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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11/14 12:14:45
Name   호타루
Subject   스포있음) 여섯 박자 늦은 오징어 게임 감상
탐라에 댓글로 쓸라다가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에 씁니다. 감상문이니 대단히 두서없이 나불대는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다 본 건 아닙니다. 다만 스토리라인은 이미 나무위키에서 나불나불댄 내용을 대여섯 번 읽었던 터라 최후의 반전까지 싹 꿰고 있었고, 주로 찾아본 건 사람들이 게임하는... 그러니까 목숨을 거는 여러 장면들이었습니다.

결과를 다 알고 봐서 그런가, 아니 오히려 그래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 왜 달고나 게임에서 성기훈이 X됐다를 내뱉던 그 장면 있잖아요. 분명히 개그씬인데 개그씬으로 안 보입니다. 분명히 완전 시리어스물인데도 불구하고 실패하면 죽는 판이라는 걸 웃음 포인트로 쓸 수 있는 발상에 한 번 감탄, 헛웃음밖에 안 나오는 절망적인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에 두 번 감탄, 피가 난무할 수밖에 없고 여차하면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에 대한 관객의 거부감을 효과적으로 줄이는 장치라고 생각하니 세 번 감탄.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줄다리기 씬이었습니다. 전날 밤에 살육전이 벌어져서 인식이 흐려져서 그렇지 사실은 게임으로 따지면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으로 너 죽고 나 살자 모드죠.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 근데 그 장치가 총성과 칼과 깨진 유리가 난무하는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살인극이 아니라 줄다리기라는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게임. 이게 사람을 죽이는 데 쓸 만한 게임인가 싶어서 그런지 전혀 치명적이지 않아 보이죠. 설마하니 초등학생 운동회 때나 했던 줄다리기가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역할을 할 줄은.

그래서 그런지 관객이 사람들의 죽음을 체감하기에는 임팩트가 떨어집니다. 심지어 진 팀을 총살시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처형용 단두대가 로프를 자르면 진 팀은 추락사하는 시스템이라 아주 편하게(?) 처형을 시켜줍니다. 근데 이게 역설적으로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 게임이니 여기서 피가 튀겨버리면 처음에 임팩트를 세게 준 뒤 힘을 한 번 뺀 후 뒤로 갈수록 강해져야 몰입감이 더하는 드라마에서 강강강강강강으로 나가버리는 꼴이라 거부감만 더했을 겁니다.

처절한 생존경쟁. 심지어 살기 위해서였다지만 어쨌든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걸 인식이라도 한 것마냥 자기 손을 쳐다보는 성기훈의 복잡한 표정. 아주 잠깐 조그맣게 보이는 추락사한 시체들. 플롯으로 보나 뒷맛으로 보나 향후 전개상 힘조절의 필요성이라는 감독 입장에서 보나, 감히 표현하건대 제가 이제껏 봐 왔던 장면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똑같이 실패하면 죽고 그 와중에 너죽고 나살자라는 분쟁이 등장하는 유리 징검다리나 오징어 게임은 문자 그대로 피칠갑투성이에 사망한 사람들의 시체가 여과없이 보이죠. 더 이상 힘조절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 많은 게임 중에 동료애를 만들고 바로 다음에 그 동료끼리 죽고 죽이게 하는 반전을 위한 장치 + 본격 너죽고 나살자 + 좋은 전개를 위한 힘조절의 필요성을 한꺼번에 아우를 수 있는 장치로 줄다리기를 떠올린 감독의 치밀한 구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네요. 심지어 보통 이럴 때 늘어지는 전개 때문에 임팩트가 떨어져서 보다가 마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실낱같은 틈을 제대로 파고드는 절묘한 절단신공.

신파 때문에 늘어진다 어쩐다 호불호 갈리는 요소가 많다고 합디다만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니가 피칠갑에 내성이 있으면 봐라. 세 번을 봐라. 그리고 사골 우려내듯이 계속 머릿속에서 작품 깊숙히 담긴 그 육수를 뽑아내서 그 진미를 느껴라. Do not desist until you reach to the bottom of the pot.

전개 방식과 인상깊은 명장면에 대한 칭찬은 이쯤하고 주제의식으로 넘어가면... 그 생각이 들더군요. 작년부터 인터넷을 휩쓸고 있는 드라마 장르가 있죠. 피카레스크. 스카이 캐슬, 펜트하우스에 이어 오징어 게임도 피카레스크니 문자 그대로 백투백투백 홈런입니다. 스카이 캐슬과 펜트하우스가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망가지고 무너져내리는지를 잘 보여준다면, 오징어 게임은 피비린내나는 밑바닥에서 사람들이 극한에 몰렸을 때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손에 피를 묻히며 생존하려고 발악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좀 씁쓸한 이야기인데 이런 장르가 유행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의 부조리함, 정확히는 인간의 탈을 쓴 피 없는 살육전이란 현실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차이점이라면 스카이 캐슬이나 펜트하우스는 상류층의 가면을 벗겨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오징어 게임은 지옥보다 더한 현실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진 정도? 목숨만 안 날아갈 뿐이지 나 살려면 너는 죽어야 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숙적이 되며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는 인원은 극소수인 거, 직장이나 자영업이나 다 똑같습니다. 요즘 세상이 살 만했다면 이러한 비극을 고발하는 피카레스크보다는 장미빛 아름다운 동화 이야기가 더 떴겠죠. 환상은 여유가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 달콤한 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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