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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29 02:50:40수정됨 |
Name | 오쇼 라즈니쉬 |
Subject | 감사함이 가득한 식탁 |
우선 농부아저씨들에게 감사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근데 농부아저씨라는 호칭은 여혐 아닌가여?) 오늘의 이야기 대상은 식탁에 오르는 쪽입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차례씩 음식을 섭취합니다. 아침, 점심, 저녁, 그 사이에도 군것질을 하곤 하지요. 정갈히 차려놓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바쁜 출근길에 길거리에서 대충 때우기도 합니다. 살기 위해 기계적으로 입 안으로 음식을 넣는 가운데 왠지 우리는 그 음식의 원재료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떻게 자란 것인지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리고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요? "한국 사람들은 왜 아무 거나 먹어요?" 프랑스인인 불어 선생님이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특유의 건방진 말투 있잖아요. 프랑스(와 많은 유럽 가정)에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다같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식재료 하나를 고를 때에도 어디서 어떻게 키운 것인지 신중하게 따지고요.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식재료와 가까워지게 되고 음식을 차리고 먹는 행위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해요. 하지만 좁은 제 인맥 안에서 제가 아는 동년배들 중 이런 식의 식사문화를 가졌던 사람은 없었읍니다. 대신 주로 이런 말들을 들었죠. "밥은 엄마가 알아서 차릴테니까 넌 공부나 해." 한국에서 음식을 차리고 먹는다는 행위는 부차적인 것,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이가 돌이 지날 무렵,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짧은 기사이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생산량이 떨어져 죽을 운명이었던 독일의 어떤 젖소들이 동물보호단체의 후원을 받아 난생 처음으로 초원을 밟고 뛰어다녔다는 내용입니다. 저와 아내는 이 기사를 보고 둘 다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사실 눈물도 찔끔 났습니다. 저희 부부가 유난스런 반응을 보인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 아이가 독일 소들의 신세를 졌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모유수유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저희에게 출산 이틀만에 모유가 나오지 않는 날벼락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아이는 입원 기간 중 먹던 국내 브랜드 분유를 집에 와서도 계속 먹었습니다. 우유가 맞지 않는지 영아산통이 심해 밤마다 심하게 울었습니다. 소이분유같은 것을 찾아보았지만 우리나라에 없는지 제가 못 찾는 건지 아무튼 실패했습니다. 젖동냥을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요. 그러다 찾은 것이 독일 분유였습니다. 분유를 바꾼 당일날부터 아이는 편하게 잠을 자기 시작했고 돌 전후까지 독일 젖소들이 만든 우유를 마셨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기사에 나온 소들 중 저희 아이를 키워준 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저희는 조용히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인드풀 이팅'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우리말로는 '마음챙김 먹기'정도로 해석하는데요. '음식을 어떻게 먹는가'에 초점을 맞춘 다이어트 내지는 섭식장애 치료 도구 정도로 쓰입니다. 천천히 먹어라 온전히 먹어라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기 전까지의 과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등등 구체적인 방법론도 있지만, 저는 음식에 대한 아래와 같은 태도가 어쩌면 진정한 '마인드풀 이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인드풀 이터 상상도. 출처 : MBC 스페셜 목숨걸고 편식하다 중) 언제부턴가 식탁 앞에 차려진 생명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해졌습니다. 믿는 신도 없는데 식사 전에 기도하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된 식사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육식습관을 버리고 채식을 한다 해도 우리가 생명체를 꺾어서 삼키고 소화하게 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래서 식사할 때 무, 당근, 상추, 사과, 오렌지에게 사과한다. 어느 날인가 우리가 피부에 햇빛을 받고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먹는다. 그러므로 덜 민감한 생명체를 취해야 한다. 우리가 섭취하는 먹을거리는 어떤 것이든 본래 생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사과든 토마토든 풀 한 포기든 먹으려면 그것을 죽여야 한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자연의 경이를 소비할까? 식물은 땅에서 중요한 존재다. 나는 나무를 자를 때면 나무에게 인사를 보낸다. 데이지나 팬지꽃을 뽑을 때나 사과 또는 무를 깨물 때면 내 마음은 오그라든다. 내가 뭐길래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단 말인가? 우리는 지상의 모든 것에 연민을 갖고, 최대한 많은 것에 유익을 주고, 최소한의 것에 해를 끼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 -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중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는 생명들을 조롱하는 일들을 왕왕 보게 됩니다. 조롱보다는 감사를 드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기분도 훨씬 좋아집니다. You are what you eat - Anthelme Brillant-Savarin, France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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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회가 식량의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킨지 좀 됐죠. 내가 먹는 생명체들을 마주하지 않기 때문에 실감이 떨어지고, 잘 만든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상상하고 선호에 맞추어 그 의미를 판단하지요. 물론 저는 식탁에 감사함을 가집니다. 하지만 먹히는 생명체들에게 감사함을 가져서는 아닙니다. 조롱하지 않지만, 연민하지도, 인간이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제 삶의 지속과 쾌락의 충족을 환영합니다. 그걸로 저는 충분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뭔가가 더 필요하겠죠. 저는 그게 불필요한 결핍이라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을 채움으로써 더 충만한 삶이 가능하겠지요.
공감가는 내용도 있지만 약간 갸우뚱 하는 부분도 있네요.
우리가 사과를 먹을 때, “사과”는 죽는 걸까요?
일단 사과나무는 안죽는 것 같고요. ㅎ
사과 “열매”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에게 먹혀서, 혹은 떨어져서, 씨앗이 퍼지고 싹이 틔워져서 개체수가 늘어나는 것 아닐까요?
그런 목적에서 인간에게 먹히는 식물만큼 많이 퍼진 식물이 또 있을까요?
자연상태에서 병충해에 시달리고 가뭄과 산불의 위기속에 있으면서 수백개의 씨앗을 뿌려 겨우 한두개의 확산을 기대하는 사과나무와,
과수원에서 자라... 더 보기
우리가 사과를 먹을 때, “사과”는 죽는 걸까요?
일단 사과나무는 안죽는 것 같고요. ㅎ
사과 “열매”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에게 먹혀서, 혹은 떨어져서, 씨앗이 퍼지고 싹이 틔워져서 개체수가 늘어나는 것 아닐까요?
그런 목적에서 인간에게 먹히는 식물만큼 많이 퍼진 식물이 또 있을까요?
자연상태에서 병충해에 시달리고 가뭄과 산불의 위기속에 있으면서 수백개의 씨앗을 뿌려 겨우 한두개의 확산을 기대하는 사과나무와,
과수원에서 자라... 더 보기
공감가는 내용도 있지만 약간 갸우뚱 하는 부분도 있네요.
우리가 사과를 먹을 때, “사과”는 죽는 걸까요?
일단 사과나무는 안죽는 것 같고요. ㅎ
사과 “열매”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에게 먹혀서, 혹은 떨어져서, 씨앗이 퍼지고 싹이 틔워져서 개체수가 늘어나는 것 아닐까요?
그런 목적에서 인간에게 먹히는 식물만큼 많이 퍼진 식물이 또 있을까요?
자연상태에서 병충해에 시달리고 가뭄과 산불의 위기속에 있으면서 수백개의 씨앗을 뿌려 겨우 한두개의 확산을 기대하는 사과나무와,
과수원에서 자라며 온갖 비료와 병충해 방제와 가지치기를 당하며 무럭무럭 자라는 사과나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사과나무의 “삶의 질” 이 높은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동물은 좀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죠.
저도 동물 복지, 동물 존엄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과를 먹을 때, “사과”는 죽는 걸까요?
일단 사과나무는 안죽는 것 같고요. ㅎ
사과 “열매”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에게 먹혀서, 혹은 떨어져서, 씨앗이 퍼지고 싹이 틔워져서 개체수가 늘어나는 것 아닐까요?
그런 목적에서 인간에게 먹히는 식물만큼 많이 퍼진 식물이 또 있을까요?
자연상태에서 병충해에 시달리고 가뭄과 산불의 위기속에 있으면서 수백개의 씨앗을 뿌려 겨우 한두개의 확산을 기대하는 사과나무와,
과수원에서 자라며 온갖 비료와 병충해 방제와 가지치기를 당하며 무럭무럭 자라는 사과나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사과나무의 “삶의 질” 이 높은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동물은 좀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죠.
저도 동물 복지, 동물 존엄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유발 하라리는 "공장식 축산은 인류가 저지른, 역사상 가장 중대한 범죄행위중 하나"라고 말했고 저는 이 판단이 옳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동물에게 생산성을 위해 너무 많은 고통을 주고 있죠. 닭이 사는 배터리 케이지라든지, 돼지가 갇히는 임신용 우리라든지. 동물들이 더 넓게 배려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동물들을 위한 가장 좋은 배려는,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덜 소비하는 것이겠죠.
유발 하라리, Industrial farming is one of the worst crimes in history
... 더 보기
유발 하라리, Industrial farming is one of the worst crimes i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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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는 "공장식 축산은 인류가 저지른, 역사상 가장 중대한 범죄행위중 하나"라고 말했고 저는 이 판단이 옳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동물에게 생산성을 위해 너무 많은 고통을 주고 있죠. 닭이 사는 배터리 케이지라든지, 돼지가 갇히는 임신용 우리라든지. 동물들이 더 넓게 배려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동물들을 위한 가장 좋은 배려는,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덜 소비하는 것이겠죠.
