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4/12/07 23:04:03
Name   카르스
Subject   오늘의 탄핵 부결에 절망하는 분들에게.
어쩌다보니 삘받아서 거의 선언문같은 느낌으로 글을 쓰게 되었네요.

제가 민주화 이후 최악의 민주주의 위기를 겪게된 한국에 희망을 하나 걸어보자면, 한국의 회복탄력성은 선진국에 비해서도 높은 편이라는 데 있습니다. IMF 경제위기, 2008-09 금융위기, 박근혜 탄핵, 코로나19 정국 등 여러 위기를 예외없이 성공적으로 극복했다고 극찬받은 대한민국. 충분히 자랑할 만 성취입니다. 극복 방식이 문제적이라고 지적할 순 있지만, 슬프게도 위기 극복조차 제대로 못하고 결딴난 나라가 너무 많음을 근래 몇 년 동안 느낍니다. 이번 계엄령 위기상황에서도, 한국은 최악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서 회복력을 보여준다고 일각에서 호평을 받았죠. 윤석열의 권력 팔다리가 100%까진 아니더라도 최소 90% 정도는 짤린지라 더 이상의 발악도 힘들고. 더 발악하면 그 순간이 문자 그대로 윤석열 대통령의 끝이 되겠죠.

문제는 대통령을 하야나 탄핵시키는 과정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분명 좌절했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박근혜 탄핵정국보다 훨씬 긴급한 건이라 1:1 비교는 곤란하지만, 박근혜 탄핵정국을 돌아보면 초반부터 탄핵이야기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들 당황했지만 거국중립내각이나 하야부터 고려했다가, 안되니까 탄핵을 시도하고 가결시켰지요. 4일만의 탄핵 시도는 결코 느린 속도가 아닙니다. 이번 달 안으로 탄핵/하야 안 되면 많이 곤란하겠지만, 한 번 실패까진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역설적으로 국민의힘 의원들이 표결조차 안하는 역대 최악의 추태를 보인 탓에, 다음 번 탄핵엔 승산이 커졌습니다. 다음 번, 하다못해 다다음 번 탄핵엔 가결 가능성을 높게 봅니다.

이런 참담한 사태는 분명 대재앙입니다. 민주주의 위기가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지만, 이번 한국의 계엄령 시도는 타 선진국의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거든요. 심각성으로는 근래의 미국 국회의사당 폭동과 이스라엘 사법 통제 건 이상이고, 1981년 스페인 쿠데타 미수 말고는 비교해볼 게 없습니다(이마저도 민주주의 초기라는 참작사안이 있음 - 한국으로 따지면 하나회 척결 직전). 근래 민주주의 후퇴 사례에서 후퇴 강도와 국가의 생활수준에서 한국과 그나마 근접한 나라는 폴란드와 헝가리이지요. 한국이 그런 데랑 비교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데서 저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도리어 극단적인 사태이기에, 잘만 극복한다면 여러 사회구조적 문제를 확 고칠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일단 계엄령이 지속되는 최악의 사태는 다행히 넘겼잖아요. 늘 이야기하지만, 한국은 툭하면 한탄하는 지식인들의 생각 이상으로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흔히 박근혜 탄핵 이후를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적지 않은 긍정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성 고용률 개선, 빈부격차 하락, 복지국가화 수준과 국민부담률의 급격한 상승, 삶의 만족도 증대 및 사회신뢰도 개선, 부정부패 완화 등. 제대로 홍보된다면 진보좌파들도 부정하기 힘든 성과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지금 사태에서도 일부 드러납니다. 예시를 하나 들자면, 이명박-박근혜 시절 국정원의 정치개입이 문제가 되어 국정원에서 대공수사권을 박탈한 정치개혁이 선행된 덕에, 그들이 국회의원을 체포하는 일을 정당하게 거부할 수 있었죠. 제가 계엄령 사태에 분노하는 건 역설적으로 그러한 진보가 큽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극심한 무능과 권위주의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게 일어나는 사회 개선 성취를 죄다 날려버리려 했으니까요. 일종의 보수주의적 분노입니다.

