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5/08 19:21:04
Name   私律
Subject   그냥 쓰는 이야기
홍차넷에서 제가 요즘 눈이 가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아는 분은 아니고 그 분도 저를 모르실 겁니다만, 직장생활 얘기하시면서 가끔 아이 사진을 올리거나 아이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얼마 전 그 분께서 올린 아이 뒷 모습 사진과 객지생활한다는 글을 보니, 그분처럼 직장생활을 하셨던 제 어머니와 그 아이 또래였던 제가 생각났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글을 쓰게 되네요.

제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셨습니다.
어머니는 40년대생이신데, 학교 다니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죠. '대학생 친구 하나'를 절규하던 전태일이 어머니보다 조금 어리니까요.
그 시절 딸로 태어난 어머니와 이모들께서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외할머니 덕이었습니다. 1920년생이신 외할머니는 책을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공부도 무척 하고 싶어하셨다죠.
그런데 등하교길에 동네 개구쟁이들이 '아이스께끼'를 했답니다. 요즘은 그런 걸 못 보지만, 저 어릴 때만해도 꼬맹이들이 곧잘 하던 짓이었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안 당신의 아버님께서는 '당장 학교 때려치우라'고 불호령을 하셨고, 더는 학교를 다니실 수 없었답니다.
듣기로는 일제시대-그 시절 분들 말로 왜정 때-다 보니, 딸이 돌아다니다가 언제 어디로 잡혀갈지 모른다는 걱정도 했던 모양입니다. 외가인지 외할머니 친정 근처였는지 일본군 병영이 있었는데, 일과시간이 끝난 왜놈들이 훈도시 차림으로 돌아다니면서 무슨 짓을 해도 어쩔 수 없었다죠?
외할머니께서는 학교를 얼마 못 다닌 것이 평생의 한이었고, 당신의 딸들에게는 그 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집안 모두가 딸들도 학교에 보내는 걸 반대했습니다만, 쌀계 계주 노릇을 하며 돈을 모아 딸들까지 학교를 보내셨습니다.

그 시절 일반적인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직장은 간호사-그 시절 표현으로는 간호부인가요?- 아니면 교사 뿐이었을 겁니다(요즘과 달리 직업으로서의 교사는 인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큰이모께서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구(맞나 모르겠습니다)에 있는 간호대학으로 시험을 보러 갔답니다. 그런데 그만 물갈이 때문에 배탈이 나서 시험을 못 봤고, 큰이모에게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요즘 말로 전교에서 놀던 성적이셨는데, 다행히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등록금이 싼 교대를 갔습니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할 수 있었던 뒷바라지는 거기까지였답니다. 막내 이모는 고등학교까지만 다녔고, 대학입시를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답니다. 두어해 전인가? 백살이 된 외할머니께서 같이 할머니가 된 막내 이모에게 정말로 미안해하시더군요. 이모는 '나도 공부하기 싫었어'라고 얼버무렸습니다만... 얼굴을 보니 이모도 대학에 못 간게 한이 되었나봅니다.
그러니 나이 먹고 방통대를 마쳤겠죠.

그렇게 학교를 다닌 어머니께서는 평생을 교사로 사셨습니다.
저를 낳고 두어해쯤 쉰 다음, 외할머니/할머니 손에 차례로 저를 맡기고 직장에 다니셨죠. 저 어릴 땐 버스를 세번 갈아타면서 출근하셨다니 편하진 못했던 모양입니다.
저를 두고 처음 출근하시던 날, 제가 그렇게 울었더라죠. 어머니와 사이가 안좋았던 제 할머니께서도 그 날을 안타깝게 기억하셨으니, 어머니 마음이야 뭐....
외할머니와 할머니께서 차례로 저를 봐주셨습니다만, 제가 국민학교 들어간 다음이었던가? 시골로 내려가셨습니다.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니었습니다. 겨우 낮에 저 혼자 둔 것 뿐이고, 저녁에는 가족이 모두 있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죠.
그래도 어머니 마음에는 그렇지 않았나봅니다. 명퇴하시면서 소감을 말씀하실 때, 저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제가 기억나는 건, 집에 와서 혼자 점심 꺼내 먹고 연탄불 갈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는 낮에 아이 혼자 두신 것이 말도 못하게 안타까우셨던 모양입니다만, 저는 괜찮았어요. 처음엔 어머니가 없다는 것이 정말 싫었는데, 국민학교 2학년쯤 되니까 어머니가 있으면 되려 어색하더라구요.