유발 하라리, Industrial farming is one of the worst crimes in history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5/sep/25/industrial-farming-one-worst-crimes-history-ethical-question
(채식주의자로서 마음이 많이 가는 주제라 원래 댓글을 좀 길게 남겼는데, 써놓고 보니 너무 멀리간 얘기들 같아서 내용을 좀 줄였어요 ^^;)
유발 하라리, Industrial farming is one of the worst crimes in history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5/sep/25/industrial-farming-one-worst-crimes-history-ethical-question
(채식주의자로서 마음이 많이 가는 주제라 원래 댓글을 좀 길게 남겼는데, 써놓고 보니 너무 멀리간 얘기들 같아서 내용을 좀 줄였어요 ^^;)
감사해야한다는 당위성이 아니고 감사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글이었으니 가볍게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상에 꼭 해야만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껄껄
실물 식재료에 대한 실감이 엄청 떨어졌죠. 저만해도 밭에서 자라고있는 작물을 실제로 본 일은 거의 없어요. 음식은 거의 가공이 완료된 상태로 접하게 되죠. 미국 아이들이 토마토와 가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채소의 예를 들어보라는 질문에 피자! 라고 답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꼈는지 제이미 올리버라는 셰프와 미셸 오바마 전영부인 등이 아이들의 식단... 더 보기
실물 식재료에 대한 실감이 엄청 떨어졌죠. 저만해도 밭에서 자라고있는 작물을 실제로 본 일은 거의 없어요. 음식은 거의 가공이 완료된 상태로 접하게 되죠. 미국 아이들이 토마토와 가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채소의 예를 들어보라는 질문에 피자! 라고 답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꼈는지 제이미 올리버라는 셰프와 미셸 오바마 전영부인 등이 아이들의 식단... 더 보기
감사해야한다는 당위성이 아니고 감사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글이었으니 가볍게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상에 꼭 해야만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껄껄
실물 식재료에 대한 실감이 엄청 떨어졌죠. 저만해도 밭에서 자라고있는 작물을 실제로 본 일은 거의 없어요. 음식은 거의 가공이 완료된 상태로 접하게 되죠. 미국 아이들이 토마토와 가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채소의 예를 들어보라는 질문에 피자! 라고 답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꼈는지 제이미 올리버라는 셰프와 미셸 오바마 전영부인 등이 아이들의 식단을 개선하고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고요.
이리님같이 합리적인 사람들 덕분에 제가 지금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큰 측면 중 하나이죠. 저도 내 삶의 지속과 쾌락의 충족을 환영하고, 특히 먹는 쾌감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여행을 가도 맛집에 맞춰서 동선을 조정했고요. 하지만 내 쾌락을 위해서 다른 이의 고통을 어디까지 묵인할 수 있느냐가 가치관이 갈리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건 좋은 건데 이걸 굳이? 와 이렇게까지? 라는 기준이 되는 선이 사람마다 다르지요. 위치도 모양도 두께도요.
먹히는 생명체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에는 진정성에 조금 의구심이 듭니다. 개의치 않는다가 아니고요? 언급하신 다큐멘터리를 한 편이라도 감상하셨다면 가축들에게 일방적으로 해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본인의 스탠스를 공고히하기 위해서라도 시간나실 때 한 편 정도 감상해보시지요. Dominion과 지구생명체 추천드립니다. 둘 다 유튜브에 있어요.
저는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도 죄책감은 좀 오바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감사함을 느끼며 섭취하고 있습니다.
실물 식재료에 대한 실감이 엄청 떨어졌죠. 저만해도 밭에서 자라고있는 작물을 실제로 본 일은 거의 없어요. 음식은 거의 가공이 완료된 상태로 접하게 되죠. 미국 아이들이 토마토와 가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채소의 예를 들어보라는 질문에 피자! 라고 답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꼈는지 제이미 올리버라는 셰프와 미셸 오바마 전영부인 등이 아이들의 식단을 개선하고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고요.
이리님같이 합리적인 사람들 덕분에 제가 지금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큰 측면 중 하나이죠. 저도 내 삶의 지속과 쾌락의 충족을 환영하고, 특히 먹는 쾌감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여행을 가도 맛집에 맞춰서 동선을 조정했고요. 하지만 내 쾌락을 위해서 다른 이의 고통을 어디까지 묵인할 수 있느냐가 가치관이 갈리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건 좋은 건데 이걸 굳이? 와 이렇게까지? 라는 기준이 되는 선이 사람마다 다르지요. 위치도 모양도 두께도요.
먹히는 생명체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에는 진정성에 조금 의구심이 듭니다. 개의치 않는다가 아니고요? 언급하신 다큐멘터리를 한 편이라도 감상하셨다면 가축들에게 일방적으로 해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본인의 스탠스를 공고히하기 위해서라도 시간나실 때 한 편 정도 감상해보시지요. Dominion과 지구생명체 추천드립니다. 둘 다 유튜브에 있어요.
저는 식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도 죄책감은 좀 오바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감사함을 느끼며 섭취하고 있습니다.
사피엔스는 저도 잘 봤고요.
자연계라는 것이 본래 서로를 잡아먹고 경쟁하며 유지되는 체계인데 그 안에서 반드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껴야만 하는가? 하면 갸우뚱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곤충들은 기를 쓰고 식물의 즙을 빨아먹으려 달려들고 새나 작은 동물들은 열매를 노립니다.
식물들은 나름대로 독성물질을 뿜어대던지 열매를 딱딱하게 만들어내 왔습니다.
소수지만 파리지옥 같은 식물은 곤충을 먹기도 합니다.
곤충이나 식물들은 작은 동물이기, 작은 동물은 큰 동물에게 먹힙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죽으면 썪어서 ... 더 보기
자연계라는 것이 본래 서로를 잡아먹고 경쟁하며 유지되는 체계인데 그 안에서 반드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껴야만 하는가? 하면 갸우뚱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곤충들은 기를 쓰고 식물의 즙을 빨아먹으려 달려들고 새나 작은 동물들은 열매를 노립니다.
식물들은 나름대로 독성물질을 뿜어대던지 열매를 딱딱하게 만들어내 왔습니다.
소수지만 파리지옥 같은 식물은 곤충을 먹기도 합니다.
곤충이나 식물들은 작은 동물이기, 작은 동물은 큰 동물에게 먹힙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죽으면 썪어서 ... 더 보기
사피엔스는 저도 잘 봤고요.
자연계라는 것이 본래 서로를 잡아먹고 경쟁하며 유지되는 체계인데 그 안에서 반드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껴야만 하는가? 하면 갸우뚱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곤충들은 기를 쓰고 식물의 즙을 빨아먹으려 달려들고 새나 작은 동물들은 열매를 노립니다.
식물들은 나름대로 독성물질을 뿜어대던지 열매를 딱딱하게 만들어내 왔습니다.
소수지만 파리지옥 같은 식물은 곤충을 먹기도 합니다.
곤충이나 식물들은 작은 동물이기, 작은 동물은 큰 동물에게 먹힙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죽으면 썪어서 식물의 양분이 됩니다.
식물들은 또 자기들 끼리 한정된 영양분을 가지고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큰 나무는 그 옆의 잡초가 죽건말건 상관없이 양분을 빨아드라고 큰 잎을 펼쳐 태양에너지를 독점합니다.
이런 자연 생태계 안에서 과연 무엇을 위해 감사해야 하는 걸까요?
이 포인트를 넘지 못하면 채식주의자가, 넘게돠면 친환경먹거리나 동물복지 쪽으로 가게 되는 것 같네요. ㅎ
자연계라는 것이 본래 서로를 잡아먹고 경쟁하며 유지되는 체계인데 그 안에서 반드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껴야만 하는가? 하면 갸우뚱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곤충들은 기를 쓰고 식물의 즙을 빨아먹으려 달려들고 새나 작은 동물들은 열매를 노립니다.
식물들은 나름대로 독성물질을 뿜어대던지 열매를 딱딱하게 만들어내 왔습니다.
소수지만 파리지옥 같은 식물은 곤충을 먹기도 합니다.
곤충이나 식물들은 작은 동물이기, 작은 동물은 큰 동물에게 먹힙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죽으면 썪어서 식물의 양분이 됩니다.
식물들은 또 자기들 끼리 한정된 영양분을 가지고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큰 나무는 그 옆의 잡초가 죽건말건 상관없이 양분을 빨아드라고 큰 잎을 펼쳐 태양에너지를 독점합니다.
이런 자연 생태계 안에서 과연 무엇을 위해 감사해야 하는 걸까요?
이 포인트를 넘지 못하면 채식주의자가, 넘게돠면 친환경먹거리나 동물복지 쪽으로 가게 되는 것 같네요. ㅎ
감사함을 느껴야만할 필요는 없지요.
이런 방향성도 있다 정도의 제시글입니다 ㅎㅎ 해보니까 좋더라.
이리님에게 대댓글한 인간다움과는 다른 방향성의 인간다움이지요. 미움도 고마움도 없이 서로 먹고먹히는 동식물과 곤충들이 인간에게 있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모델은 아니니까요.
자연상태에 있는 동식물들의 경쟁은 생존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킹정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그 많은 먹거리가 필요할까요. 불필요한 고통과 죽음을 늘리면서까지 말이죠.
(나는 삼겹살을 먹지 못한다면 우울증에 걸려 죽어버릴 거야! 같은 경우는 자신의 생존이... 더 보기
이런 방향성도 있다 정도의 제시글입니다 ㅎㅎ 해보니까 좋더라.
이리님에게 대댓글한 인간다움과는 다른 방향성의 인간다움이지요. 미움도 고마움도 없이 서로 먹고먹히는 동식물과 곤충들이 인간에게 있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모델은 아니니까요.
자연상태에 있는 동식물들의 경쟁은 생존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킹정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그 많은 먹거리가 필요할까요. 불필요한 고통과 죽음을 늘리면서까지 말이죠.
(나는 삼겹살을 먹지 못한다면 우울증에 걸려 죽어버릴 거야! 같은 경우는 자신의 생존이... 더 보기
감사함을 느껴야만할 필요는 없지요.
이런 방향성도 있다 정도의 제시글입니다 ㅎㅎ 해보니까 좋더라.
이리님에게 대댓글한 인간다움과는 다른 방향성의 인간다움이지요. 미움도 고마움도 없이 서로 먹고먹히는 동식물과 곤충들이 인간에게 있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모델은 아니니까요.
자연상태에 있는 동식물들의 경쟁은 생존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킹정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그 많은 먹거리가 필요할까요. 불필요한 고통과 죽음을 늘리면서까지 말이죠.
(나는 삼겹살을 먹지 못한다면 우울증에 걸려 죽어버릴 거야! 같은 경우는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당연히 필요하겠죠.)
흔히들 자연과 동물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할 때는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한편으로 연민과 도덕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강조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차별성은 그 힘뿐만이 아니라 도덕성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병행해서 둘 다 가져갈 수 있다고 보아요. 다른 동물처럼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한 편, 다른 동물과 달리 감사함을 느낀다고 해서 이상해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방향성도 있다 정도의 제시글입니다 ㅎㅎ 해보니까 좋더라.
이리님에게 대댓글한 인간다움과는 다른 방향성의 인간다움이지요. 미움도 고마움도 없이 서로 먹고먹히는 동식물과 곤충들이 인간에게 있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모델은 아니니까요.
자연상태에 있는 동식물들의 경쟁은 생존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킹정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그 많은 먹거리가 필요할까요. 불필요한 고통과 죽음을 늘리면서까지 말이죠.