물론 한국 사회는 국제질서 변동, 인구 문제, 기후변화, 불평등, 기술 발전 등 제대로 대응 못하면 사회를 결딴낼 수 있는 도전이나 위기로 가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정치구조 개혁이나 민군관계나 연금이나 금융이나 이민정책이나 스포츠 등등,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지만 진전이 더딘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위에서 말했던 많은 진보들도 불완전한 부분이 없진 않았고요. 그런 부분은 예전부터 많은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제 연구분야와 밀접한 주제가 많아서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윤석열의 엄청난 자폭 덕에 이게 단번에 해결될 문이 열렸습니다. 일단 하야나 탄핵으로 정권을 빨리 교체하고, 후속 정부가 제7공화국을 열어버리고, 더 나아가 연금, 금융, 이민정책 등을 잘 해낸다면(갠적으로 민주당이 이 이슈로 흔한 비토보다는 유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박근혜 탄핵부터 제7공화국 성립까지 10년동안의 긴 혁명을 이뤄냈다고 긍정히 평가될지도 모르죠. 문재인 정권의 득과 실을 알고 이재명이 문재인만큼이나 호감 캐릭터가 아니기에, 정부에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게 되어 결과는 더 좋을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직면한 건 HP가 너무 줄어서 최후의 발악을 하는 최종보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너무 강력한 발악이라 고수조차 공략에 고전하는 그런 보스. 하지만 그 최종보스를 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지간한 위기는 다 이겨내는 대단한 나라라고 자부할 수 있고, 중장기적으로 괴롭혀온 거대한 사회구조적 부조리의 끝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쓴 글이 너무 행복회로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 말이 없긴 합니다. 하지만, 정말 잘 하면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이기에 해보는 이야기입니다. 아예 현실 감각을 상실한 수준이 아니라면, 럭키비키한 원영적 사고가 밑도 끝도 없는 냉소와 절망보다는 낫기에.

제가 한국 사회의 긍정적 진보를 이곳저곳에서 이야기한 건, 과도한 비관은 제대로 된 현실 인식과 추가적인 진보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떄문입니다. 그 비관이 게으른 스테레오타입이나 양적이나 질적으로 부실한 데이터에 근거했다면 더 그렇습니다. 우리가 겪는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되도 않는 비관론은 최대한 강하게 반박하려 합니다. 절망조차 윤석열이나 트럼프같은 위험한 부류에 탈취당하는 시대에, 우리는 희망에 의존해야만 진보를 일궈낼 수밖에 없지요.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이길 바라고, 그렇게 이번 위기를 이겨내길 바라고, 이겨낼 것입니다.

긴 싸움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다들 힘을 냅시다.



16
  • 희망이 필요한 때입니다
  • "믿고 싶어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758 육아/가정육아 회복 시간 8 CO11313 25/10/03 1311 29
15757 여행미뤘던 구라파 여행..그리고 보상 청구준비하기_2 6 셀레네 25/10/03 1108 4
15756 일상/생각결혼준비부터 신혼여행까지 (1) 11 danielbard 25/10/02 1328 12
15755 일상/생각부부로 살아간다는건 서로 물들어가는것 같아요. 4 큐리스 25/10/02 1476 19
15754 여행미뤘던 구라파 여행..그리고 보상 청구준비하기_1 19 셀레네 25/10/02 1464 8
15753 일상/생각매끈한 이상과 거친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기 2 하마소 25/10/01 1340 8
15752 사회평범한 학부모가 생각하는 교육 개혁 76 호미밭의파스꾼 25/09/29 2926 4
15751 오프모임2025.10.04 - 잠실 42 Groot 25/09/29 1736 1
15750 일상/생각본질을 보기 우물우물 25/09/29 1047 1
15749 게임[LOL] 9월 28일 일요일의 일정 1 발그레 아이네꼬 25/09/27 934 1
15748 게임[LOL] 9월 27일 토요일의 일정 6 발그레 아이네꼬 25/09/26 967 0
15747 역사트럼프 FBI 전 국장 제임스 코미를 기소하다. - 코미는 왜 힐러리를 죽였을까? 11 코리몬테아스 25/09/26 1740 10
15746 일상/생각나의 희망이와 나의 (두)려움이 대화 시키기 골든햄스 25/09/26 1169 2
15745 게임김용/고룡 시절 무협 좋아하고 발게3 좋아하시면 활협전을 3 kien 25/09/26 1130 0
15744 일상/생각'영포티'는 왜 영포티들을 긁지 못하는가? 17 호미밭의파스꾼 25/09/26 1793 1
15743 기타이륜차 자동차전용도로 통행 허가 요청에 관한 청원 28 DogSound-_-* 25/09/25 1449 2
15742 기타경력직 같은 신입 한명만 걸려라 자소서 문항에 대한 LLM 의 답 10 레이미드 25/09/24 1743 1
15741 음악[팝송] 에드 시런 새 앨범 "Play" 3 김치찌개 25/09/24 934 1
15740 일상/생각15kg 감량하고 10km 달리기 완주하기까지 24 kaestro 25/09/22 1832 34
15739 육아/가정50개월 어린이(?) 유치원 적응기 11 swear 25/09/22 1382 14
15738 일상/생각‘니덤 퍼즐‘ 이란 무엇일까..? 4 레이미드 25/09/22 1484 5
15737 게임올해 최고의 모험을 즐길수 있었던 게임 — 할로우나이트 실크송 6 kaestro 25/09/21 1322 7
15734 정치(스포)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두 장면과 미중관계 11 열한시육분 25/09/21 1306 1
15733 게임[LOL] 9월 21일 일요일의 일정 5 발그레 아이네꼬 25/09/20 895 0
15732 오프모임거절할 수 있는 영화벙 <대부> 9/23(화) 15:00 37 25/09/20 1490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