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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8/28 05:08:05
Name   kaestro
Subject   똥글
나는 어려서는 꽤 잘난 놈이었다. 도무지 기억도 안 나는 옛날 일이지만 유아 시기에는 부모님 말로는 분유 광고를 찍은 적도 있었다는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5학년 때 키가 160이 넘어서 학년에서 가장 큰 편이었고 외모도 꽤나 준수한 모양이었다. 거짓말 안하고 전학가니까 진짜 집으로 쫓아온 여자애들도 있었다. 정작 그때 키가 아직도 유지돼서 지금은 키도 작고 외모도 꾸미질 않고 살아 그런 쪽으로는 딱히 볼 데가 없는 것 같긴 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날 때 쯤 내 학업 능력에 가능성을 본 집에서는 우리 집안 수준에서는 과분할 정도의 투자를 나한테 해서 학원을 보냈다. 나는 그 학원들을 그렇게 성실하게 다니지도 않고 튀고 피씨방을 가거나 숙제한다 해놓고 몰래 던파를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음에도, 대부분의 한국의 부모가 아이에게 그런 천재성을 보는 것이 사실 착각임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실제로 학업이 내 성향에 맞는 아이였다. 비록 고등학교 입시에는 오랜기간 준비해온(사실 학원을 짼 날들이 너무 많아 준비했다 말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만) 과고 입시에 실패했고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지방의 자사고를 가게 됐지만 그 학교가 되려 나와 궁합이 굉장히 잘 맞아 오히려 수능 준비를 훨씬 적은 돈으로 주체적으로 준비했다. 나는 서울대 공대에 들어갔는데 내가 서울대 공대에 들어갈 수 있을거란건 고등학교 2학년 초반때부터 거의 수치상으로 확실한 일이었기에 사실 별로 기쁘단 생각도 들지 않았고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시점에 수능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룬 전년도 수능을 가져다놓고 본 모의고사에서 언어, 영어 영역이 둘 다 1등급이 나왔다.

운동을 하는 것은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체력이나 운동 신경도 좋은 편이라서 어려서부터 딱히 못하는 운동도 없었다. 초등학교때는 학교 대표로 육상 대회에 시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좋아하는 게임은 어지간하면 최상위권이라 할만한 수준까지 도달해본 것 같다.

스스로를 잘난 놈이라 생각하느냐라고 생각하면 나는 스스로를 꽤나 잘 난 놈이라 생각한다. 위의 남한테 설명하기 편한 내 경험들을 벗어나서 가장 내가 좋아하는, 이제 남에게 설명하기 힘든 정성적인 성격들이 있다. 그것은 남의 눈치를 잘 안 보고, 실패하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해보고 생각하고, 메타 인지 능력이 꽤나 좋단 것이다. 어쩌다 길러진 능력들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길러졌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난 책들을 읽고 산 것은 아니다. 나는 소위 말하는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을 진짜 싫어하는 편이고 평소에 하는 입버릇 중 하나는 '고전은 결국 그 시대에 히트한 라노벨이랑 다름 없고, 그 시대를 살지 못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이를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고전을 모티브로 삼아 쓴 현대의 소설을 읽는 것이 맞다. 대표적인 것이 리어왕과 햄릿, 닥터 하우스와 셜록홈즈 등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읽은 책들이 온갖 무협지, 판타지 소설, 만화책이었다. 난 그런 책들이 저속한 매체로 평가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아쉽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와 별개로 저런 능력들을 배양하는 데에 근원점이 된 것은 어려서부터 읽기를 좋아했던 철학책들이나 몇몇 자기계발서들의 영향이 클 것이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난다만 초등학교 도서관에 있었던 '돈'이라는 제목의 자기계발서조차도 나는 꽤나 재밌게 잘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환단고기라는 희대의 국뽕 책의 마수에 사로잡혔던 시기도 몇 달 있었지만.

