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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11/14 01:52:24수정됨
Name   nothing
Subject   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스티븐 호킹이 시간 여행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호킹 박사님, 틀리셨습니다. 저는 시간 여행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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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부터 바람의 나라 클래식을 조금씩 해보고 있습니다.
소싯적에 재미있게 했던 게임인터라 클래식이 나온다는 소식에 기대를 하고 있었고, 서버가 열리는 날부터 오늘까지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이 게임은 이천년대 초반 당시의 버전을 그대로 되살려 서비스를 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 곳에서 시간 여행을 했습니다.
단순히 소싯적에 하던 게임 버전을 오랜만에 했다는 의미의 시간여행이 아닙니다.
부여성, 그 곳에는 이천년대 초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조직, 어느 사회던 간에 구성원 전반에 공유되는 어떤 "보통이라 여겨지는 행동 규범" 같은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카페 테이블 위에 누군가의 물건이 올려져 있다면 자리가 비어있어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며 일반적이라 여겨지는 현상입니다만, 바다 건너 문화권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들을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그들이 경험한 문화권에서는 카페 테이블에 물건을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보통의 행동 규범"은 아니거든요.

우리나라 특유의 "빨리 빨리" 문화도 이러한 행동 규범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제일 먼저 일어나 짐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사람 이라는 글도 어딘가에서 읽었습니다.
물론 외국인 중에서도 먼저 짐을 챙기는 분들이 계실테고, 한국인 중에서도 느긋하게 일어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만,
어찌됐던 간에 한국의 문화권에서는 먼저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줄을 서는 것이 우리네 "보통의 행동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 규범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 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시대에 따라 꽤나 빠르게 바뀌기도 합니다.
인터넷 짬밥이 어느정도 되시는 분들이라면 PC 통신 시절과 2000년대 인터넷 보급기, 그리고 현재의 온라인 상의 풍토가 얼마나 많이 바뀌어 왔는지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온라인 상에서의 상호 작용이 Thou 에서 It 으로 변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이게 무슨소리냐구요?
다음 문단에서 열심히 설명해보겠습니다.


마르틴 부버라는 양반이 1935년에 "I and Thou" 라는 책을 썼다고 합니다.
이 쪽은 제 전공 분야도 아니라 솔직히 지식의 깊이에 얕긴 하지만, 인간의 존재는 자기 이외의 어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고, 그 관계라는 것은 크게 It 과 Thou 로 나눌 수 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 관계인 "나(I)와 너(Thou)" 는 본질적이고 진정한 인격적 관계입니다.
여기서 "너" 는 독립적인 주체로서 나와 마주하는 존재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는 상대방과의 만남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됩니다.

두 번째 관계인 "나(I)와 그것(It)" 은 비인격적이고 도구화된 관계입니다.
여기서 상대방은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나 목적의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이 관계는 계산적이고 기능적이며 어찌보면 실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홍차넷은 점잖은 분들이 많아서 덜하긴 합니다만, 근래에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댓글 창을 열어보면 한번씩 깜짝 놀라곤 합니다.
상대방이 내 앞에 있었다면 절대 내뱉지 못했을 만한 높은 수위의 댓글들이 익명성을 지렛대 삼아 그야말로 범람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소위 악플이라 불릴만한 댓글들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반면에 "악플"이라는 표현 자체는 점점 뜸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 중 하나로, 악플이 일종의 뉴노멀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이름을 붙일 때는 그것이 "보통"이 아닌 경우에 붙이거든요.
악플이 보통이 된 시대라서 악플을 더이상 악플이라 부르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잡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아무튼 돌아와서, 저는 온라인 상에서 상호작용할 때 모니터 너머에 사람이 있음을 종종 망각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가설아닌 가설을 세워봤습니다.
온라인에서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방이 수도권 모처의 회사 화장실에서 배변 신호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들고 있을 회사원 김모씨 일 수 있다는 Thou 의 관계가 아니라,
그저 닉네임이 XXXX 라고 표시된 무언가라는 It 의 관계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길게 돌고 돌아 행동 규범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면,
[온라인 상에서의 상대방과는 "I and It" 라는 일종의 도구 관계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이 현 시대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보통의 행동 규범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안 그랬냐 하실 수 있을 텐데,
제 기억이 미화되었을 수 있겠지만 예전에는 확실히 "덜" 그랬습니다.
물론 어딜가나 분탕꾼은 있었지만 그 시대에는 그들을 "보통의 행동 규범"을 따르지 않는 이들로 인지했습니다.

제가 길다면 긴 이 글을 통해 돌고 돌아서 행동 규범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나불거리게 된 연유는
바람의 나라 클래식안에서 당시의 행동 규범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충격적이게도 바람의 나라 클래식 게임 안의 부여성 사람들은 서로에게 [인사]를 하고 [호의]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인사와 호의 모두 어쩌면 인간 관계에서 당연하다 여겨질 만큼 기본적인 행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상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익명화되고 객체화된 온라인 상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이름 모를 타인에게 우리는 인사와 호의를 베풀지 않습니다.
그것이 2024년의 온라인에서의 행동 양식입니다.

하지만 우습게도 동시대를 살고 있을 사람들이 접속한 부여성 안에서의 풍경은 사뭇 달랐습니다.
사냥터를 돌아다니다 모르는 캐릭터를 만나면 어렵지 않게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무관심도, "ㅎㅇ" 도 아닌 "안녕하세요?" 입니다.
물론 저 다섯 글자를 모두 타이핑하는 건 아니고 상용구에 배정된 인사말을 Alt+2 를 눌러 건내는 것 뿐이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에 인사를 건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전사 캐릭터로 힘겹게 전갈을 때려잡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주술사가 몹에게 마비를 걸어 사냥을 수월하게 도와주는 모습도 종종 보입니다.
마음씨가 더 착한 분은 방어력을 올려주는 보호, 무장을 전사에게 외워주기도 합니다.
호의를 받은 전사는 역시나 상용구에 등록된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말을 날리곤 합니다만, 대개의 주술사분들은 쿨하게 다음 굴로 자리를 이동합니다.

저는 이 광경을 경험하면서 중학생 시절의 데자뷰를 느꼈습니다.
피씨방 요금은 1000원이지만 바람의 나라 같은 정액 게임은 1200원을 받던 그 시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곁다리 이야기지만, 몇 년 전 출시되었던 모바일 게임인 "바람의 나라: 연"도 몇 개월 정도 플레이해본 적이 있습니다.
바람의 나라와 같은 맵에 같은 캐릭터, 같은 몹들이 등장하는 게임이었지만 바람연에서는 서로에게 인사와 호의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저 나름대로 사냥터에서 마주치는 이들에게 인사를 건내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습니다.
상대 캐릭터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자동사냥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캐릭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티 레이드 같은 시스템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럿이서 함께하는 컨텐츠였지만 예전처럼 부여성 남쪽에 모여서 손가락이 터져라 "65 도사 놀아요" 를 외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종의 자동 매칭 시스템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함께 그룹으로 맺어진 이들끼리도 대화는 일절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합동이라고 하기도 민망하게 각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보스를 공격했고, 보스가 잡히면 누가 누가 더 딜을 많이 냈나 하는 통계와 함께 파티는 자동으로 해산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파티가 해산된 뒤에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헤어질 때에도 인사를 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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