(나는 삼겹살을 먹지 못한다면 우울증에 걸려 죽어버릴 거야! 같은 경우는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당연히 필요하겠죠.)
흔히들 자연과 동물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할 때는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한편으로 연민과 도덕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강조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차별성은 그 힘뿐만이 아니라 도덕성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병행해서 둘 다 가져갈 수 있다고 보아요. 다른 동물처럼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한 편, 다른 동물과 달리 감사함을 느낀다고 해서 이상해지지는 않습니다.
종은 자기의 이해를 갖지 않고 동물 개체는 멸종에 관심이 없죠. 닭의 관심은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겠죠 : 진흙목욕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횃대에 오를 수 있느냐 없느냐, 스무 명 정도의 무리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 밀집사육환경에서 건강을 잃은 상태로 구더기와 벌레에게 뒤덮이지 않을 수 있느냐 없느냐, 최대 30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 성장호르몬제를 맞아 다리의 기능이 모두 훼손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를 피할수 있느냐 없느냐, 마취 없는 부리절단을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상동행동을 피... 더 보기
종은 자기의 이해를 갖지 않고 동물 개체는 멸종에 관심이 없죠. 닭의 관심은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겠죠 : 진흙목욕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횃대에 오를 수 있느냐 없느냐, 스무 명 정도의 무리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 밀집사육환경에서 건강을 잃은 상태로 구더기와 벌레에게 뒤덮이지 않을 수 있느냐 없느냐, 최대 30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 성장호르몬제를 맞아 다리의 기능이 모두 훼손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를 피할수 있느냐 없느냐, 마취 없는 부리절단을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상동행동을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
닭은 자신의 더 나은 삶, 고통이 더 적은 삶에 관심이 있지 종으로서의 닭의 존속에는 관심이 없어요. 멸종을 피하기 위해 극단적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동물의 이해라고 보기 어렵지요.
만일 인간이 자연상태에서의 닭이나 소가 누릴 환경에 처한다 해도, 인간은 인간 종의 안정적 존속을 위해 몸 조차 돌릴 수 없는 곳에서의 극단적 감금, 성착취, 극단적으로 짧은 수명-닭에 비례할 때 약 80일, 극단적 밀집, 강요된 임신과 아동 탈취, 도살 등을 수용하지는 않을 거예요. 적어도 대체로는 그렇겠지요. 종족의 존속을 준다며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이 계약을 강요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낄 것이고요.
닭은 자신의 더 나은 삶, 고통이 더 적은 삶에 관심이 있지 종으로서의 닭의 존속에는 관심이 없어요. 멸종을 피하기 위해 극단적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동물의 이해라고 보기 어렵지요.
만일 인간이 자연상태에서의 닭이나 소가 누릴 환경에 처한다 해도, 인간은 인간 종의 안정적 존속을 위해 몸 조차 돌릴 수 없는 곳에서의 극단적 감금, 성착취, 극단적으로 짧은 수명-닭에 비례할 때 약 80일, 극단적 밀집, 강요된 임신과 아동 탈취, 도살 등을 수용하지는 않을 거예요. 적어도 대체로는 그렇겠지요. 종족의 존속을 준다며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이 계약을 강요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낄 것이고요.
희망 없이 고통만 가득한 삶 <<< 태어남 그 자체
가치를 이쪽에 둔다면 인류는 더할나위없이 선행을 베풀고 있는 중이겠지요. 저 주제에 대한 논의를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봤었는데 자세한 용어들은 기억이 안 나네요.
유전자풀로서의 종족과, 개체로서의 개별 가축들은 어느 정도 분리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루다가. 이미 개량될 정도로 개량된 가축들이 멸종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뒤늦었지만 '자연적'이겠죠. 솔까 지금 인간들이 팬더 보호하듯이 개체수 보존을 위해 가축들을 번식시키는 건 아니잖아요. ... 더 보기
가치를 이쪽에 둔다면 인류는 더할나위없이 선행을 베풀고 있는 중이겠지요. 저 주제에 대한 논의를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봤었는데 자세한 용어들은 기억이 안 나네요.
유전자풀로서의 종족과, 개체로서의 개별 가축들은 어느 정도 분리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루다가. 이미 개량될 정도로 개량된 가축들이 멸종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뒤늦었지만 '자연적'이겠죠. 솔까 지금 인간들이 팬더 보호하듯이 개체수 보존을 위해 가축들을 번식시키는 건 아니잖아요. ... 더 보기
희망 없이 고통만 가득한 삶 <<< 태어남 그 자체
가치를 이쪽에 둔다면 인류는 더할나위없이 선행을 베풀고 있는 중이겠지요. 저 주제에 대한 논의를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봤었는데 자세한 용어들은 기억이 안 나네요.
유전자풀로서의 종족과, 개체로서의 개별 가축들은 어느 정도 분리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루다가. 이미 개량될 정도로 개량된 가축들이 멸종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뒤늦었지만 '자연적'이겠죠. 솔까 지금 인간들이 팬더 보호하듯이 개체수 보존을 위해 가축들을 번식시키는 건 아니잖아요.
멸종의 위기는 머리로 생각하는 부분이고, 개체의 고통은 가슴으로 와닿는 부분이죠. 이론과 실제 정도의 차이일까요. 제가 위의 이리님 댓글에 달아놓은 영상을 보시면 그 갭이 좀 더 줄어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가치를 이쪽에 둔다면 인류는 더할나위없이 선행을 베풀고 있는 중이겠지요. 저 주제에 대한 논의를 셀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봤었는데 자세한 용어들은 기억이 안 나네요.
유전자풀로서의 종족과, 개체로서의 개별 가축들은 어느 정도 분리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루다가. 이미 개량될 정도로 개량된 가축들이 멸종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뒤늦었지만 '자연적'이겠죠. 솔까 지금 인간들이 팬더 보호하듯이 개체수 보존을 위해 가축들을 번식시키는 건 아니잖아요.
멸종의 위기는 머리로 생각하는 부분이고, 개체의 고통은 가슴으로 와닿는 부분이죠. 이론과 실제 정도의 차이일까요. 제가 위의 이리님 댓글에 달아놓은 영상을 보시면 그 갭이 좀 더 줄어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육식을 하고 있지만 채식을 하시는 분들을 지지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는 여러가지 이유들을 이야기하지만, 제가 공감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기후위기 대응차원에서 현재 인류의 과한 육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xvQPzrg2Wg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는 여러가지 이유들을 이야기하지만, 제가 공감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기후위기 대응차원에서 현재 인류의 과한 육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xvQPzrg2Wg
동물이 고통을 피하려 한다는 것은 의인화에 기반한 추론이 아니라 동물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자료들에 기반한 최선의 추론이에요. 가령 동물은 고통을 회피하려 하고 고통 상황에서 진통제를 선호하며 다른 선호(섭식 등)와 고통회피를 교환하기도 하며 중앙신경시스템을 갖고 있어서 인건이 고통을 느끼는 방식과 진화상의 유사성을 갖기도 하죠. 자세한 근거는 원연구에 대한 링크와 함께 이 비건 분의 블로그에 정리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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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 고통을 피하려 한다는 것은 의인화에 기반한 추론이 아니라 동물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자료들에 기반한 최선의 추론이에요. 가령 동물은 고통을 회피하려 하고 고통 상황에서 진통제를 선호하며 다른 선호(섭식 등)와 고통회피를 교환하기도 하며 중앙신경시스템을 갖고 있어서 인건이 고통을 느끼는 방식과 진화상의 유사성을 갖기도 하죠. 자세한 근거는 원연구에 대한 링크와 함께 이 비건 분의 블로그에 정리되어 있어요.
https://veganstudies.github.io/2019/10/22/sentience-table.html
배터리케이지의 닭은 역사상 어떤 인간 노예보다 나쁜 환경을 경험해요. 또한 소수의 자발적 인간 노예가 있다는 점이 전체 닭에게 인간의 폭력과 감금에 희생당하는 계약을 강요할 근거가 될 수 없죠. 이에 더해, 설사 노예가 되려는 인간이 있다 해도 그는 자신의 이해를 고려한 끝에 그렇게 해요. 닭이 자발성 조건하에 감금을 선택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기에 공장식 축산이 닭이나 동물의 이해와 부합한다는 추론이야말로 의인화지요.
https://veganstudies.github.io/2019/10/22/sentience-table.html
배터리케이지의 닭은 역사상 어떤 인간 노예보다 나쁜 환경을 경험해요. 또한 소수의 자발적 인간 노예가 있다는 점이 전체 닭에게 인간의 폭력과 감금에 희생당하는 계약을 강요할 근거가 될 수 없죠. 이에 더해, 설사 노예가 되려는 인간이 있다 해도 그는 자신의 이해를 고려한 끝에 그렇게 해요. 닭이 자발성 조건하에 감금을 선택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기에 공장식 축산이 닭이나 동물의 이해와 부합한다는 추론이야말로 의인화지요.
답을 하다보니까 이상한데 채식관련 글로 쓴 게 아니고 식탁에 오르는 생명들에게 감사함을 가지자는 그냥 그런 내용이었는데요... 흠;
제시한 닭의 관심에는 고통와 직결되는 1차적 요소(극단적 감금, 부리 절단, 성장호르몬 과다주입으로 인한 다리기능 상실에서 추론가능한 관절통, 고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이상인 상동행동의 발생으로 추론할 수 있는 환경상의 고통,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의 닭이 벌레를 쫓을 수 없어 살을 파먹히는 고통)와 닭이 경험하고자 하는 2차적 상위욕망(무리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 횃대에 앉고자 하는 욕망 등)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죠. 예를 들어 정신적 고통의 증거인 상동행동의 발생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소규모 무리를 이룰 수 없고 다른 개체를 식별할 수 없는 밀집사... 더 보기
제시한 닭의 관심에는 고통와 직결되는 1차적 요소(극단적 감금, 부리 절단, 성장호르몬 과다주입으로 인한 다리기능 상실에서 추론가능한 관절통, 고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이상인 상동행동의 발생으로 추론할 수 있는 환경상의 고통,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의 닭이 벌레를 쫓을 수 없어 살을 파먹히는 고통)와 닭이 경험하고자 하는 2차적 상위욕망(무리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 횃대에 앉고자 하는 욕망 등)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죠. 예를 들어 정신적 고통의 증거인 상동행동의 발생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소규모 무리를 이룰 수 없고 다른 개체를 식별할 수 없는 밀집사육환경이며, 그로 인해 발생한 상동행동(서로를 부리로 쪼아대는) 때문에 부리를 무마취로 절단하는 것이니까요. 구조적으로 고통을 낳는 하나의 덩어리죠. 닭이 자연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진화시켜온 이런 욕망들이 현대에도 닭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논증에 관해서는 링크에 드린 유발 하라리가 잘 정리해두었으니 관심 있으시면 더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죄송스럽게도 제가 당장에 번역까지 할 재주나 시간은 모자라고요...