여기까지만 늘어놓으면 재수없게 왠 자기자랑질이야?가 될 것이기에 이제는 내 치부라고 할만한 이야기들을 좀 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분명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맨날 하는 말이 있었다. '너는 남들하고 다르단 것 잘 알고 있지?'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남들하고 다른지 잘 모르겠다. 그냥 원래 사람은 다 다른거 아닌가? 어머니는 나에게 그러니까 남들하고 지낼 때 조심하고 다니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래서 지멋대로 산 것 같다. 그래서 면접 보고 다닐 때도 딱히 숨길 생각도 안 하고, 보통 면접을 평가받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다니는데 나는 면접에 평가를 하러 나가기도 한다. 전에 좋은 회사라는 평가 듣는 곳에 그래도 두어번 합격해 본 적이 있는데 하나는 하루만에 퇴사했고, 하나는 1년 반 다니고 퇴사했더니 억지로 들어가면 오히려 내 손해라는 생각을 하고 나서 생긴 행동패턴이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은 꽤 친한 친구가 됐다 할 수 있는 전 직장(무려 한달 반밖에 다니지 않았지만)의 사수분께서는 '면접 때 퇴사하고 뭐 하면서 지냈냐 했을 때 쿠팡 다니셨단 이야기는 진짜 골때렸어요'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이 나이 먹고 만화책만 매달 백권도 넘게 보는 인간이고, 보는 애니메이션만도 매 분기 십여개에, 일년에 새 게임만 못해도 5개는 엔딩 보고 지내는 것 같다. 별로 아버지라 부르기 싫은 인간이 나에게 '네가 언제까지 그러고 살 것 같냐? 철 좀 들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이러고 살 거라 생각했었는데 내가 틀렸다. 그때보다 나는 더 심한 인간이 됐다. 옛날보다 저런 짓 하고 사는게 요즘 더 재밌다. 분명 나이 먹으면 새로운 걸 보고 하는 걸 안 좋아한다 그랬던것 같은데 난 오히려 새로운 걸 하는게 요즘 더 즐겁다. 어릴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더 많이 보이니까 재밌는게 맞는 것 아닌가? 난 늙어 죽을때까지 철들 것 같지 않고 철들지 않는 것이 목표 중 하나다.

위와 같이 내가 사는 데에는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만,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이 뿅하고 어느 성취 혹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이전과 크게 달라지는 불연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고 그 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사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건방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내 기억으로 나는 이런 생각을 못해도 초, 중등때부터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교에 가면 연애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아도 돼', '좋은 회사에 가면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아' 같은 것은 그냥 다 하고 사는 착각이라 생각해왔고 그 부분은 아직도 다른 것이 없다. 사람은 그냥 살던대로 사는 거지 무슨 무협지에서 혈맥이 뚫고 판타지 소설에서 서클이 갯수가 늘어나면 이전과 다른 환골탈태하는 존재가 되겠는가라는게 기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서울대를 갈 것이라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었지만 간다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군대도 마찬가지고, 회사나 퇴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생각한 것처럼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는 계획을 촘촘하게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그렇게 계획을 잘 지키는 놈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애초에 계획이란 것은 대부분이 깨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씨의 표현이 진짜 와닿는데 '넓은 시간을 인간이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아주 의지가 강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하루 정도는 성실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이야기 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굉장히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마음가짐과 맞닿은 부분이 있었다. 지금 나는 분명 하루 8시간 자자 해놓고 꼴랑 6시간 잔 다음에 잠이 안오는데 뭐하지 해놓고 이런 똥글이나 쓰고있는 꼬라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나는 그렇게 의지가 강하고 노력하는 사람도 되지 못해서 하루를 성실하게 사는 것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래서 새벽 감성에 글을 쓰면 안된다고 하나보다. 누가 보면 자다 일어나서 소주라도 한병 까고 써놓은 글 같네. 일기는 일기장에라고 하는데 분명 일기에 쓴 글인데 남한테 보여주고 싶은 기분을 못 참겠어서 조용히 올려봤다. 누가 악플달면 울고 조용히 지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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