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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12/28 17:08:28수정됨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우화등선하는 호텔에서의 크리스마스
집 근처에 스위스그랜드호텔이라는 5성급 호텔이 있습니다.  근처라고 썼지만 도어투도어 500m 쯤 되다 보니 사실상 그냥 집 앞에 호텔이 있는 수준입니다.  제가 알기로 서울 시내에 괜찮은 호텔들이 많이 생기기 전까지는 꽤 경쟁력 있는 특급호텔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이야 광화문역 바로 앞에 포시즌스가 박혀버렸고, 웨스틴조선이나 롯데호텔, 더플라자호텔 등도 있긴 합니다만, 적당히 녹지가 보이면서 부지도 넉넉하게 확보한 호텔을 바란다면 스위스그랜드호텔도 입지가 꽤 괜찮았겠죠.  이 호텔은 2009년인가에 힐튼에서 위탁 계약을 체결하여 '그랜드 힐튼'으로 이름을 바뀌었다가, 10년 짜리 계약이 종료되면서 다시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왔습니다.

전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부터 쭉 서대문구에서만 살았고, 그래서 이 호텔에 대한 기억들이 몇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세가 좀 펴기 시작한 중학생 시절 가족끼리 축하할 일이 있을 때 호텔 뷔페에 방문했던 기억입니다.  당시에 1인당 5만원이 좀 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에는 큰맘 먹고 가야 하는 고오급 뷔페였죠.  폭립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이 호텔에서 처음 맛봤던 걸로 기억합니다.  호텔 로비부터 휘황찬란했고, 특히나 뷔페가 있는 지하층 로비는 샹들리에부터 해서 살면서 처음 보는 류의 공간이었어요.  음식도 맛있었구요.

두번째는 부친이 암투병하던 도중 수년에 걸친 두집 살림을 들키고, 이혼소송에 뭐에 풍비박산이 나고 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당시 외도사실을 들킨 부친은 생활비를 즉시 끊어버리고는, 어머니와 저희 형제가 살고 있는 집의 대출금도 갚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이 집을 경매에 넘기기 전이었는지, 이미 경매에 부쳐진 후 부친이 친인척을 동원해서 명의 돌리기를 시전할 때의 일인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저 호텔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죠.  3대1로 대화하기에는 후달렸는지, 어머니-저-동생 순으로 1대1 릴레이 면담 방식을 제안하더군요.  제가 두번째 타자로 들어가 이야기하던 도중 자기 합리화하는 역한 말들을 들었고, 부자가 서로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회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커피 한잔도 안 시키고 앉아서 죽치고 있던 사람들이 서로 소리 지르고 얼굴에 물 뿌리고 난장을 쳤으니, 호텔 직원들 입장에서는 난감했겠다 싶어요.  여튼 그때에도 커피값은 꽤나 비쌌고, 그 뷔페 입구에 자리한 카페 역시 하얀 인테리어가 참 화려하고 예뻤습니다.

이번에 들른 호텔은 여전히 클래식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고, 방 컨디션이나 전체적인 관리상태도 양호했습니다.  요즈음 지어지는 호텔들이 일반객실 면적을 20제곱미터 초반대로 설정하는 것에 비해서, 스위스그랜드호텔은 30제곱미터 초반대로 방이 설계되어서 공간이 훨씬 쾌적하다는 게 상당한 메리트였습니다.  다만 호텔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게 보였어요.

호텔이 내세웠던 강점인 수영장과 뷔페를 비롯한 식당들은 대부분 영업을 중단했습니다.  원래는 재즈바에서 공연을 하고, 칵테일과 위스키를 팔고, 중식당과 일식당, 양식당이 영업하고, 뷔페와 다이닝들이 운영되던 공간은 불을 끄고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고작해야 카페와 델리가 을씨년스러워진 지하로비를 지키는 수준이더군요.  바 찬장에는 파라필름 봉인도 없이 킵해둔 위스키 병들이 꽤나 많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이름표의 주인들은 어떤 기분일지 문득 궁금했습니다.  이그제큐티브 라운지가 운영되지 않으니 이그제큐티브 룸들은 아무런 메리트 없이 비용만 더 받는 이상한 서비스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호텔은 죽어가고 있었고, 여기에는 우회등선 내지는 고사 같은 단어가 아마 어울릴 겁니다.

뒷 이야기들을 찾아보니 호텔의 상속자들이 십수명 즈음 되고, 호텔을 그대로 운영하며 수익을 내기보다는 빠르게 현금화해서 엑시트하고 싶은 사람들의 비중이 꽤 높은 듯 했습니다.  안그래도 오로지 아파트를 울부짖는 요즘 세상에서 홍제역과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고, 넉넉한 부지도 확보되어 있는 곳이니 욕심이 났겠죠.  독립문역 근처에서 그런 식으로 옥바라지 골목이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무악재역 앞에 있던 한화 그룹의 별장은 한화아파트가 되었습니다.

참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호텔은 비록 오래되었고 요즘 시대에 뒤쳐졌다고 보일 구석들이 있긴 하지만, 부분적으로 리뉴얼하고 강점을 발굴하면 충분히 먹힐 요소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들 비슷비슷한 '요즘 컨셉'을 추종하는 와중에, 이런 클래식한 호텔도 나름의 니즈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겁니다.  당장 힐튼이 운영할 때에만 해도 홍대입구역까지 오가는 셔틀을 운영하며 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왔었습니다.  사실 공항철도 근처에 위치한 몇 안되는 5성급 호텔이고, 경복궁-을지로-신사역 등으로 이어지는 3호선 라인은 관광객들 입장에서 꽤나 괜찮은 입지라고 생각해요.  집기류들 역시 여전히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었고, 최근에도 개선한 흔적들이 보여서 더 안타깝더군요.

글을 쓰면서 검색해보니 올해 초부터 계속 아파트단지로 재개발하네 마네 하는 기사들이 떠있었고, 아마 코로나19 시즌을 거치면서 이러한 몰락이 가속화된 점도 있겠다 싶습니다.  마침 그 직전에 힐튼과의 위탁계약도 종료되었구요.  그 와중에 건설경기는 휘청하는 상황이니 과연 호텔을 허물게 될지,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들도 명확하지 않으니 폐쇄된 시설마다 2023. 12.까지 잠정적으로 운영을 중단한다고 써붙여놨었겠지요.  그러나 개발계획이 좌절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감축된 인원을 다시 불러들이고, 운영을 정상화하여 이미 진행되던 우화등선을 되돌리는 건 쉬운 일은 절대 아닐 겁니다.  

그러니 아마 제 기억들은 아직까지도 멀쩡한 호텔 건물과 함께 세월 사이로 흘러가 버릴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렇게 한 시대는 지나가고, 전 그 호텔방에 하룻밤이라도 머물러 봤다는 사실을 훗날 돌이키며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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