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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3/15 10:14:00
Name   머랭
Subject   나는 네 편
난 솔직히 철딱서니가 없는 편이다. 이건 나이가 든다고 고쳐지는 건 아니니, 뭐 나름대로 불치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딱 하나만큼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보면 어른처럼 생각하는 게 있기야 있었으니. 세상에 공짜는 없고, 절대적인 내 편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우리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한민국은 민주 국가고, 기회의 평등이 있어야 하며, 더 해줄 능력이 있더라도 나는 반드시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 한참 앞서 출발하는 사람은 물론 잘못되었으나, 나는 모든 부정을 이기고 기왕이면 1등을 했다면 좋겠다는 것. 촌지를 주지 않아서 학교에서 똑같은 선생에게 이년쯤 괴롭힘을 당할 때도 엄마는 한번도 학교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은 끝났으니, 뭐,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나는 학교를 일주일 넘게 무단 결석하는 것으로 엄마의 판결에 답했다. 내가 미웠던 선생은 놀랍게도 열흘이 지난 뒤에야 집에 전화했다. 의외로 엄마는 나를 크게 혼내지 않았다. 나에게 실망스러워 하기야 했지만. 다시는 학교를 빼먹으면 안 된다는 엄포로 그 일은 끝났다. 학교에서는, 뭐랄까. 감히 학교를 일주일 넘게 빼먹는 몹시 불량학생스러운 그 행동 덕분에 다들 나를 안 건드리게 되었다. 야호, 내가 불량학생이다. 어린 마음에 난 내 자신이 좀 멋지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준열한 질문 가운데 기억나는 게 또 있다. 내가 열살 때였나. 엄마가 나를 불러놓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동생을 원하느냐고. 나는 싫다고 했다. 동생이 생기면 내가 돌봐야할 게 뻔했다. 엄마는 내가 선택했으니 나이 들어 외로워져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엄마는 진심이었고, 나도 동생을 갖고 싶다던가 외롭다던가 하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했으니 당연하다고 믿었던 걸까?

우리 집에서는 뭐든지 대가가 있었다. 돈은 아니어도 정서적 지지라든지, 아니면 감정 쓰레기통이라든지, 뭘 받으면 반드시 어떤 것이라도 토해내야 했다. 엄마는 도대체 왜 나는 엄마에게 뭘 사달라고 말을 안 하냐고 묻기도 했다. 난 갖고 싶은 게 없다고 거의 모든 순간 대답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나만 피곤해질 게 뻔한데. 내가 그 모든걸 감수하고 딱 하나, 사달라고 한 게 있는데, 바로 핸드폰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사준 핸드폰은 결국 부모님의 시야 안에 들어온다는 걸 깨닫는 순간, 부모님 몰래 돈을 모아서 세컨 폰을 마련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몰래 하기에 있어서는 거의 달인의 경지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무조건적인 내 편은 없다. 호의를 받으면 그 이상이거나 준하는 보상을 해야만 관계는 유지된다. 쭉 그렇게 생각하던 나에게 어떤 사람이 생겼다. 나하고 아주 똑 닮은 인생을 살아온 친구였다. 약간 다른 점이 있기야 있었는데. 우리 엄마는 말로 총을 쏜다면 그 집 엄마는 텔레비전을 던졌다. 그러니까, 세부 전공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어느 집 엄마가 더 공격력이 높으냐로 우린 자주 툭탁거렸는데, 마치 마법사와 검사 중에 어떤 직업이 더 세냐고 온라인 게시판에서 투닥거리는 것과 비슷한 논쟁이었다. 아, 좀 비껴난 이야기지만 우리의 결론은 이거였다. 그냥 각 캐릭터가 강해지는 시기가 있고, 우열은 가릴 수 없다는 것. 그러니까 확장팩마다 캐릭터 성능이 달라지는 거하고 비슷하니 밸런스 싸움은 의미가 없다고, 우리는 낄낄거렸다.

우리는 술을 함께 마시자마자 곧장 무언가 통한다고 생각했고, 일년쯤 지났을 때는 그 어떤 친구보다 서로의 비밀을 아는 사이가 아는 사이가 되었다. 오 년이 지났을 때는, 세상에, 나는 이 친구는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나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십년 쯤 지났을 때는 우리는 상대가 어떤 결점이 있더라도 믿고 기다려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가 죽고 싶을 때는 내가 달려갔다. 나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지 않았으면 아마 죽었을 거야. 농담삼아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살아남았어도 아주 다른 사람이 됐을 거야. 틀림없어.

이런 이야기를 상담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내가 내 친구를 생각하는 방식이 이상적인 남편이 해줄 수 있는 역할과 비슷하다고 했다. 두 분이 마치 서로 부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나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애는 언제든 끝날 수 있지만 우정은 끝이 없잖아요. 내 말에 선생님이 물었다. 결혼은요? 나는 거의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건 이혼하면 끝이잖아요. 우리는 연애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서로를 더 믿는 거예요. 안심이 되기도 하고요. 아, 우리 관계가 이상한 지점이 어디인지 쓰면서도 알 것 같다.

그런 친구가 남자를 소개하기로 했다.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직감이 좋은 편이다. 하하. 어쩌면 만나기 전부터 싫었던 게, 이 친구가 드디어 결혼할 남자를 데려온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을까. 솔직히 내가 좀 질투하고 있다는 걸 이제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그게 건강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내가 말했다시피 친구는 계속 친구니까, 우리 사이의 관계가 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고 해도, 섭섭하지만 적응해야할 문제다. 나는 네 편이니까. 그러니까,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문득 우리 둘이 죽고 싶었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마다 우리는 전화기를 붙들고 이렇게 묻고 또 대답했다.

“너는 내 편이지?”
“응, 나는 언니 편이야.”
“언니는 내 편이지?”
“응, 나는 네 편이야.”

세상에 절대적인 내 편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이상하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
“응?”
“우리 만나서 다행이지?”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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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통(♡)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아니, 그 노통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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