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7/06 20:31:09
Name   Regenbogen
Subject   나는 그 공원에 가지 못한다.
못보던 길냥이 한마리가 해름참에 주차장을 어슬렁 거린다. 드나드는 차에 다칠까 내보내려 다가가니 배를 까고 드러누웠다. 내보내려 하자 내 발치에 몸을 비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근처 자그마한 공원이 떠올랐다. 내가 가지 못하는 지척에 있는 공원.

지난 1월 한파주의보가 내린 어느 매섭게 춥던날…

주차장에 갑자기 주먹만한 새끼고양이 다섯마리와 애 티를 갓 벚은 노랑 어미 고양이 한마리가 나타났었다. 분명히 사람손을 탄 듯 드나드는 손님들마다 쪼르르 달려가 발라당 누워 냥냥 거리더라. 어느 손님은 귀여워 한참을 쓰담하기도 하고 어느 손님은 기겁을 하고 또 어느 손님은 무슨 업장에서 동물을 풀어 넣고 기르냐 항의를 했다.

저 애기들이 어디서 왔나 나가보니 누군가 고양이 박스와 물그릇 그리고 사료 한포대를 도로와 붙어 있는 우리 업장 화단에 놓고 갔다. 그 안에 있던 그 애기들이 화단을 넘어 주차장으로 들어와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에게 쪼르르 달려가곤 했다.

영업에 지장을 받는 건 둘째치고 그대로 두었다간 드나드는 차량에 그 애기들이 다칠판이었다. 구청에 연락을 하니 주말과 코로나 탓에 유기동물 구조가 어렵다며 당장 아무런 방법이 없다 했다. 이어 동물구조단체들에 연락을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어렵다 난색을 했다. 다시 구청에 연락해 설명을 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마찬가지… 그러면서 우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위치를 말해주면 차후에 조치를 취하겠다 했다.

안전한 곳… 사무실에 둘 순 없으니 근처 작은 공원이 떠올랐다. 한겨울이라 사람도 거의 없으니 박스에 팩을 넣고 두꺼운 이불을 덮어 놓으면 구청에 서 나올때까지 며칠은 괜찮겠지 싶었다. 아침 저녁으로 물과 팩을 갈아줄 요량이었고…

어미부터 새끼들까지 상자에 담는 건 수월했다. 사람손을 얼마나 탔는지 부르기만 해도 쪼르르 달려오더라. 팩을 데워 바닥에 깔고 이불을 덮어 놓으니 따뜻해서 좋았는지 고르륵거라며 조는 애기도 있었다. 그렇게 상자에 담고 생수와 이불 그리고 여분 팩을 몇개 더 챙겨 공원으로 가다…

그냥 우리집으로 대려갈까? 멈춰섰다. 하지만 이내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그랬을까…

여섯마리 거두는 건 일도 아니었다. 돈이든 시간이든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럴듯한 이런저런 이유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진짜 이유는 딱 한가지. 귀찮았다.

다음날 출근길 업장 화단에서 난 그대로 얼어 붙어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어미노랑이와 검은 얼룩이 새끼 한마리가 도로에 누워 있었다.




그날 이후 산책삼아 가던 그 공원에 발을 끊었다. 지나갈 일이 있어도 부러 돌아서 가곤 했다.

여섯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그 공원에 가지 못한다.




15
  • ㅜㅜ
  • 이 글은 슬픈 글이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524 일상/생각동성애의 결혼과 인권의 연관성 16 Liebe 17/04/26 5270 15
5474 요리/음식집에서 스테이크 구우면 맛이가 없는 이유 35 Morpheus 17/04/19 8562 15
5858 일상/생각 아 제발 좀 제발 아 좀 제발 40 세인트 17/06/29 5939 15
4993 일상/생각누구의 인생이건,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이 있다. 22 SCV 17/02/24 6622 15
4857 일상/생각내 동생 쫀든쫀득 13 님니리님님 17/02/12 5390 15
4691 일상/생각그런 사람, 32 새벽3시 17/01/25 4978 15
4686 요리/음식어떤 백작과 짝퉁 홍차 10 사슴도치 17/01/24 6657 15
4308 기타아직도 이불킥하는 중2병 썰, 20 마투잘렘 16/12/06 5499 15
4284 도서/문학ISBN 이야기 17 나쁜피 16/12/02 5715 15
4251 IT/컴퓨터마, 얼굴만 봐도 알겠네! 너지! 24 Azurespace 16/11/29 8435 15
4002 과학/기술신내림 약물과 무당, 주술가, 버서커 6 모모스 16/10/25 8579 15
6470 일상/생각컴패션, 이타심 26 Liebe 17/10/27 5648 15
2637 요리/음식한식판 왕자와 거지, 곰탕과 설렁탕 45 마르코폴로 16/04/18 9826 15
2247 과학/기술이론물리학 vs 신경생물학 ... and 실존주의 23 리틀미 16/02/18 6872 15
1782 일상/생각인용의 실패와 승리, 두 정치인의 경우 9 moira 15/12/15 8498 15
11849 일상/생각나는 그 공원에 가지 못한다. 3 Regenbogen 21/07/06 4201 15
1118 일상/생각수줍수줍..이런걸 한번 해봤어요.. 18 얼그레이 15/09/29 7911 15
9459 일상/생각주말을 보내는 법 18 멍청똑똑이 19/07/20 6220 15
15872 경제뚜벅이투자 이야기 19 기아트윈스 25/11/30 1517 14
15739 육아/가정50개월 어린이(?) 유치원 적응기 11 swear 25/09/22 1077 14
15699 방송/연예2025 걸그룹 4/6 10 헬리제의우울 25/08/31 1551 14
15667 일상/생각용인 평온의 숲 6 당근매니아 25/08/13 1566 14
15191 정치탄핵심판의 범위 및 본건 탄핵심판의 쟁점 5 김비버 25/01/06 2206 14
15121 일상/생각나는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싫다. 11 활활태워라 24/12/10 2892 14
14467 사회세상에 뒤쳐진 강경파 의사들과 의대 증원 44 카르스 24/02/18 5619 1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