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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4/26 13:11:30수정됨
Name   카르스
Subject   찻잔 속 담론들의 시대
[편의상 좀 편한 말투로 쓰겠습니다]

윤석열이 당선되고 몇 달 지난 어느 순간부터, 사회 담론들을 보며 뭔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공허함을 느낀 건 담론이 틀려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재명을 당 대표로 뽑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 윤석열의 과도한 친일 외교에 대한 비판, 한국의 비합리적인 검열과 규제에 대한 비판, 여전히 심각한 한국의 여성차별을 논한 글을 보자. 
분명히 맞는 말이었고 사회 개선을 위해 필요한 지적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담론들에서 더 이상 옛날같은 보편성과 아우라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공허함을 느낀다.

옛날에는 언론이고 시민단체고 정당이고 많이들 인용하고 호응이 좋은 담론이 하나는 있었다.
고전적인 반공 보수 담론,
민주당과 구좌파 진보정당을 대표하는 진보 담론(https://redtea.kr/recommended/1198 참고),
유승민 이준석 등을 필두로 한 합리적 보수 담론,
2010년대 중반 이후 유행한 페미니즘 및 소수자 인권운동에 따른 신좌파 담론 등등.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한국 사회는 어느 시대든 네 담론 중 최소 하나는 유행했다.
어떤 담론이든 과도하게 나이브했거나 틀린 주장도 분명 있었고 그래서 진보 담론처럼 쇠퇴하기도 했지만,
담론들은 한때나마 사회를 지배했으며, 밝은 미래를 꿈꾸는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담론들 어디에서도 나는 시대를 개혁하는 힘을 느끼지 못한다.
과거에 하던 소리들을 현재에 대한 피드백 없이 녹음기처럼 반복하거나,
주장들이 보편성을 잃고 과격해져서 중도로의 확장성을 눈 뜨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과거의 보편적인 큰 꿈을 잃어버렸고 타성에 젖어 주장할 뿐이다. 
이들 담론이 현실이 되더라도 사회를 얼마나 개선할 수 있을까 회의만 든다.

그 결과는 자기 바깥으로 넘어가면 영향력이 급속도로 사그라드는 '그들만의 담론'의 세상이다.
수많은 '찻잔 속의 담론'들로 가득한 게 2023년 한국이다.

이런저런 담론들은 넘쳐나지만 그 어떤 담론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지 못한다.
담론 주장들은 사회에 어떤 생채기도 내지 못한 채 메아리만 울려퍼질 뿐이다.


이 현상을 제일 강하게 느꼈던 이태원 참사를 예로 들어 보자.
이태원 사고를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여론조사를 보면 윤석열과 이상민의 행보가 부적절했다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고 애도하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세월호 사건과는 달리, 이태원 사건은 사고가 난지 몇주 후 담론장에서 사라졌다.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 사회를 비판하는 담론은 유가족들, 강성 민주당 및 진보정당 성향의 매체와 시민단체를 제외하면 볼 수 없다.
몇몇 강성 보수우파라면 모를까, 사람들이 공감능력이 부족해서, 이태원 참사가 있어서는 안 될 인재임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핵심은 그 사람들도 어지간한 정치적 강성이 아니면 이태원 담론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사회 부조리를 비판했던 세월호 정국과는 확실히 다른 양상이다.


그렇기에 다들 생각과 불만이 많지만 어떤 의제도 형성되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행보를 비토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것은 이명박, 박근혜 때의 반MB, 반한나라당/반새누리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이재명과 민주당의 행보에 불만있는 사람은 많지만, 문재인 때 유행했던 반민주당 담론은 더 이상 없다.
윤석열이 이준석을 내치고 반페미니즘 공약을 무시해서 불만인 청년 남성들이 많지만, 이들의 반페미니즘 담론은 죽었으며 이들의 한탄은 극성 인터넷 커뮤니티를 벗어나지 못한다.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경제 불황, 마약 유행, 계속되는 출산율 급락 등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런 도전에 무능한 정치권 비판 의견은 많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들의 아우성은 불안 토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된 덴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나는 가설을 이야기해 보자면
첫째, 20여년 넘게 사회를 지배해온 진보 담론이 완전히 죽어버렸다. 내가 과거에 쓴 글(https://redtea.kr/recommended/1198)에서 볼 수 있듯이 이유는 여러 가지다. 진보 담론이 성공해서 수명을 다했거나, 처음부터 틀린 소리임이 탄로났거나, 진보좌파들의 이상향인 서구 선진국들이 위기를 맞았거나, 현실 구현에 실패했거나. 그래서 예전에 비해 진보 담론이 완전히 죽었다.
두번째, 진보 담론을 계승해야 할 보수 담론은 진보정권에 대한 안티테제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나마 있는 뜻은 윤석열 정부의 삽질로 꺾여버렸다.
세번째, 계속되는 정치적 균열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이 정치적 담론을 무시하기 시작하였다. 최근 몇년간의 아우성을 보면 그런 심리도 이해가 간다.

이러한 '찻잔 속 담론들의 시대'는 언젠가 사회에 등장한 신담론으로 끝날 거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담론이 없는 건 위험성을 지닌다. 몇십년 만에 한번 오는 국내외의 거대한 변화는 분명 시대를 읽는 통찰력과 적응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렇게 아무 담론도 없이 자기 할 일만 하는게 좋은 태도인가 우려된다. 더 나아가 지배적 담론이 없다는 사실은 2023년 한국의 병리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배 담론이 없는 시대, 2023년을 미래의 역사가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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