*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5/sep/25/industrial-farming-one-worst-crimes-history-ethical-question
추가 질문 사항에 대해서 (1) 전적으로 동물의 고통이 제거된 사육 시스템은 아직 한번도 제가 실례를 본 적이 없어요.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전혀 없었을 걸요. 공장식 사육의 폭력적 관행을 비판하면서 오직 이 산물만을 소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살아있는 동안 각 개체가 습성대로 살 수 있는 어류를 소비하지요. 이들을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양식장' 어류를 소비하지 않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비판할만한 구체적 논리가 제게는 그리 많지는 않아요.
(2)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에어본 시그널'에 관한 연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마 그 연구, '일정한 상황에서 물관이 기포를 형성하여 특정한 소리를 만들어낸다'라는 내용인데, 이것은 식물의 고통경험을 미루어 추론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증거죠. 물관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일종의 '비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런 진화론적 유사성도 없는 개체들, 의식경험을 통합하거나 최소한도로 생성할 수 있는 기관을 확인할 수 없는 개체들에 대해, 인간이나 동물이 고통 상황에서 내놓는 '표상적으로 보이는 행위와의 유사성'만을 적용하는 거니까요. 제가 제시해드린 자료 원문에는 식물과 동물의 인지경험가능성 차이에 대한 50개 내외 항목의 평가가 있으니 동물이 고통을 경험한다는 근거는 이 평가를 참고하시면 될 것 같아요.
(말씀하신 연구에 대한 제 기억이 부정확 할 수 있어서, 만약 제 이해가 원문과 다르다면 링크 주시면 확인해보겠습니다.)
+
회의주의자 사전에서 식물의 인지에 관해 설명하는 항목입니다.
http://skepdic.com/plants.html
식물은 셀룰로오스 세포벽이 있는 생물로서, 신경이나 감각 기관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이다. 동물은 셀룰로오스 세포벽이 없고, 신경이나 감각 기관을 갖고 있다. 동물은 지각력이 있다(sentient). 식물은 아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고통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뇌와 신경 체계는 지각력을 위해 필수적이다. 식물은 뇌나 지각 기관을 갖고 있지 않다. 식물은 물리적이거나 화학적 자극에 반응한다. 그렇지만 식물이 그러한 반응에 대해 지각하고 있다는(aware of) 주장, 식물이 자기-의식적이고 의식적인 존재라는 주장에 대한 정당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은 DNA를 지니고 있고, 자연선택 또는 인간선택에 의해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어떤 식물 진화형은 '지능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식물을 지능적이라고 말하는 것, 또는 "식물 신경 생물학"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하자면 주목을 받거나 연구비를 얻기 위한 비유 또는 기믹에 불과하다.
식물학자, 또는 동물생리학자가 식물 의식이나 ESP에 대해 실험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구자들의 지식은, 식물이 인간 계열의 감각 혹은 지각을 갖고 있다고 볼 가능성을 배제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식물에게는 뇌가 없고 또는 뇌와 유사한 종류의 그 어떤 것도 없다.
*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5/sep/25/industrial-farming-one-worst-crimes-history-ethical-question
추가 질문 사항에 대해서 (1) 전적으로 동물의 고통이 제거된 사육 시스템은 아직 한번도 제가 실례를 본 적이 없어요.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전혀 없었을 걸요. 공장식 사육의 폭력적 관행을 비판하면서 오직 이 산물만을 소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살아있는 동안 각 개체가 습성대로 살 수 있는 어류를 소비하지요. 이들을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양식장' 어류를 소비하지 않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비판할만한 구체적 논리가 제게는 그리 많지는 않아요.
(2)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에어본 시그널'에 관한 연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마 그 연구, '일정한 상황에서 물관이 기포를 형성하여 특정한 소리를 만들어낸다'라는 내용인데, 이것은 식물의 고통경험을 미루어 추론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증거죠. 물관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일종의 '비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런 진화론적 유사성도 없는 개체들, 의식경험을 통합하거나 최소한도로 생성할 수 있는 기관을 확인할 수 없는 개체들에 대해, 인간이나 동물이 고통 상황에서 내놓는 '표상적으로 보이는 행위와의 유사성'만을 적용하는 거니까요. 제가 제시해드린 자료 원문에는 식물과 동물의 인지경험가능성 차이에 대한 50개 내외 항목의 평가가 있으니 동물이 고통을 경험한다는 근거는 이 평가를 참고하시면 될 것 같아요.
(말씀하신 연구에 대한 제 기억이 부정확 할 수 있어서, 만약 제 이해가 원문과 다르다면 링크 주시면 확인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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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자 사전에서 식물의 인지에 관해 설명하는 항목입니다.
http://skepdic.com/plants.html
식물은 셀룰로오스 세포벽이 있는 생물로서, 신경이나 감각 기관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이다. 동물은 셀룰로오스 세포벽이 없고, 신경이나 감각 기관을 갖고 있다. 동물은 지각력이 있다(sentient). 식물은 아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고통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뇌와 신경 체계는 지각력을 위해 필수적이다. 식물은 뇌나 지각 기관을 갖고 있지 않다. 식물은 물리적이거나 화학적 자극에 반응한다. 그렇지만 식물이 그러한 반응에 대해 지각하고 있다는(aware of) 주장, 식물이 자기-의식적이고 의식적인 존재라는 주장에 대한 정당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은 DNA를 지니고 있고, 자연선택 또는 인간선택에 의해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어떤 식물 진화형은 '지능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식물을 지능적이라고 말하는 것, 또는 "식물 신경 생물학"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하자면 주목을 받거나 연구비를 얻기 위한 비유 또는 기믹에 불과하다.
식물학자, 또는 동물생리학자가 식물 의식이나 ESP에 대해 실험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구자들의 지식은, 식물이 인간 계열의 감각 혹은 지각을 갖고 있다고 볼 가능성을 배제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식물에게는 뇌가 없고 또는 뇌와 유사한 종류의 그 어떤 것도 없다.
제가 의도한 것이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에요. 개체의 고통 경험은 피상적 경험을 통해 해석되어야 할 일이 아니라 최대한의 과학적 증거를 통해서 확인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어요. 고통은 진화의 산물이지요. 인간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만약 동물의 고통과 식물의 이상신호나 독성물질분비에 '같은 경험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것이 쿠오레님의 의도라면, 이것은 또다시 과학적으로 지지되지 않는 부분이죠. 예를 들어 인간은 불편한 자극을 경험하는 순간 그 자극을 회피하려는 '이익관심'을 의식을 통해 발생시키지만, 식물은 그렇다고 볼 과학적 증거가 없죠. 즉 자연선택과정에서 살아남는 데에 유리한 어떤 생리학적 ... 더 보기
그런데 만약 동물의 고통과 식물의 이상신호나 독성물질분비에 '같은 경험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것이 쿠오레님의 의도라면, 이것은 또다시 과학적으로 지지되지 않는 부분이죠. 예를 들어 인간은 불편한 자극을 경험하는 순간 그 자극을 회피하려는 '이익관심'을 의식을 통해 발생시키지만, 식물은 그렇다고 볼 과학적 증거가 없죠. 즉 자연선택과정에서 살아남는 데에 유리한 어떤 생리학적 ... 더 보기
제가 의도한 것이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에요. 개체의 고통 경험은 피상적 경험을 통해 해석되어야 할 일이 아니라 최대한의 과학적 증거를 통해서 확인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어요. 고통은 진화의 산물이지요. 인간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만약 동물의 고통과 식물의 이상신호나 독성물질분비에 '같은 경험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것이 쿠오레님의 의도라면, 이것은 또다시 과학적으로 지지되지 않는 부분이죠. 예를 들어 인간은 불편한 자극을 경험하는 순간 그 자극을 회피하려는 '이익관심'을 의식을 통해 발생시키지만, 식물은 그렇다고 볼 과학적 증거가 없죠. 즉 자연선택과정에서 살아남는 데에 유리한 어떤 생리학적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 식물이 '이익관심'을 경험한다는 과학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텔아비브 대학의 어떤 식물학자는 이것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죠.
"식물은 비인지적인(anoetic) 의식의 요소들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제 생각으로는, 생각하는 능력을 포함한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뇌가 없기 때문에 식물이 주관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저는 식물이 생각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do-plants-think-daniel-chamovitz/
그런데 만약 동물의 고통과 식물의 이상신호나 독성물질분비에 '같은 경험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것이 쿠오레님의 의도라면, 이것은 또다시 과학적으로 지지되지 않는 부분이죠. 예를 들어 인간은 불편한 자극을 경험하는 순간 그 자극을 회피하려는 '이익관심'을 의식을 통해 발생시키지만, 식물은 그렇다고 볼 과학적 증거가 없죠. 즉 자연선택과정에서 살아남는 데에 유리한 어떤 생리학적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 식물이 '이익관심'을 경험한다는 과학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텔아비브 대학의 어떤 식물학자는 이것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죠.
"식물은 비인지적인(anoetic) 의식의 요소들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제 생각으로는, 생각하는 능력을 포함한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뇌가 없기 때문에 식물이 주관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저는 식물이 생각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do-plants-think-daniel-chamovitz/
윤리는 인간의 공감능력에서 기인하는 감정적 모델과, 인간사회의 질서와 유지와 발전을 향하는 공리적 성격이 결합되어야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물의 죽음이나 고통에 측은함을 느끼는건 전자 때문이고, 동물중에서도 인간과 진화적으로 거리가 먼 생물의 죽음이나 고통에 안타까움을 덜 느끼는 것도 전자 때문이죠. 그런 걸 못 느껴야 하는건 아니고, 오히려 느끼는 게 정상인, 말 그대로 본능(당연히 저도 느낍니다)이며 인간다움입니다. 문제는 후자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거죠. 전자만 있는건 도덕'감'이고, 후자만 있는건 '법'으로 향합... 더 보기
윤리는 인간의 공감능력에서 기인하는 감정적 모델과, 인간사회의 질서와 유지와 발전을 향하는 공리적 성격이 결합되어야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물의 죽음이나 고통에 측은함을 느끼는건 전자 때문이고, 동물중에서도 인간과 진화적으로 거리가 먼 생물의 죽음이나 고통에 안타까움을 덜 느끼는 것도 전자 때문이죠. 그런 걸 못 느껴야 하는건 아니고, 오히려 느끼는 게 정상인, 말 그대로 본능(당연히 저도 느낍니다)이며 인간다움입니다. 문제는 후자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거죠. 전자만 있는건 도덕'감'이고, 후자만 있는건 '법'으로 향합니다.
