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8/28 23:35:27
Name   호타루
Subject   던지면 어떠냐
페이커의 저점이니 뭐니 이야기가 있네요.

페이커의 오랜 팬이지만 솔직히 이건 인정합니다. 이제는 페이커의 우승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스포츠팀은 우승을 목표로 합니다. 따라서 페이커를 계속 기용한다? 이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은퇴하라는 이야기는 기본으로 깔고 들어갑니다.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누구보다 멋진 커리어를 쌓았던 페이커였던 만큼 그 반작용 역시 상상을 초월하게 마련입니다. 퇴물? 그건 이제 페이커 입장에서는 욕 정도도 아닐 겁니다. 하도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말일 테니까요.

뭐, 아주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죠. 아니 아까 니가 그랬잖아. 프로는 우승을 위해 존재한다며. 그리고 우승 보기 어려울 거라며. 그럼 팀에 있는 거 자체로 민폐 아니냐. 연봉 깎아먹고 팀 동료 커리어 깎아먹고 그게 무슨 민폐냐. 벵기도 은퇴하고 피글렛도 은퇴하고 지금 은퇴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이 있기나 하냐. 추해지기 전에 은퇴하는 게 낫지 않냐.

다 동의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논리에서 질 수밖에 없는 거 다 인정합니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정할 수밖에요.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은퇴합니다. 나이가 들면 피지컬이 못 따라갑니다. 소위 말하는 안되는 건 안되는 것. 그건 누구보다도 페이커 본인이 제일 잘 알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페이커가 나오기를 바라는 건, 우승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또다른 서사를 보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늙은 장수가 선봉에 선다. 황충이 따로 없군요. 그 결과가 비록 오늘은 좌절이었습니다만, 나중에 천하통일이 될 지 누가 압니까. 민폐? 민폐일 수 있습니다. 팀원의 커리어에 민폐라면 민폐 하죠 뭐. 프로는 결과로 말하고, 결과가 나쁠 때에 받는 비판 역시 숙명이니까요.

제목의 뜻이 그겁니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에 도전하는, 한계와 싸우는 사나이. 그가 없이는 롤이라는 게임의 역사를 설몀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언제가 마지막이 될 지 모를 그런 도전을 하겠다는데, 그 결과가 안 궁금해? 그 결과가 뭐가 되었든 그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전설인데, 뭐 어때서? 그깟 결승전, 이미 트로피를 9개는 접수하고 동료들에게는 우승컵을 팬들에게는 자부심을 안겼던 그가 고작 국내리그에서 나이가 들어서 좀 던진다는데, 그게 뭐 어때서? 그깟 게임, 던지면 좀 어떠냐?

오래 전 그러니까 벌써 10년 전인데 전 그때 기아 팬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이종범의 팬이었죠. 타율 봐라 이게 레전드냐, 찬스에서 혼자 죽으면 다행이다, 나오면 삼진에 땅볼에 도루도 못해 수비도 못해 그냥 명예롭게 은퇴하지? 이런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이종범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은퇴 종용에 대한 이종범의 대답은 이거였습니다. 은퇴가 왜 명예로운가.

타의에 의해 강제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한계와 싸웠습니다. 팀의 우승을 위해 싸웠고 배트를 휘두르고 야구를 계속했습니다. 선발보다는 대타로 나온 적도 많았지만, 팬들은 그가 안타를 때려도 홈런을 때려도 파울을 쳐도 헛스윙을 해도 볼넷으로 나가도 삼진을 먹어도 플라이를 쳐도 병살을 쳐도 언제나 환호했습니다. 제가 페이커에게 그러듯이. 아무도 이종범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그가 94~97년의 전설적인 천재의 모습을 다시는 보여주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언제나 그에게 환호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만화가 최의민은 이종범의 은퇴에 맞추어 낸 만화에서 전설적인 표현으로 이종범을 기리죠. 그 표현을 빌려서, 페이커로는 안된다, 페이커로는 롤드컵 못 든다, 페이커 은퇴해라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페이커가 떠날 시간은 페이커가 정한다. 페이커는 그럴 자격이 있다.



9
  • 롤 1도 모릅니다만 뭔가 확실히 멋있읍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805 요리/음식덴뿌라와 튀김의 기원 27 마르코폴로 16/05/14 15077 10
6826 일상/생각덴마크의 크리스마스 8 감나무 17/12/25 3826 15
3626 스포츠덴마크의 작은 거인 5 Raute 16/09/01 5599 4
4239 게임데차 다들 현타오셨나요? 13 헬리제의우울 16/11/27 5408 0
6072 일상/생각데자와가 쏘아올린 작은 글 11 제피 17/08/08 3536 10
3378 정치데자뷰.. 한국군 위안부 27 눈부심 16/07/28 4888 0
14251 일상/생각데이터가 넘치는 세계(로 부터의 잠시 도피?) 1 냥냥이 23/11/04 1632 3
4105 게임데스티니차일드 8일차 13 헬리제의우울 16/11/07 4152 0
4029 게임데스티니 차일드에 대한 짧은 소감 10 Leeka 16/10/29 6685 0
4125 게임데스티니 차일드!!! 15 Liquid 16/11/10 4776 0
4080 게임데스티니 차일드 1주일 후기 3 Leeka 16/11/04 4734 0
8401 게임데스티니 가디언즈 -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목소리 1 키스도사 18/10/21 7131 0
2451 IT/컴퓨터데스크톱에서 여자친구 사진을 개선하는 신경망 5 April_fool 16/03/22 6691 1
12098 게임데스루프 리뷰 2 저퀴 21/09/19 3678 2
9977 게임데스 스트랜딩 리뷰 8 저퀴 19/11/11 5181 8
6662 기타데스 스타 만들어 주세요! 6 키스도사 17/11/27 4667 3
6107 영화덩케르크(Dunkirk)를 보고 (스포O) 6 집정관 17/08/14 5027 3
11923 철학/종교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좋은 일 하며 살겠습니다. 7 right 21/07/26 4220 6
7422 일상/생각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26 탐닉 18/04/22 5093 24
12025 게임던지면 어떠냐 19 호타루 21/08/28 3872 9
10383 영화던 월(Dawn Wall) - 결정적 순간의 선택 (스포가득) 하얀 20/03/15 6464 6
10829 과학/기술더하기와 플러스 26 아침커피 20/07/30 5011 8
769 요리/음식더운 여름에 마셔볼만한 값싸고 시원한 화이트와인 11 마르코폴로 15/08/11 9341 0
3045 기타더운 여름날 더치커피를 즐기기 8 커피최고 16/06/16 3383 1
2844 영화더스틴 호프먼 할배 이야기 21 구밀복검 16/05/20 7467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