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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1/19 23:57:07
Name   Dignitas
Subject   아이를 재우며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섬마을 이야기인가요? 이 노래로 아이를 종종 재우는데요. 아직 12개월인 아이가 벌써 노래를 알아듣기 시작합니다. 자고싶지 않은 상태에서는 노래만 시작하면 몸부림을 쳐요. 그래도 늦게 자면 안되니까 꾸역꾸역 노래를 불러 진정시킵니다. 그러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전통의 자장가를 부르기도 하는데요. 이 자장가를 아이에게 불러주면서 눈을 감으면 옛날 외할머니께서 무릎베개를 해주시고 불러주시던 순간이 떠올라요. 선선한 여름 낮에 시골집 마루에서 이 노래를 듣다가 어느새 잠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외갓집은 친가와 다른 느낌이었어요. 거의 모두가 그렇지 않나요? 너무 시골이라 슈퍼마켓도 없어서 과자도 없었지만, 방학 때 놀러가면 여름엔 할머니가 구해둔 주스 가루를 시원한 냉수에 타서 오렌지 주스를 만들어 주시곤 했어요. 가루만 넣으면 주스가 된다는게 너무 신기해서 벌컥벌컥 마셨었죠. 점심 때까지 늦잠 늘어지게 자다가 할아버지 새참 갖다드리자고 하면 은색 스뎅 쟁반에 고기랑 쌈채소랑 된장이랑 막걸리랑 이것저것 챙겨서 밭고랑에 함께 앉아서 쌈싸먹기도 했었고요. 겨울엔 아궁이에서 밤 늦게까지 놀아도 혼나지도 않았어요. 불장난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안방 화로에 고구마도 맛있게 구워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제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항상 건강하지 않으셨어요. 제 기억의 처음부터 당뇨를 앓고 계셨거든요. 신장도 좋지 않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 큰 병원에서 투석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손엔 혈관이 부풀어 있었어요. 주름도 많았고요. 그래도 방학 때 안겨서 할머니 손을 잡으면 그렇게 보드랍고 따뜻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 손은 꽤 컸는데 그 손으로 저를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셨으니 잠이 솔솔 오지 않았겠습니까.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은 병실에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따뜻한 손을 잡고 의식이 불분명한 할머니께 임용고시 합격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장하다 우리 손주, 그 힘든걸 해냈다고 하시면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이 온가족을 다 부르고 안좋은 소식을 전했는지, 아이들은 나가있으라는 어른들 말씀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저에겐 정말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순간이 한 노래에 담겨있더군요. 이제 저의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었고, 저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자장가를 부르며 제 외할머니 이야기를 해줄 순 없지만, 같은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토닥이면 할머니가 제게 주셨던 사랑을 아이에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노래를 부르고 토닥이니 어느새 천사처럼 아이가 잠들었습니다. 이렇게 또 행복한 기억을 남기는거죠. 인생 뭐 있나 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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