결론적으로 윤리 도덕이란 인간끼리만 통하는 모델로 볼 수 있습니다. 잘 양보해 추후 인공지능이나 지성을 지닌 외계생명체가 인간과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단계가 온다면, 인외자를 윤리의 주체로 포섭 가능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동물은 의식이 있고 통증을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이 자기 맘대로 느끼는 도덕'감'의 객체가 될 수 있을 뿐이고, 우리의 당위가 의식적으로 통용될 여지가 거의 없지요(유아적인 수준의 지성은 있으니 전혀까지는 아닙니다만.. 우리가 유아에게 윤리를 기대하지 않는 걸 생각한다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겁니다). 결국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기때문에 착취를 해도 된다 같은, 전자에 대한 감정적 불편함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는 필요가 없고 의미도 없죠.
결국 제가 바라보는 이 문제는, 망치로 나사를 조이지 못한다는 문제일 뿐입니다. 동물이 윤리의 대상이 아니란 것이, 동물이 인간보다 저등하거나, 막대해도 되는 존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요.
결론적으로 윤리 도덕이란 인간끼리만 통하는 모델로 볼 수 있습니다. 잘 양보해 추후 인공지능이나 지성을 지닌 외계생명체가 인간과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단계가 온다면, 인외자를 윤리의 주체로 포섭 가능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동물은 의식이 있고 통증을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이 자기 맘대로 느끼는 도덕'감'의 객체가 될 수 있을 뿐이고, 우리의 당위가 의식적으로 통용될 여지가 거의 없지요(유아적인 수준의 지성은 있으니 전혀까지는 아닙니다만.. 우리가 유아에게 윤리를 기대하지 않는 걸 생각한다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겁니다). 결국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기때문에 착취를 해도 된다 같은, 전자에 대한 감정적 불편함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는 필요가 없고 의미도 없죠.
결국 제가 바라보는 이 문제는, 망치로 나사를 조이지 못한다는 문제일 뿐입니다. 동물이 윤리의 대상이 아니란 것이, 동물이 인간보다 저등하거나, 막대해도 되는 존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요.
쿠오레 님// 논점이 되는 '인지능력'인 '이익관심을 가질 능력'은 인간과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정의되는 능력이 아니라, '어떠한 것을 원할 능력'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에요. 그 능력은 가령 지구 동물과의 생물학적 유사성이 전혀 없는 외계종족이라 할지라도 보유하고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이런 능력이 있어야 특정한 삶의 양식도 원할 수 있고, 생존도 원할 수 있고, 신체가 절단되지 않기를 원할 수 있고, 나아가 도덕적 대우도 원할 수 있죠. 이런 능력이 식물에게 있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입증 없이, 식물 대상에게 '존중'이나 '평등한 대우'등을 부여한다면, 그건 "돌멩이도 밟으면 아플 수 있으니까 나... 더 보기
쿠오레 님// 논점이 되는 '인지능력'인 '이익관심을 가질 능력'은 인간과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정의되는 능력이 아니라, '어떠한 것을 원할 능력'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에요. 그 능력은 가령 지구 동물과의 생물학적 유사성이 전혀 없는 외계종족이라 할지라도 보유하고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이런 능력이 있어야 특정한 삶의 양식도 원할 수 있고, 생존도 원할 수 있고, 신체가 절단되지 않기를 원할 수 있고, 나아가 도덕적 대우도 원할 수 있죠. 이런 능력이 식물에게 있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입증 없이, 식물 대상에게 '존중'이나 '평등한 대우'등을 부여한다면, 그건 "돌멩이도 밟으면 아플 수 있으니까 나는 닭과 돼지의 비명을 무시하고 먹겠다"는 주장과 근거의 수준이 다르지 않죠. 단지 유기질로 만들어진, 재생산하는 존재에 대한 인간의 추상적 가치부여에 의존해서, 명확히 고통을 경험하는 존재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면 이상한 일이겠죠.
이해관심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방법인 과학적 수단은, 현재까지 식물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반면 많은 동물의 경우 매우 명확하게 발견되었죠.
마지막으로, 입증가능성이 희박한 식물의 권리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이라 할지라도 결국 '식물을 최소한도로 침해하기 위해서'는 동물을 먹지 않는 편이 좋아요. 같은 양의 단백질을 생성하기 위해 소요되는 식물은, 식물을 직접 먹을때보다 고기를 먹을 때 훨씬 더 많아지니까요.
"소 한마리가 체중 1kg을 불리려면 평균 10kg의 먹이가 필요하고, 이 사료를 생산하기 위한 물과 땅 비료가 연쇄적으로 필요하다"
http://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878029.html
"단위 면적당 칼로리와 단백질 생산이 가장 높은 것은 콩이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future/884552.html
이해관심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방법인 과학적 수단은, 현재까지 식물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반면 많은 동물의 경우 매우 명확하게 발견되었죠.
마지막으로, 입증가능성이 희박한 식물의 권리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이라 할지라도 결국 '식물을 최소한도로 침해하기 위해서'는 동물을 먹지 않는 편이 좋아요. 같은 양의 단백질을 생성하기 위해 소요되는 식물은, 식물을 직접 먹을때보다 고기를 먹을 때 훨씬 더 많아지니까요.
"소 한마리가 체중 1kg을 불리려면 평균 10kg의 먹이가 필요하고, 이 사료를 생산하기 위한 물과 땅 비료가 연쇄적으로 필요하다"
http://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878029.html
"단위 면적당 칼로리와 단백질 생산이 가장 높은 것은 콩이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future/884552.html
쿠오레 님// 동물해방의 아버지 피터싱어는 다분히 공리주의에 입각한 논리를 펼칩니다. 고통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할 이유가 불충분하다고 느끼시는건 공리주의에 크게 공감을 못하셔서일 수 있어요.
인간의 행위 시스템중에서라면 그렇지도 않죠. 자연과 동떨어지지않은게 뭐가 있습니까? 옷을 입는것 글을 쓰는것 물을 저장하는 것 불을 쓰는것 전기를 쓰는것 모두 자연과 동떨어져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다른 동물을 먹는다는 자연 그 자체죠. 공장식 사육이요? 그건 '공장'이 자연과 동떨어진 인간활동 ㅡ 기계효율화의 결정체일뿐입니다. 사육이 아니라요.
개미도 버섯농장을 키우고 진딧물을 사육하며,
다른 애벌레를 자기 애벌레의 배양인큐베이터로 쓰는 곤충은 많죠. 좁은 굴을 파고 잡아온 먹이를 화학물질을 주사해서 마취해 살아있는 상... 더 보기
그에 비하면 다른 동물을 먹는다는 자연 그 자체죠. 공장식 사육이요? 그건 '공장'이 자연과 동떨어진 인간활동 ㅡ 기계효율화의 결정체일뿐입니다. 사육이 아니라요.
개미도 버섯농장을 키우고 진딧물을 사육하며,
다른 애벌레를 자기 애벌레의 배양인큐베이터로 쓰는 곤충은 많죠. 좁은 굴을 파고 잡아온 먹이를 화학물질을 주사해서 마취해 살아있는 상... 더 보기
인간의 행위 시스템중에서라면 그렇지도 않죠. 자연과 동떨어지지않은게 뭐가 있습니까? 옷을 입는것 글을 쓰는것 물을 저장하는 것 불을 쓰는것 전기를 쓰는것 모두 자연과 동떨어져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다른 동물을 먹는다는 자연 그 자체죠. 공장식 사육이요? 그건 '공장'이 자연과 동떨어진 인간활동 ㅡ 기계효율화의 결정체일뿐입니다. 사육이 아니라요.
개미도 버섯농장을 키우고 진딧물을 사육하며,
다른 애벌레를 자기 애벌레의 배양인큐베이터로 쓰는 곤충은 많죠. 좁은 굴을 파고 잡아온 먹이를 화학물질을 주사해서 마취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해 썩지않게 하면서 산채로 애벌레의 먹이가 되도록 하는게 기생벌들의 생명순환 방식이고요. 지극히 자연적이죠.
고통이 있는 것이 자연입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것이야말로 자연스럽지 못한거죠.
그에 비하면 다른 동물을 먹는다는 자연 그 자체죠. 공장식 사육이요? 그건 '공장'이 자연과 동떨어진 인간활동 ㅡ 기계효율화의 결정체일뿐입니다. 사육이 아니라요.
개미도 버섯농장을 키우고 진딧물을 사육하며,
다른 애벌레를 자기 애벌레의 배양인큐베이터로 쓰는 곤충은 많죠. 좁은 굴을 파고 잡아온 먹이를 화학물질을 주사해서 마취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해 썩지않게 하면서 산채로 애벌레의 먹이가 되도록 하는게 기생벌들의 생명순환 방식이고요. 지극히 자연적이죠.
고통이 있는 것이 자연입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것이야말로 자연스럽지 못한거죠.
쿠오레 님// 제시하신 사례를 가다듬어 이런 식으로 써볼게요. '어떤 사람이 외부의 개입 없는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거나 고통을 느낄 어떤 가족이나 친구도 없고, 이 사람이 죽는 것은 어떤 타인에게도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생명의 가치에 관한 사회적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때 이 회생불가능한 식물인간을 죽여도 되는가?'라는 물음의 경우라면, 저는 시간적 삶을 사는 인간과 같은 존재의 경우 자기의 이익을 특수하게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 인간은... 더 보기
쿠오레 님// 제시하신 사례를 가다듬어 이런 식으로 써볼게요. '어떤 사람이 외부의 개입 없는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거나 고통을 느낄 어떤 가족이나 친구도 없고, 이 사람이 죽는 것은 어떤 타인에게도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생명의 가치에 관한 사회적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때 이 회생불가능한 식물인간을 죽여도 되는가?'라는 물음의 경우라면, 저는 시간적 삶을 사는 인간과 같은 존재의 경우 자기의 이익을 특수하게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미래의 이익이 어떠어떠했으면 좋겠다라는 결심을 가질 수 있고, 그 결심이 침해되는 미래가 발생되지 않기를 요구할 수 있죠. 식물인간이 된 시점에서 이 사람의 결심을 침해하는 것은 공리주의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의무론적인 윤리를 동시에 적용한다면 '개체의 과거에 해당 개체가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지녔던 의사를 존중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때,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가 특별히 반박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의 삶은 구제되어야 하는 게 옳아 보이죠. 즉 공리주의와 의무론이 상호배제적이지 않고 권리를 더 강하게 보호하기 위해 동시에 적용될 수 있는 경우는 흔하고, 이 경우는 그런 경우의 하나의 예시겠죠. 저는 인간 사회에서 인간의 지위를 정의하는 일에 관한한 부분에서는, 헌법적 권리를 지키는 수준의 의무론을 기반으로 한 공리주의가 기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제시된 식물인간 사례와 같은 경우에 특히 그렇게 적용되어야 할 일이죠).
