465 게임둠 이터널 쪼끔 한 일기 4 바보왕 20/04/06 5654 8
    10548 일상/생각학교가 개학합니다 4 Leeka 20/05/04 5654 0
    11509 역사'7년 전쟁'이 '1차 세계 대전'이다. 10 Curic 21/03/21 5654 3
    12576 방송/연예청평악, 정치개혁과 인간군상. 4 코리몬테아스 22/03/04 5654 7
    4715 기타프리즌 브레이크 시즌5 오피셜 트레일러 5 김치찌개 17/01/28 5655 0
    12537 IT/컴퓨터백수가 어플 개발했습니다 42 helloitraffic 22/02/23 5655 0
    784 일상/생각[분노]기한을 지키는 것에 대해 21 난커피가더좋아 15/08/12 5656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