얼마전 그분의 아이 사진과 지방으로 출퇴근하신다는 글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났습니다.
- 그 아들의 뒷모습과 제 어릴 적 모습이 조금 비슷하게 느껴지더라구요. '내 아이는 너처럼 못생기지 않았어!'라고 격분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 저도 그 나이 때는 잘생겼었습니다. 똘똘했구요.
- 매일 아침저녁으로 저를 보던 어머니 속도 저랬는데, 저 분은 어떨까. 그러고보니 어머니는 방학도 있었쟎아?
- 우리 어머니도 저 양반 또래로 태어났더라면 로스쿨을 갔겠지? 그리고 아마 저 비슷한 삶을 살았겠지?
- 저 사람을 부러워할 어머니, 어머니가 부러웠을 이모들. 학교 문턱도 못 밟아서 한글도 못 읽던 할머니는 외할머니를 부러워하셨지...
- 이제는 내가 그 시절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구나. 나보다 어렸던 그 시절 어머니...
- 저분 아들은 나처럼 어머니 없는게 편하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 분 아이가 잘 컸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이 글이 회원저격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모르는 사람이 내 얘기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바로 지우고 사과드리겠습니다.



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795 게임워크래프트 3)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 있던 한 경기. 13 joel 21/06/17 3788 6
    11667 여행[사진多]5월의 가파도 산책 8 나단 21/05/12 4145 6
    11662 일상/생각자전거 자물쇠 절단기 19 주식하는 제로스 21/05/11 5391 6
    11657 음악(어버이날 특집) Dad, I'm leaving you - 아빠 안녕 6 바나나코우 21/05/08 3086 6
    11656 일상/생각그냥 쓰는 이야기 1 私律 21/05/08 3311 6
    11655 경제NFT, 제 2의 루나 엠버시인가? 7 lonely INTJ 21/05/08 5207 6
    11627 음악중년의 사랑 8 바나나코우 21/04/29 3629 6
    11626 경제머리와 가슴의 불일치. 킹받는다 25 Jack Bogle 21/04/29 4494 6
    11602 IT/컴퓨터5g는 무엇인가 13 매뉴물있뉴 21/04/21 3342 6
    11778 사회자연선택과 단기적 이익 13 mchvp 21/06/12 5298 6
    11824 사회보편적 청년 담론의 종말? 12 샨르우르파 21/06/27 3962 6
    11822 도서/문학빌 게이츠의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리뷰 32 mchvp 21/06/26 5582 6
    11544 도서/문학표현력의 중요성 (feat. 동물로 산다는 것) 1 오쇼 라즈니쉬 21/04/03 3740 6
    11541 게임잇 테이크스 투 리뷰 저퀴 21/04/02 4412 6
    11530 음악다이어트에 매번 실패하는 지킬박사 11 바나나코우 21/03/28 3838 6
    12411 기타독일 다리와 한붓그리기의 비밀 6 Jargon 22/01/06 3895 6
    11504 과학/기술보이스피싱범을 혼내주자 7 구밀복검 21/03/19 5914 6
    11460 역사자유시 '참변'의 실제원인과 실체 열린음악회 21/03/02 4576 6
    11455 도서/문학『성의 역사』 4 - 『육체의 고백』 2 메아리 21/03/01 3831 6
    11397 철학/종교(번역)자크 엘륄: 우리가 자유롭다는 환상 6 ar15Lover 21/02/06 4527 6
    11391 방송/연예기존의 아이돌과 방탄소년단 8 순수한글닉 21/02/02 8688 6
    11578 게임어떤 어려운 게임들 이야기 5 바보왕 21/04/14 3755 6
    11353 일상/생각술도 못먹고.. 2 켈로그김 21/01/19 3434 6
    11322 일상/생각단칸방 라이프 32 꿀래디에이터 21/01/05 5362 6
    11260 창작그 바다를 함께 보고 싶었어 Caprice 20/12/22 3488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