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4/02/17 21:17:50
Name   오쇼 라즈니쉬
Subject   한 소아청소년과 전공의의 사직서
본인 허락 하에 세브란스 전공의회장이 많이 퍼뜨려달라고 한 글이라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녕하십니까
신촌 세브란스 소아청소년과 의국장 입니다.
저는 올해 가을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수료를 앞둔 가을턴 4년차 전공의입니다.
타과를 지원하다가 떨어져서 소아청소년과에 지원한 것도 아니고, 소아청소년과가 3년제로 바뀌어서 지원한 것도 아닙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되고 싶어서 선택했고, 3년 5개월 동안 전공의 생활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해왔으며 작년 보릿고개 전부터 소아청소년과 의국장을 자원하여 일하고 있었으며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선택하겠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해왔습니다.

저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현재 임신 중인 임산부입니다. 전공의 생활은 누구에게나 힘들지만, 저와 제 가족에게는 정말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회사원인 제 신랑은 저 때문에 회사 진급을 포기하고 2년에 달하는 육아휴직을 감내했고, 신랑의 복직 후에는 양가 부모님들의 헌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왔습니다.

세브란스 소아청소년과는 대한민국 소위 big five 대학병원 소아청소년과 중 올해 유일하게 전공의 티오가 차지 못한 곳입니다. 전공의 부족으로 인한 소아청소년과 의료 붕괴를 큰 병원 중 가장 먼저 경험하고 있으나 병원에서는 소아청소년과가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과이므로 지원을 해주지 않아 입원전담의를 구하기도 어렵고 정부의 지원 역시 없어 교수와 강사들이 전공의의 빈 자리를 메꾸며 이제는 정말 모두가 지쳐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필수 의료 붕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부는 의대 증원 2000명이라는 정책을 발표하였습니다. 500명을 하든, 2000명을 하든 의대 증원 정책은 소아청소년과의 붕괴를 막을 수 없습니다.

소아청소년과는 인력부족이 극심하기 때문에 임산부전공의도 정규 근무는 당연하고 임신 12주차전, 분만 직전 12주전을 제외하고는 기존 당직 근무에 그대로 임합니다. 그리고 저는 최고년차이기 때문에 당직도 일반 병동이 아닌 중환자실 당직만 섭니다. 태교는 커녕 잠도 못 자고 컵라면도 제때 못 먹습니다. 전공의는 교대근무가 아니므로 당직이 끝나는 7am부터 정규 근무에 바로 임합니다. 아파도 ‘병가’는 꿈도 못 꾸고 수액 달고 폴대를 끌어가며 근무에 임해왔습니다. 이곳은 중증소아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전공의로서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소아코드블루를 경험하고 한달에 한 두 명 이상의 환아의 사망을 경험합니다. 지난 달 당직 시간 응급실에서 심정지가 온 환아를 50분동안 심폐소생술한 적이 있는데 가슴 압박을 하면서 내 뱃속 아기가 유산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엄마이기전에 나는 의사니까 지금은 처치에 집중하자고 다짐하며 임했습니다. 다행히 환아가 살아난 후 오랜 처치가 끝나고 당직실로 들어가서는 뱃속의 아기에게 엄마로서 죄책감이 들어 몇 시간을 울었고 걱정할까봐 가족들에겐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매년 5000명의 의사를 배출한 들 그 중에 한명이라도 저처럼 살고 싶은 의사가 있을까요? N수가 많아지면 소아청소년과를 지원할 의사도 정말 많아질까요?

대한민국은 아이를 낳기도 키우기 어려운 나라이지만, 의사로서 아이를 치료하기도 어려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소아청소년과는 붕괴 중이고 이는 세브란스 소아청소년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사가 5000명이 된 들 소청과를 3년제로 줄인 들 소청과 의사에게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지원자는 늘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현실이 이대로 간다면 세브란스병원 다음으로 다른 빅 파이브 소아청소년과가 무너지는데 10년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전공의 기간만 버텨내면 이후에 돈 많이 벌 텐데 왜 힘들다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다른 과 이야기입니다. 소청과 교수님들의 삶은 타과 교수님들의 삶과는 너무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 대학병원 교수도 되고 싶지 않습니다. 로컬에 나간 선배님들 중 많은 분들이 소아환자진료가 아닌 피부미용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돈 못 버는 호구 소리 들어도 힘든 현실에서도 그만두지 않고 소청과 트레이닝을 지속했던 이유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제껏 제 앞에서 떠난 아이들의 마지막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엄마들도 보지 못한 아이들의 last normal 모습 그리고 그 아이들의 마지막 말들은 제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소청과를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이 제 마음 속 무겁게 자리해 꼭 제대로 된 실력 있는 소아과 의사가 되어야 된다고 오뚜기처럼 저를 세워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직서를 제출하고자 합니다. 파업을 위한 사직이 아니고 정말 “개인사직”을 위한 사직서입니다. 금번 파업을 하더라도 의대증원수만 줄어들지 소아청소년과를 포함하여 무너지고 있는 필수의료과를 위한 실질적인 정책은 마련되지 않을 것 같고 의사가 환자 목숨보다 자기 밥그릇을 중시한다는 비난들은 더는 견디기 괴롭습니다. 소청과 의사의 밥그릇에 뭐가 담겨 있나요? 소아청소년과를 같이 하자고 후배들에게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습니다. 몇 개월만 수료하면 끝이라 속상하지만 이런 현실이라면 저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면허가 있더라도 소아환자진료를 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의사 집안도 아니고 모아둔 돈도 없고 이제는 세 아이의 엄마로서 생계 유지도 필요하고 아이들을 돌볼 시간도 필요합니다. 엄마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포기하고 피부미용 일반의를 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50분의 심폐소생술후 살아난 위 아이는 지금 일반병동에서 다음주 퇴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환아의 웃는 얼굴을 보니 오늘도 참 뿌듯했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씁쓸함이 밀려옵니다. 소아청소년과 의사로 못다한 꿈은 의료봉사로 채워보겠습니다.

