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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1/01 18:58:23
Name   다람쥐
Subject   [2015년 노벨문학상]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여성은 전쟁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2015년 노벨문학상수상은 벨라루스 출신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차지하였습니다.

이 책은 문학상을 탔으나 소설이 아닌 ‘구술서’입니다.
작가 스베틀리나는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로 194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제2차 세계대전에 소비에트연맹으로 참전했던 여성들을 찾아 인터뷰를 합니다. 그렇게 모은 인터뷰로 태어난 것이 이 책입니다.
이 책은 1983년 완성되었으나 출판사에서는 출판을 거절합니다.
2차 세계대전(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이라 합니다.)에 출전한 소비에트의 여성들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전하기 때문입니다.

‘대조국전쟁’이 끝난 이후, 소비에트연방은 당시 참전하였던 ‘붉은 군대’와 이 전쟁을 신화화합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남성들이 이념과 당위성, ‘전술’과 ‘무공’, 전우애에 집중할 때 여성들은 다른 것을 봅니다.

‘나치 독일이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라는 작전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했어...독일은 코카서스 진격을 시도했고...
그렇지만 스탈린 그라드에서...미국이 참전했고 독일이 수세에 몰렸어....결국 1945년 5월 9일 베를린공방전을 마지막으로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끝났지.’

이것은 남성들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남성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웠고 내가 어떠한 무공을 쌓았는지, 상대방을 나의 ‘조국’ 어떻게 무찔렀는지.
적에 대한 증오심과 나의 무공에 대한 자랑스러움, 애국심과 이념을 서술합니다.

그러나 전쟁에 출전한 여성들은 다른 것을 기억합니다.

무릎까지 올 만큼 곱에 땋은 머리를 싹둑 잘리고 뎅강 앞머리만 남아 군복을 들고 나올 때 허전했던 목덜미.
조국을 위해 출전한다고 들떠서 기차를 타던 자신에게 어머니가 싸 주었던 러시아 전통 떡 10개.
누구일지 모르는 어린아이 무덤 위에 올려져 있던 노란 구두 한 짝.
마차를 타고 시체 위를 지나갈 때 바퀴 아래에서 우드득우드득 으스러지던 적군의 두개골.
전장에서 시작했던 첫 생리.
독일군 10명의 머리를, 그것도 오차 없이 같은 부위를 쏘아 죽인 저격수는 빨간 머플러를 좋아한 소녀 사샤라는 것,
그녀는 결국 그 빨간 머플러 때문에 눈에 띄어 저격당해 전사하였다는 것. 그 소녀 저격병들은 처음에는 망아지 한 마리를 잡고도 슬퍼서 밥을 먹지 못하였다는 것.
독일군에게 쫒겨 늪지대로 피해 늪 속에 목만 내놓고 숨어있었는데 그 중 한 여군은 아이를 낳은 지 몇 달 되지 않았었다는 것.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데 독일 군견이 쫒아오고 그들은 거의 잡히기 일보직전이었다는 것.
그 때 지휘관이 아무 말도 없이 아이 엄마를 쳐다보자, 그녀는 아이를 포대기로 꼭꼭 싸서 물에 가라앉혔다는 것. 울지도 않고 가만히..

전쟁이 끝나고 나서, 소비에트는 ‘붉은 군대’의 승전을 신화화합니다. 그와 동시에 유럽까지 갔다 온 군인들에게는 유럽의 풍요로움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하지 못하게 합니다.
공산주의를 지키고 냉전을 굳게 하기 위해서지요. 무공은 남성들의 것이지만 여성들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합니다.
사람을 죽인 몸으로 어떻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요? 사람을 죽인 손으로 애를 키워요? 하물며 4년동안 남성들과 함께 지냈으니까요.

수많은 여성들이 침묵합니다. 전쟁의 고통은 남성에게도 남아있지만 여성들에게는 더욱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감정적으로 왜곡한 기억이라고 말합니다. 이념과 애국심 앞에 여성들은 입을 다물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이 책을 쓸 당시 출판사도 ‘그런 쓸데없는 것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라고 하였지요

역사 교사였다가 징집된 여인은 독일군 장교 숙소에 잠입해 식사에 독을 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녀는 잠입에 쉽게 성공하나, 매일 자신을 향해 ‘당케 쇤’하고 인사하던 독일 장교들을 아직 기억합니다.. 그녀는 제대 후 다시 역사 교사가 됩니다. 역사 교과서는 세 번 바뀌고 세 번 다 다른 내용을 가르치라고 하였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기억납니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역사를 바꿔 버리지 말고 지금 나에게 물어봐.’

‘조국이 부른다’는 말에 애국심에 불타 전장에 나가겠다고 스스로 입영통지서를 밀어 넣었던 순수한 소녀들. 어린 나이에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발에 맞지 않는 군화와 겨드랑이 밑까지 오는 군복 바지를 입고 기차에, 트럭에 실려 전선으로 보내졌던 소녀들. 살아서 돌아온 그녀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기까지 40년,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받기 까지 다시 30년이 걸렸습니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신의 글은 마침표를 찍었다가 말줄임표가 된다고 합니다.
이 책이 알리는 것은 단순한 전쟁의 참상이 아닙니다. 그 곳에 있었던 한 명 한 명의 여성들의 말과 기억을 통해, 한 인간의 생애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 책의 특이한 형식 덕분에 우리들은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그래서 책 한 장 한 장을 넘기기가 참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을 읽고서야
저도 마지막 마침표가 말줄임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도 역사는 계속되고 전쟁과 아픔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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