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3/05/29 19:03:55수정됨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brunch.co.kr/@crmn/16
Subject   책장 파먹기
책장 파먹기
https://brunch.co.kr/@crmn/16

학부생 때 운영체제 과목에서 스케줄링이라는 개념을 공부하던 기억이 난다. 사용자가 여러 작업을 실행하면 컴퓨터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각 작업들에 대한 실행 순서를 정한다. 선입선출법도 하나의 방법이고(FIFO) 실행 시간이 짧은 순서대로 줄을 세워 실행하는 방법도 있으며(SJF), 이 작업 잠깐, 저 작업 잠깐 하는 식으로 모든 작업에 시간을 배분할 수도 있고(round robin), 아니면 각 작업에 우선순위를 매긴 뒤 중요한 작업부터 실행할 수도 있다(priority). 교과서의 해당 단원 끝 부분에는 미국의 모 대학교에서 서버를 종료하려 했더니 약 20년 전에 작성된 작업이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그때까지 대기 중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곁다리로 실려 있었다.

그땐 그 이야기를 보며 웃었는데 요즘 내 책장을 보면 남말 할 때가 아니다. 책 욕심이 많아서, 혹은 내 독서 능력을 과신해서 책을 많이 사놓고는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또 사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책장에 아직 못 읽은 책이 한가득이다. 보통 5권 사면 3권쯤 읽고 2권은 아직 안 읽은 상태에서 또 책을 사는 듯하다. 최근까지는 이 상태의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유명 작가가 TV에 나와서 "책은 읽을 것을 사는 게 아니에요. 사놓은 것 중에서 읽는 거지."라는 말을 했을 때 공감, 혹은 안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작년 말 즈음부터 뭔가 단순하고 깔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삶에 도입한 여러 변화 중 하나가 '책장 파먹기'였다. 이름에 대한 아이디어는 '냉장고 파먹기'에서 얻었다. 음식을 따로 사지 않고 냉장고가 텅텅 빌 때까지 냉장고 안에 그동안 쌓여 있던 음식만 먹는 것을 냉장고 파먹기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걸 책장에 적용하기로 했다.

일단 책을 사는 일을 멈추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자 그제야 밀려있는 책들이 무의식 중에 얼마나 내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왔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컴퓨터는 작업이 밀려 있으면 쉬지 못하고 계속 돌아야 하고(CPU 점유율 100%), 그 과정에서 과열 및 저장공간 파편화 등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좀 쉬게 해 주어야(idle) 운영체제가 알아서 이런저런 유지보수와 최적화도 하고 컴퓨터 본체 온도도 좀 내려가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새 책을 사는 것을 멈추자 정말 오랜만에 머리가 쉬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생각의 한 부분이 진공처럼 비어있는 것 같아 어색했지만 적응이 되고 나니 이게 정상이고 그동안의 내 독서 양식이 비정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사놓은 채 안 읽고 있던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책장에서 자기 차례만 기다리고 있던 책들. 이 책들을 한 권 한 권씩 읽어가면서 밀린 숙제를 해결하는 듯한 후련함, 더 정확히는 밀려있던 생각이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해결되는 개운함을 느꼈다. 책을 한 권 산다는 것은 내 머리 한 켠이 그 책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고(malloc으로 메모리 할당), 그 생각은 그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메모리 해제가 안 된 상태). 그래서 안 읽고 쌓여있는 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진다(메모리 파편화).

그렇게 밀린 책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니 머리가 맑아졌다. 밀린 책이, 아니 밀린 생각이 줄어들자 생각도 점점 잘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사로 비유를 하자면 지금까지는 이삿짐을 정신없이 집 안에 쌓아두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짐들을 조금씩 제 자리로 배치하면서 집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고, 컴퓨터로 비유를 하자면 파편화된 자잘한 메모리가 아니라 좀 큼직하게 비어있는 메모리 덩어리가 생긴 느낌이다. 더불어 한 권 한 권씩 책을 끝낼 때마다 성취감도 생기고.

요즘도 습관처럼 접속해 보는 인터넷 서점에는 흥미로운 책들이 많다. 예전 같으면 샀을 그 책들을 지금은 사지 않는다. 책장에서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도 내가 과거에는 흥미를 느끼고 샀던 책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은 거의 10년 동안 안 읽고 있던 책 한 권을 끝냈다. 입력은 없고 출력은 있으면 내 책장도 언젠가는 텅 비게 되겠지(x(t) -> 0). 새 책은 그때 가서 사는 것으로.



7
  • 지금은 사지 않는다.
  • 감성 좋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794 일상/생각헬요일 화이팅입니다^^ 5 곧점심시간 22/05/09 3676 1
13667 일상/생각염치불구하고 하나만 더 쓸까 합니다.... 6 강세린 23/03/25 3676 0
13429 기타카드결제 단말기 구매 후기... 11 whenyouinRome... 22/12/26 3677 2
8611 게임[LOL] 12월 8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18/12/07 3678 0
14020 일상/생각사진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4 메존일각 23/07/06 3678 13
14392 일상/생각제가 92년생인데, 요즘 제가 기성세대가 된 것 같습니다. 11 인프피남 24/01/10 3678 2
1441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2 커피를줄이자 24/01/27 3678 3
6652 스포츠171125 오늘의 NBA(스테판 커리 33득점) 김치찌개 17/11/26 3679 1
6984 일상/생각끄적임 2 무더니 18/01/23 3680 0
7039 스포츠180202 오늘의 NBA(러셀 웨스트브룩 20득점 21어시스트 9리바운드) 김치찌개 18/02/02 3682 0
4417 일상/생각오늘 하루는 마음이 싱숭생숭한 하루가 되 버릴듯... 7 NF140416 16/12/20 3683 0
13223 오프모임mm없이 하는 mm벙 오늘 밤 9:30-11:30 3 지금여기 22/10/12 3683 4
14349 역사이스라엘의 어두운 미래, 가자전쟁의 미래는 어디인가? – 베니 모리스 7 코리몬테아스 23/12/20 3683 5
14422 IT/컴퓨터의존성 역전 패턴을 활용한 소프트웨어 설계 개선(1~3) 30 kaestro 24/01/30 3684 0
13711 꿀팁/강좌《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칼럼니스트 강연 (어크로스 출판사) 7 초공 23/04/03 3684 0
13912 창작클립챔프를 아십니까 바나나코우 23/05/25 3684 0
13624 방송/연예[눈물주의]엄마를 위해 KBS 해설이 된 최연소 해설위원의 숨겨진 이야기 RedSkai 23/03/08 3687 2
14690 도서/문학제가 드디어 에어북을 출간했습니다. 14 카르스 24/05/19 3688 36
4025 일상/생각오늘은 금요일,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2 AI홍차봇 16/10/28 3689 0
13919 영화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기술적으로 훌륭하나, 감정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또다시. 3 당근매니아 23/05/28 3690 4
13922 일상/생각책장 파먹기 2 아침커피 23/05/29 3690 7
14468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3690 10
15140 정치이재명은 최선도, 차선도 아니고 차악인듯한데 43 매뉴물있뉴 24/12/19 3690 7
13544 스포츠[MLB] 잭 그레인키 캔자스시티와 1년 8.5M 재계약 김치찌개 23/02/05 3691 0
13991 오프모임6월22일 학동역 세종한우 7시 17 소맥왕승키 23/06/19 3691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