반면 돼지는 다르죠.
'어떤 돼지는 자연에서 습성대로 삶을 살다가, 외부 인간에 의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 개입이 전혀 없는 불의의 사고로,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코마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돼지는 코마 상태에서 회복할 방법이 없으며, 이 돼지는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어떤 돼지 가족이나 친구도 없다. 이 돼지의 죽음은 돼지의 살해당하지 않을 보편적 권리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때 코마 상태의 돼지를 죽여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많은 동물권 지지자나 채식주의자는 적절하게 변론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돼지는 죽어도 될 겁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죠. 완전 동떨어진 윤리철학적인 차원의 논의이고, 현실에서 돼지들은 불의의 코마 상태는 커녕 일생 내내의 고통을 겪습니다.
'어떠한 것을 원할 능력'이라는 이해관심능력의 개념적 정의가 어떻게 인간과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정의된 것인지 여전히 잘 설명하지 않으신 것 같네요. 제가 드린 정의는 논리적 정의로 인간과 유사성이 낮은 개체도 지닐 수 있는 능력인데요. 가령 돌도 지닐 수 있죠.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죠.
요점은, "차별은 정당화되지 않은 채 행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기초공리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동물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근거로 '인간은 어차피 뭔가를 먹어야 하는데, 동물을 먹거나 식물을 먹거나 그게 그거다.'는 별로 적당치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동물은 차별당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가 풍부한 반면, 식물은 차별당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볼 어떤 근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육식 옹호의 주장을 바꿔 말하면 "인간은 어차피 먹어야 하는데, 먹히고 싶지 않아하는 대상을 먹거나 그런 데에 관심 없는 대상을 먹거나 그게 그거다"라는 이상한 문장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동물멸종의 가정은 논리적 생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극단적 식물권자는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겠고, 어떤 면에서 동물권 지지자들은 그 주장이 함축하는 결론(자연계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았더라면 멸종당했을 동물들을 멸종당하도록 두기)에 동의하고 있지만, 이 논점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이후 답변은 하게 된다면 밤 늦은 시간에나 가능할 것 같네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반면 돼지는 다르죠.
'어떤 돼지는 자연에서 습성대로 삶을 살다가, 외부 인간에 의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 개입이 전혀 없는 불의의 사고로,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코마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돼지는 코마 상태에서 회복할 방법이 없으며, 이 돼지는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어떤 돼지 가족이나 친구도 없다. 이 돼지의 죽음은 돼지의 살해당하지 않을 보편적 권리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때 코마 상태의 돼지를 죽여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많은 동물권 지지자나 채식주의자는 적절하게 변론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돼지는 죽어도 될 겁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죠. 완전 동떨어진 윤리철학적인 차원의 논의이고, 현실에서 돼지들은 불의의 코마 상태는 커녕 일생 내내의 고통을 겪습니다.
'어떠한 것을 원할 능력'이라는 이해관심능력의 개념적 정의가 어떻게 인간과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정의된 것인지 여전히 잘 설명하지 않으신 것 같네요. 제가 드린 정의는 논리적 정의로 인간과 유사성이 낮은 개체도 지닐 수 있는 능력인데요. 가령 돌도 지닐 수 있죠.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죠.
요점은, "차별은 정당화되지 않은 채 행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기초공리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동물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근거로 '인간은 어차피 뭔가를 먹어야 하는데, 동물을 먹거나 식물을 먹거나 그게 그거다.'는 별로 적당치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동물은 차별당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가 풍부한 반면, 식물은 차별당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볼 어떤 근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육식 옹호의 주장을 바꿔 말하면 "인간은 어차피 먹어야 하는데, 먹히고 싶지 않아하는 대상을 먹거나 그런 데에 관심 없는 대상을 먹거나 그게 그거다"라는 이상한 문장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동물멸종의 가정은 논리적 생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극단적 식물권자는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겠고, 어떤 면에서 동물권 지지자들은 그 주장이 함축하는 결론(자연계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았더라면 멸종당했을 동물들을 멸종당하도록 두기)에 동의하고 있지만, 이 논점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이후 답변은 하게 된다면 밤 늦은 시간에나 가능할 것 같네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가지는거 괜춘하다고 봅니다. 감사의 마음 갖고 '감수성'의 영역이 확장되어 개인적인 실천이 이어지는 것도 하나의 자연스런 선택이겠구요.
읽다가 불어 선생 부분에서 제가 가진 프렌치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떠올라서 ㅋㅋ 제 옛 기억들이 생각났습니다. 문화적 차이인 것 같기도 한데, 예전 몇몇 프랑스인 교환학생들에게서 느낀 뭐랄까 우리가 보기엔 약간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모습들이 생각났네요. '나는 이거저거이고 이러저러한데, 한국의 무엇무엇은 뭐뭐 때문에 불편하고 맘에 안들어' 이런 ... 더 보기
읽다가 불어 선생 부분에서 제가 가진 프렌치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떠올라서 ㅋㅋ 제 옛 기억들이 생각났습니다. 문화적 차이인 것 같기도 한데, 예전 몇몇 프랑스인 교환학생들에게서 느낀 뭐랄까 우리가 보기엔 약간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모습들이 생각났네요. '나는 이거저거이고 이러저러한데, 한국의 무엇무엇은 뭐뭐 때문에 불편하고 맘에 안들어' 이런 ... 더 보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가지는거 괜춘하다고 봅니다. 감사의 마음 갖고 '감수성'의 영역이 확장되어 개인적인 실천이 이어지는 것도 하나의 자연스런 선택이겠구요.
읽다가 불어 선생 부분에서 제가 가진 프렌치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떠올라서 ㅋㅋ 제 옛 기억들이 생각났습니다. 문화적 차이인 것 같기도 한데, 예전 몇몇 프랑스인 교환학생들에게서 느낀 뭐랄까 우리가 보기엔 약간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모습들이 생각났네요. '나는 이거저거이고 이러저러한데, 한국의 무엇무엇은 뭐뭐 때문에 불편하고 맘에 안들어' 이런 식 ㅋㅋ
걔중에 한 명은 프랑스에선 보행자가 건너면 차는 무조건 멈춘다고 그걸 똑같이 4차선 도로에서 빨간 불에 건너는 것도 봤습니다 ㅋㅋ건너고 나서 같이 가는 일행 쳐다보지도 않고 겁나 시크하게 길도 모르면서 계속 직진함ㅋ
읽다가 불어 선생 부분에서 제가 가진 프렌치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떠올라서 ㅋㅋ 제 옛 기억들이 생각났습니다. 문화적 차이인 것 같기도 한데, 예전 몇몇 프랑스인 교환학생들에게서 느낀 뭐랄까 우리가 보기엔 약간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모습들이 생각났네요. '나는 이거저거이고 이러저러한데, 한국의 무엇무엇은 뭐뭐 때문에 불편하고 맘에 안들어' 이런 식 ㅋㅋ
걔중에 한 명은 프랑스에선 보행자가 건너면 차는 무조건 멈춘다고 그걸 똑같이 4차선 도로에서 빨간 불에 건너는 것도 봤습니다 ㅋㅋ건너고 나서 같이 가는 일행 쳐다보지도 않고 겁나 시크하게 길도 모르면서 계속 직진함ㅋ
그런 단순한 비교는 곤란하죠. 현대 공장식 사육이 가축들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괴롭히고 있게요?
https://youtu.be/UcN7SGGoCNI
얼추 써놓을테니 영상은 안 보셔도 됩니다.
젖소도 다른 포유동물처럼 임신을 하거나 새끼가 있어야만 우유가 나옵니다. 고로 암소가 약 12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쉬지않고 일평생을 강제임신을 시키는데요. 교미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컷을 손이나 기계로 자위시켜서 뽑은 정액을 속칭 rape rack이라 불리는 곳에서 암컷에게 튜브로 ... 더 보기
https://youtu.be/UcN7SGGoCNI
얼추 써놓을테니 영상은 안 보셔도 됩니다.
젖소도 다른 포유동물처럼 임신을 하거나 새끼가 있어야만 우유가 나옵니다. 고로 암소가 약 12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쉬지않고 일평생을 강제임신을 시키는데요. 교미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컷을 손이나 기계로 자위시켜서 뽑은 정액을 속칭 rape rack이라 불리는 곳에서 암컷에게 튜브로 ... 더 보기
그런 단순한 비교는 곤란하죠. 현대 공장식 사육이 가축들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괴롭히고 있게요?
https://youtu.be/UcN7SGGoCNI
얼추 써놓을테니 영상은 안 보셔도 됩니다.
젖소도 다른 포유동물처럼 임신을 하거나 새끼가 있어야만 우유가 나옵니다. 고로 암소가 약 12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쉬지않고 일평생을 강제임신을 시키는데요. 교미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컷을 손이나 기계로 자위시켜서 뽑은 정액을 속칭 rape rack이라 불리는 곳에서 암컷에게 튜브로 주입합니다. 그 과정에서 암컷의 항문에 주먹을 집어넣기도 하고요.
송아지가 태어나면 거의 곧장 납치돼서 어미에게서 떨어져서 상자에 갇힙니다. 그도 그럴게... 어미 옆에 있으면 우유를 먹을 거잖아요? 사람 먹을 건데 말이죠. 소는 유대감이 강한 동물이라 어미소는 송아지를 찾으며 며칠씩 울기도 합니다. 영상에는 없는 내용인데요, 젖이 더 잘 나오게 하려고 송아지를 주둥이가 닿지 않는 거리에 보이게 두기도 합니다.
숫송아지면 송아지고기가 되고요. 암송아지는 어미처럼 우유기계가 되죠.
일평생 젖을 짜고 있으니 젖통에는 항상 염증이 가득합니다.