병원 동료들 선후배님들 교수님들께 죄송하며 이때까지 감사했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소아청소년과 의국장 올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을턴으로 졸국 6개월 남은 분이고 직접 만나뵌 분 말씀에 따르면 참 좋은분이라고 하는데 안타깝네요...

[전공의 부족으로 인한 소아청소년과 의료 붕괴를 큰 병원 중 가장 먼저 경험하고 있으나 병원에서는 소아청소년과가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과이므로 지원을 해주지 않아 입원전담의를 구하기도 어렵고 정부의 지원 역시 없어] 이 부분이 현실의 문제를 가장 잘 대변하는 구절인 것 같습니다.



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468 역사 AI를 따라가다 보면 해리 포터를 만나게 된다. 4 코리몬테아스 24/02/18 1221 10
    14467 사회세상에 뒤쳐진 강경파 의사들과 의대 증원 44 카르스 24/02/18 2614 14
    14466 과학/기술 2066년안에 우리의 태양계 내에 호모 에릭툭스 이상 문명이 발견할 확률 3 mathematicgirl 24/02/18 1106 0
    14465 사회한 소아청소년과 전공의의 사직서 115 오쇼 라즈니쉬 24/02/17 3391 5
    14464 도서/문학최근에 읽은 책 정리(라이트노벨, 비문학 편) 5 kaestro 24/02/17 783 0
    14463 일상/생각LTNS 최근 본 드라마중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네요.(스포있어요) 4 큐리스 24/02/17 1069 0
    14462 기타안녕하세요 이시국 의대생입니다 20 땡땡 24/02/16 1740 0
    14461 게임스트리트파이터 6 최초의 정상결전 - capcom cup x 2 kaestro 24/02/15 872 2
    14460 기타존 미어샤이머 인터뷰 2 은머리 24/02/15 1021 9
    14459 오프모임2월 24일 아침 드라이벙 18 치킨마요 24/02/15 1141 0
    14458 일상/생각와이프 참 고마워요~~ 2 큐리스 24/02/15 952 3
    14457 일상/생각낭인시대. 4 moqq 24/02/14 995 5
    14456 일상/생각바드가 쓴 시: 윈도우 터미널 3 큐리스 24/02/14 792 0
    14455 일상/생각인사고과와 사회적 가면에 대한 생각 6 nothing 24/02/13 1236 8
    14454 일상/생각와이프에게 말못한 비밀을 아들에게는 할수 있을까요? ㅎㅎ 6 큐리스 24/02/13 1389 1
    14453 일상/생각와이프가 오일 마사지에 맛을 들였네요.^^ 12 큐리스 24/02/13 1456 1
    14451 오프모임무지성으로 쳐보는 연휴 막날 돼지갈비 벙 8 비오는압구정 24/02/12 1223 1
    14450 스포츠(데이터 주의)'빌드업 축구'는 없다. 우루과이전으로 돌아보는 벤투호의 빌드업. 13 joel 24/02/12 1576 29
    14449 일상/생각지난 연말에 한달간 업장에서 바하밥집 기부 이벤트를 했습니다. 13 tannenbaum 24/02/11 1222 49
    14448 기타이스라엘의 한니발 지침(Hannibal Directive) 4 은머리 24/02/11 1191 6
    14447 도서/문학최근에 읽은 책 정리(프로그래밍 편) kaestro 24/02/10 986 1
    14446 도서/문학최근에 읽은 책 정리(만화편)(2) 2 kaestro 24/02/09 877 1
    14445 도서/문학최근에 읽은 책 정리(만화편)(1) 6 kaestro 24/02/09 1017 1
    14444 기타제66회 그래미 어워드 수상자 4 김치찌개 24/02/09 827 1
    14443 일상/생각안전한 전세 월세 계약하는 방법 2 게이득 24/02/08 1124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