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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5/13 15:47:22
Name   Velma Kelly
Subject   처음으로 가르친 수업, 강의 끝나는 김에 적어보는 배운 점
안녕하세요

미국의 모 대학에서 유기화학 1을 가르쳤읍니다
수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맡아서 가르친 건 처음이었지만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도 이 부분은 이렇게 가르치면 되겠다 하고 머릿속으로 자잘한 시뮬레이션을 돌려놨기에 큰 실수 없이 잘 가르친 거 같읍니다. 처음에 지도교수가 필요하면 시험/퀴즈 등 자료를 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제 고집으로(...)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서 엄청 바빴네요


* 학생 중 몇 명은 내가 놀고 먹어도 알아서 공부하고, 몇 명은 내가 이를 악물고 노력해도 배울 생각이 없다
정글고등학교에 생선 빠따로 유명한 수학이 이런 말을 했었는데, 꽤 정확합니다. 20명 수업이었는데, 두세 명은 안 시켜도 교과과정 밖 내용까지 찾아와서 물어봅니다. 선생 없이 교과서만 띡 던져둬도 알아서 대성할 인간들이에요. 반대쪽 세 명 정도는 안 합니다. 못 한다고는 도저히 못 믿겠습니다. 유기화학이 그렇게까지 고차원의 사고를 요하는 과목도 아니고 말이죠. 다만 다른 수업보다 시간 적게 써도 좋으니 꾸준히 매일/이틀에 한번씩 공부를 하라는 내용을 그대로 안 지키는 문제가 큰 거 같읍니다. 특히 의예과 애들이 이런 경향이 심한데, 다른 과목 공부하듯 평소에 느슨하게 하다가 시험 주에만 빡집중을 하는 방법이 안 통하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겠죠


* 출석이 점수에 들어가는 건 학생들을 위한 제도다
매번 출석하고 점수 못 받는 애들은 있어도, 출석 제대로 안하고 높은 점수 받는 학생은 없네요. 모든 강의가 녹화돼서 인터넷에 올라가긴 하는데, 빼먹은 강의를 하나하나 찾아볼 학생은 애초에 강의를 많이 빼먹질 않아요 ㅋㅋㅋㅋ 그러니까 출석이 점수에 들어가는 건 오히려 학생들에게 공짜 점수를 주는 제도인 셈이죠


* 학생들은 생각보다 잘 못 따라간다!
유기화학엔 curly arrow mechanism이란 게 있습니다.


유기화학에서 진짜진짜 중요한 개념인데, 전자가 어떻게 어디로 가서 결합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왼쪽의 O에 붙은 전자 두개가 빨간 H에 가서 결합을 하고, H–Br을 잇고 있던 결합이 끊어져서 Br에 가는 걸 직접 보여주는 것이죠. 

이게 처음엔 좀 불편한 게, 보통 저 빨간 H가 움직이는 걸 묘사하는 게 더 직관적이라서 처음 배웠을 때는 종종 화살표를 반대로 그립니다. 처음엔 그럴 수 있죠. 근데 학기 끝나가는데도 아직도 화살표를 반대로 그리는 걸 보면 도대체 내가 뭘 더 해줘야 하나 자괴감까지 들 정도입니다. 학기 말에 배운 것도 아니고 초장에 배워서 지금까지 수업에서 계속 예시를 보여주고 퀴즈 시험에서 써먹고 있는데도 이래요...


* 궁금한 게 있는데 판이 깔려도 질문을 안 하는 학생들이 있다
참여율은 나쁘지 않아서 몇몇 학생들은 거의 매 강의마다 질문을 하고 예시문제에 답을 하려고 합니다
근데 몇몇 학생들은 집중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참여를 거의 안 해요. 근데 예시문제 풀도록 두고 돌아다니면 저한테만 질문을 해요. 
수업 전체가 질문을 듣는 건 어려우니 100% 이해합니다. 이럴 때만 질문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건 강의 중 예시문제의 좋은 점 중 하나인거 같읍니다.



* 알고 있던 거지만, 유기화학은 정말로 [다른] 과목이다.
유기화학은 의예과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라는 악명이 있습니다. 평생 공부 잘한다는 소리만 듣고 자라온 이 학생들에게 종종 첫 걸림돌이 되는데, 필수로 통과는 해야 하는 관문이기 때문이지요. 위에도 썼지만, 이건 과목 자체가 엄청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다른 과목처럼 공부하면 아주 ㅈ망하는 과목이기 때문입니다. 

유기화학에서 다루는 정보의 양은 엄청납니다. 어떻게 보면 다른 과목들에 비해 많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규칙 같은걸 찾아서 외우려고 보면 꼭 예외가 하나씩 있고, 그걸 다 외우려고 하면 헬난이도 수업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유기화학에서 배우는 내용은 하나부터 열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1-3까지만 제대로 알면 7,8,9까지 능지를 사용해서 뇌속에서 합리화를 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하지만 남들보다 잘 외워서 성적 잘 받던 학생들은 이 현실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죄다 외우려다 자멸하고, 오히려 평상시엔 성적이 잘 안 나와도 머리 굴려서 퍼즐 푸는 걸 좋아하는 (저같은) 학생들이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이상한 과목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다 외워요?" 같은 질문은 안 받았으면 좋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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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걸 다 어떻게 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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