반복되는 착취에 젖소가 탈진하면 쓰러지게 됩니다. 보통 4~5년 정도고요. 그 뒤에는 말씀하신대로 전기도살당해서 고기가 되겠죠. 젖소의 원래 수명은 20~25년입니다.
고통이 있는 것이 자연이라고 하셨죠. 이게 자연스러운 고통입니까?
https://youtu.be/UcN7SGGoCNI
얼추 써놓을테니 영상은 안 보셔도 됩니다.
젖소도 다른 포유동물처럼 임신을 하거나 새끼가 있어야만 우유가 나옵니다. 고로 암소가 약 12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쉬지않고 일평생을 강제임신을 시키는데요. 교미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컷을 손이나 기계로 자위시켜서 뽑은 정액을 속칭 rape rack이라 불리는 곳에서 암컷에게 튜브로 주입합니다. 그 과정에서 암컷의 항문에 주먹을 집어넣기도 하고요.
송아지가 태어나면 거의 곧장 납치돼서 어미에게서 떨어져서 상자에 갇힙니다. 그도 그럴게... 어미 옆에 있으면 우유를 먹을 거잖아요? 사람 먹을 건데 말이죠. 소는 유대감이 강한 동물이라 어미소는 송아지를 찾으며 며칠씩 울기도 합니다. 영상에는 없는 내용인데요, 젖이 더 잘 나오게 하려고 송아지를 주둥이가 닿지 않는 거리에 보이게 두기도 합니다.
숫송아지면 송아지고기가 되고요. 암송아지는 어미처럼 우유기계가 되죠.
일평생 젖을 짜고 있으니 젖통에는 항상 염증이 가득합니다.
반복되는 착취에 젖소가 탈진하면 쓰러지게 됩니다. 보통 4~5년 정도고요. 그 뒤에는 말씀하신대로 전기도살당해서 고기가 되겠죠. 젖소의 원래 수명은 20~25년입니다.
고통이 있는 것이 자연이라고 하셨죠. 이게 자연스러운 고통입니까?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품종개량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자연적'이라는 말에는 별반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옥수수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야생종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할 수준이고, 밀은 고대의 2배체로 시작해서 사람이 최초로 먹은 4배체 야생밀을 거쳐 현재의 6배체 밀이 되었습니다. 염색체가 무려 3배가 됐다는 소립니다.
과일은 또 어떻습니까. 접붙이기라는 치트키가 발명되기 이전의 과일들은 현재와 비교하면 먹을 게 못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씨는 크고 시큼하고 재수없으면 독도 있었... 더 보기
옥수수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야생종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할 수준이고, 밀은 고대의 2배체로 시작해서 사람이 최초로 먹은 4배체 야생밀을 거쳐 현재의 6배체 밀이 되었습니다. 염색체가 무려 3배가 됐다는 소립니다.
과일은 또 어떻습니까. 접붙이기라는 치트키가 발명되기 이전의 과일들은 현재와 비교하면 먹을 게 못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씨는 크고 시큼하고 재수없으면 독도 있었... 더 보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온 품종개량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자연적'이라는 말에는 별반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옥수수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야생종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할 수준이고, 밀은 고대의 2배체로 시작해서 사람이 최초로 먹은 4배체 야생밀을 거쳐 현재의 6배체 밀이 되었습니다. 염색체가 무려 3배가 됐다는 소립니다.
과일은 또 어떻습니까. 접붙이기라는 치트키가 발명되기 이전의 과일들은 현재와 비교하면 먹을 게 못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씨는 크고 시큼하고 재수없으면 독도 있었던 고대의 과일들을 온갖 방법으로 개량시켜 현재의 달디단 과일이 나온 겁니다.
동물이라고 다를까요? 닭은 200g의 사료를 먹고 100g의 살이 찌는 기적의 사료전환율을 보여주는 연금술사가 되었으며, 고대의 들소는 끝내주는 고기맛을 지닌 블랙 앵거스와 열쌍둥이가 태어나도 젖이 부족할 일이 없는 홀스타인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이 중 어떤 것이 '자연적'입니까? 인간이 진화에 개입해 만들어낸 생물종들이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을 인위적 개입을 '자연적'이라 칭할 것이라면 현재의 밀식 재배와 공장식 축산 역시 자연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은 애시당초 그런 것을 할 수 있도록 진화되어 온 생물입니다. 체중 대비 근력은 잡졸 수준이고, 이빨도 약해 손톱도 없어 쓸만한 재주라고는 오래달리기 하나뿐인 인간이 혹독한 자연에서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스탯을 머리에 몰빵했기 때문입니다. 농경도, 목축도 다 그 머리의 산물이고요. 그 모든 행위가 우리 안에 있고, 그런고로 충분히 '자연적'입니다.
거꾸로 이 모든 것이 자연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인위적으로 개량된 생물들을 인위적인 환경에서 키우는 것일 뿐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상할 것이 전혀 없지요.
동물복지.. 좋지요. 도축 시 스트레스를 받으면 고기가 망가지는 것은 과학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물복지 측 주장에 찬성하는 부분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주장하는 '자연'의 결과가 무엇인지가 문제겠지요. 목가적인 삶이요? 아니죠. 멜서스 트랩으로의 회귀입니다. 기술의 한계로 인구의 증가가 식량 생산량이라는 천장에 막혀있던 그 시대로의 회귀 말입니다. 댐과 관개수로를 통해 물을 끌여들여 농토를 만들고 비행기로 농약을 치는 덕에 도시의 서민들이 분필 섞은 빵이 아니라 진짜 흰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이고, 말 그대로 닭장에 가둬놓고 사료를 먹인 덕에 서민들의 식탁에도 얼리지 않은 닭고기가 오를 수 있는 겁니다.
옥수수밥을 먹던 사람들이 쌀밥을 먹게 하는 것이 진보요, 보존용 염장 고기만 먹던 이들에게 생삼겹과 치킨을 먹게 하는 것이 진보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재료를 사서 잘 요리하여 맛있게 먹는 것, 그게 제가 식재료에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일 겁니다.
옥수수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야생종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할 수준이고, 밀은 고대의 2배체로 시작해서 사람이 최초로 먹은 4배체 야생밀을 거쳐 현재의 6배체 밀이 되었습니다. 염색체가 무려 3배가 됐다는 소립니다.
과일은 또 어떻습니까. 접붙이기라는 치트키가 발명되기 이전의 과일들은 현재와 비교하면 먹을 게 못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씨는 크고 시큼하고 재수없으면 독도 있었던 고대의 과일들을 온갖 방법으로 개량시켜 현재의 달디단 과일이 나온 겁니다.
동물이라고 다를까요? 닭은 200g의 사료를 먹고 100g의 살이 찌는 기적의 사료전환율을 보여주는 연금술사가 되었으며, 고대의 들소는 끝내주는 고기맛을 지닌 블랙 앵거스와 열쌍둥이가 태어나도 젖이 부족할 일이 없는 홀스타인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이 중 어떤 것이 '자연적'입니까? 인간이 진화에 개입해 만들어낸 생물종들이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을 인위적 개입을 '자연적'이라 칭할 것이라면 현재의 밀식 재배와 공장식 축산 역시 자연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은 애시당초 그런 것을 할 수 있도록 진화되어 온 생물입니다. 체중 대비 근력은 잡졸 수준이고, 이빨도 약해 손톱도 없어 쓸만한 재주라고는 오래달리기 하나뿐인 인간이 혹독한 자연에서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스탯을 머리에 몰빵했기 때문입니다. 농경도, 목축도 다 그 머리의 산물이고요. 그 모든 행위가 우리 안에 있고, 그런고로 충분히 '자연적'입니다.
거꾸로 이 모든 것이 자연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인위적으로 개량된 생물들을 인위적인 환경에서 키우는 것일 뿐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상할 것이 전혀 없지요.
동물복지.. 좋지요. 도축 시 스트레스를 받으면 고기가 망가지는 것은 과학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물복지 측 주장에 찬성하는 부분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주장하는 '자연'의 결과가 무엇인지가 문제겠지요. 목가적인 삶이요? 아니죠. 멜서스 트랩으로의 회귀입니다. 기술의 한계로 인구의 증가가 식량 생산량이라는 천장에 막혀있던 그 시대로의 회귀 말입니다. 댐과 관개수로를 통해 물을 끌여들여 농토를 만들고 비행기로 농약을 치는 덕에 도시의 서민들이 분필 섞은 빵이 아니라 진짜 흰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이고, 말 그대로 닭장에 가둬놓고 사료를 먹인 덕에 서민들의 식탁에도 얼리지 않은 닭고기가 오를 수 있는 겁니다.
옥수수밥을 먹던 사람들이 쌀밥을 먹게 하는 것이 진보요, 보존용 염장 고기만 먹던 이들에게 생삼겹과 치킨을 먹게 하는 것이 진보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재료를 사서 잘 요리하여 맛있게 먹는 것, 그게 제가 식재료에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일 겁니다.
전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닥터스쿠르를 읽었던 90년대 초등학생이면 알만한 이야기죠.
소의 항문에 주먹을 집어넣는건 소의 체온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도 보편적인 거에요. 너무 충격받으시는것 같은데 소는 큽니다. 사람 주먹은 소 항문에 그리 크게 불편하지도 않아요. 닥터스쿠르만 보셨어도 아실만한 얘기고 은수저에도 소 인공수정 시키는 이야기가 나오죠. 수의대생이 소 항문에 손넣고 있다가 소가 한걸음 뒷걸음질쳐서 발 밟히고 소가 비켜줄때까지 그 자세로 있어야 하는 일이라던가. (소는 신경도 안쓴단 얘깁니다) 영상에서 수의사가 왜 방방뛴... 더 보기
소의 항문에 주먹을 집어넣는건 소의 체온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도 보편적인 거에요. 너무 충격받으시는것 같은데 소는 큽니다. 사람 주먹은 소 항문에 그리 크게 불편하지도 않아요. 닥터스쿠르만 보셨어도 아실만한 얘기고 은수저에도 소 인공수정 시키는 이야기가 나오죠. 수의대생이 소 항문에 손넣고 있다가 소가 한걸음 뒷걸음질쳐서 발 밟히고 소가 비켜줄때까지 그 자세로 있어야 하는 일이라던가. (소는 신경도 안쓴단 얘깁니다) 영상에서 수의사가 왜 방방뛴... 더 보기
전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닥터스쿠르를 읽었던 90년대 초등학생이면 알만한 이야기죠.
소의 항문에 주먹을 집어넣는건 소의 체온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도 보편적인 거에요. 너무 충격받으시는것 같은데 소는 큽니다. 사람 주먹은 소 항문에 그리 크게 불편하지도 않아요. 닥터스쿠르만 보셨어도 아실만한 얘기고 은수저에도 소 인공수정 시키는 이야기가 나오죠. 수의대생이 소 항문에 손넣고 있다가 소가 한걸음 뒷걸음질쳐서 발 밟히고 소가 비켜줄때까지 그 자세로 있어야 하는 일이라던가. (소는 신경도 안쓴단 얘깁니다) 영상에서 수의사가 왜 방방뛴다고 그럴거 같아요? 보통 소는 안 그런 경우가 더 많거든요. 특이한 일이니 언급하는겁니다. 소 항문에 사람이 주먹집어넣은 상태에서 위험한건 팔이 부러질 수 있는 사람이지 소가 아니랍니다. 그럼 가축들 재생산이 가축들 로맨스라도 이뤄질 줄 아셨어요? 젖소만이 아니라 소 돼지 말 다 마찬가지 인공수정 절차를 거칩니다. 인공수정이 뭔데요. 사람 인공수정도 방식은 다를것도 없습니다만..
일평생 젖을 짜고 있으니 젖통에 염증이 가득하다니, 우유품질검사를 뭘로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젖통에 염증이 생기면 우유에 고름과 체세포가 증가하고 그럼 우유품질이 떨어져서 착유작업에서 빠집니다. 1등급우유 2등급우유 그거 기준이 보통 그 체세포수에요. 몇천개 몇만개는 많은게 아닙니다. 염증이 있으면 감염이 있다는거고 그럼 백혈구 갯수가 품질을 초과해버려요. 그래서 그런 기준이 있는거고. 품질이 회복되지 않으면 고기가 되겠죠. 네 젖통에 항상 염증이 가득할 수는 없습니다. 염증이 생기면 착유에서 빠지고 회복못하면 그때 죽어요. 체험농장에서 젖소 젖짜는거 혹시 해보셨나요? 소가 괴로워하던가요? 모유를 짜지 못하면 통증이 생기고 염증이 생기는 젖몸살에 대해선 들어보셨습니까? 젖소도 젖을 충분히 짜지 않으면 되레 염증이 생깁니다. 인간이 젖소를 개량한 나머지 현재의 젖소품종의 소들이 필요이상의 젖이 계속 나오는 것은 잔혹한 인간의 가학행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젖소의 젖을 짜내는 것이 젖소를 괴롭히는 일은 아니랍니다. 그래서 상자에 갇힌 송아지에게는 뭘 먹여서 송아지고기와 우유기계를 만들어낼 것 같습니까? 우유를 먹이죠. 자기 어미소의 젖에서 직접빠는 우유가 아닐뿐이지.. 소가 감정이 어쩌고 해서 쓰러진다는 소리는 진짜 뭐라 해야할지.. 영상의 쓰러진 소들은 병에 걸린거에요. 탈진같은게 아니라. 항생제 없는 자연상태라면 훨씬 더 많이 걸릴 질병이죠.
젖소가 젖을 안짜면 더 오래 살거다. 그럴지는 모르죠. 자연상태에 비해서 더 오래살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다 커서 본적도 없고 생각해본적도 없는 일을 처음 듣고 보고 놀라고 충격받아 이상하게 군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아는 것조차 아니고요. 목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들보다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송아지가 무사히 태어날 때 기쁨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소들의 먹이를 챙기고 건강을 챙기고 배설물을 치워본 사람이 누구일까요? 동물과 교감을 많이 해본 사람들이 사악한 동물원의 사육사들일지
동물원 문닫으라고 시위하는 시위대일지?
가축이 겪는 고통이 자연스러운 고통은 아닐지 모르죠. 자연스러운 고통은 송아지가 더 높은 확률로 태어나지 못하거나, 태어나자마자 포식동물에게 잡아먹히거나, 병에걸려 죽거나, 기생충에 죽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같은 것들이죠. 내셔널 지오그래픽보시면 보통 동물들 개체들이 성체가 되는 확률같은 거 이야기해주지 않던가요?
네. 고통이 있는 것이 자연입니다.
소의 항문에 주먹을 집어넣는건 소의 체온을 측정하는 방법으로도 보편적인 거에요. 너무 충격받으시는것 같은데 소는 큽니다. 사람 주먹은 소 항문에 그리 크게 불편하지도 않아요. 닥터스쿠르만 보셨어도 아실만한 얘기고 은수저에도 소 인공수정 시키는 이야기가 나오죠. 수의대생이 소 항문에 손넣고 있다가 소가 한걸음 뒷걸음질쳐서 발 밟히고 소가 비켜줄때까지 그 자세로 있어야 하는 일이라던가. (소는 신경도 안쓴단 얘깁니다) 영상에서 수의사가 왜 방방뛴다고 그럴거 같아요? 보통 소는 안 그런 경우가 더 많거든요. 특이한 일이니 언급하는겁니다. 소 항문에 사람이 주먹집어넣은 상태에서 위험한건 팔이 부러질 수 있는 사람이지 소가 아니랍니다. 그럼 가축들 재생산이 가축들 로맨스라도 이뤄질 줄 아셨어요? 젖소만이 아니라 소 돼지 말 다 마찬가지 인공수정 절차를 거칩니다. 인공수정이 뭔데요. 사람 인공수정도 방식은 다를것도 없습니다만..
일평생 젖을 짜고 있으니 젖통에 염증이 가득하다니, 우유품질검사를 뭘로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젖통에 염증이 생기면 우유에 고름과 체세포가 증가하고 그럼 우유품질이 떨어져서 착유작업에서 빠집니다. 1등급우유 2등급우유 그거 기준이 보통 그 체세포수에요. 몇천개 몇만개는 많은게 아닙니다. 염증이 있으면 감염이 있다는거고 그럼 백혈구 갯수가 품질을 초과해버려요. 그래서 그런 기준이 있는거고. 품질이 회복되지 않으면 고기가 되겠죠. 네 젖통에 항상 염증이 가득할 수는 없습니다. 염증이 생기면 착유에서 빠지고 회복못하면 그때 죽어요. 체험농장에서 젖소 젖짜는거 혹시 해보셨나요? 소가 괴로워하던가요? 모유를 짜지 못하면 통증이 생기고 염증이 생기는 젖몸살에 대해선 들어보셨습니까? 젖소도 젖을 충분히 짜지 않으면 되레 염증이 생깁니다. 인간이 젖소를 개량한 나머지 현재의 젖소품종의 소들이 필요이상의 젖이 계속 나오는 것은 잔혹한 인간의 가학행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젖소의 젖을 짜내는 것이 젖소를 괴롭히는 일은 아니랍니다. 그래서 상자에 갇힌 송아지에게는 뭘 먹여서 송아지고기와 우유기계를 만들어낼 것 같습니까? 우유를 먹이죠. 자기 어미소의 젖에서 직접빠는 우유가 아닐뿐이지.. 소가 감정이 어쩌고 해서 쓰러진다는 소리는 진짜 뭐라 해야할지.. 영상의 쓰러진 소들은 병에 걸린거에요. 탈진같은게 아니라. 항생제 없는 자연상태라면 훨씬 더 많이 걸릴 질병이죠.
젖소가 젖을 안짜면 더 오래 살거다. 그럴지는 모르죠. 자연상태에 비해서 더 오래살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다 커서 본적도 없고 생각해본적도 없는 일을 처음 듣고 보고 놀라고 충격받아 이상하게 군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아는 것조차 아니고요. 목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들보다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송아지가 무사히 태어날 때 기쁨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소들의 먹이를 챙기고 건강을 챙기고 배설물을 치워본 사람이 누구일까요? 동물과 교감을 많이 해본 사람들이 사악한 동물원의 사육사들일지
동물원 문닫으라고 시위하는 시위대일지?
가축이 겪는 고통이 자연스러운 고통은 아닐지 모르죠. 자연스러운 고통은 송아지가 더 높은 확률로 태어나지 못하거나, 태어나자마자 포식동물에게 잡아먹히거나, 병에걸려 죽거나, 기생충에 죽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같은 것들이죠. 내셔널 지오그래픽보시면 보통 동물들 개체들이 성체가 되는 확률같은 거 이야기해주지 않던가요?
네. 고통이 있는 것이 자연입니다.
누군가 채식주의에 관해 쓴 댓글이 기억에 남습니다. '채식하는사람:정상, 육식하는사람:정상, 남 식생활 면전에서 비평하는 사람:비정상'
식물이 되어본적 없으면서도 덜 만감하다고 단정하는 부분이 많이 아쉽습니다. 식물인지 감수성이 모자란 느낌이예요.
저는 다른 부분은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 둘을 구분할수 없기에 육식, 채식중 뭐가 나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른 부분은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 둘을 구분할수 없기에 육식, 채식중 뭐가 나쁜지 모르겠습니다.
소의 항문검진법이나 그 과정에서 소가 고통스러운지 여부, 우유생산과정에서 염증여부, 갓낳은 송아지가 우유를 먹는지 다른 무언가를 먹는지 여부등은 시각차가 아니라 알고있는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의 문제입니다.
사악군 님// 송아지가 어미소의 우유를 먹으니까 떼놓은 것 맞죠. 사람이 원하는 만큼의 우유를 짜는데 방해가 되니까요. 몸으로 막아서든 입으로 먹어서든. 이것도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나요?
항상 토론 내용보다는 말꼬리잡기에만 여념이신 거 같아서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게 사악군님이 생각하는 토론의 본질인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런 건 법정에서나 어울리는 태도고요. 닭을 금식을 시키든 죽지만 않을 정도로 절식을 시키든 심하게 괴롭히는 건 매한가지고 송아지를 심심해서든 우유를 못 먹게 하려고든 어미와 떨어뜨려서 가하는 고통은 같습니다.
저희 동네에서는 '유의한 차이가 없다'라고 합니다.
항상 토론 내용보다는 말꼬리잡기에만 여념이신 거 같아서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게 사악군님이 생각하는 토론의 본질인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런 건 법정에서나 어울리는 태도고요. 닭을 금식을 시키든 죽지만 않을 정도로 절식을 시키든 심하게 괴롭히는 건 매한가지고 송아지를 심심해서든 우유를 못 먹게 하려고든 어미와 떨어뜨려서 가하는 고통은 같습니다.
저희 동네에서는 '유의한 차이가 없다'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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