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6/02/26 16:26:38
Name   루루얍
Subject   교통체계로 보는 경로의존성 - 비공식 교통수단 통제의 어려움
기존 글들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redtea.kr/free/15513 - 경로의존성이랑 무엇인가, 미국의 자동차중심주의, 일본의 경차중심문화
https://redtea.kr/free/15650 - 동유럽의 공산주의에서 비롯된 도시구조, 남미의 버스 중심 대중교통 사례

5. 비공식 교통수단 통제의 어려움 - 개도국 도시들의 교통난

교통에서 "Paratransit"이라고 하는 수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아직 정식 역어는 없는데, 준대중교통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고, "부차대중교통" 정도가 의미를 살리는 것 같긴 하네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얘기하는 대중교통의 의미에는 사실 앞에 "Rapid"라는 단어가 붙습니다. 이게 역사적으로 "고속"의 의미로 처음 시작되긴 했는데, 지금은 맥락상 "대규모"나 "고빈도"의 의미로 더 강하게 사용이 되는 단어요. 이 rapid transit 또는 mass transit과 상충되는 단어로 paratransit이 사용이 됩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게 뭔가 싶을텐데,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성행했던 "합승택시" 같은 거라고 보면 됩니다. 요즘은 거의 사라지긴 했는데, 뭐 지하철역 앞에서 "~~가요"라고 호객행위 하는 것들 있잖아요? 부차대중교통은 이렇게 대충 비슷한 데 가는 여러 명 같이 태워서 보내는 뭐 그런 걸로 시작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태국의 "뚝뚝"이나 인도의 "릭샤" 같이 불리는 삼륜차들이 있습니다.

<인도의 "릭샤">

"릭샤"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어의 인력거(力車, 리키샤)를 어원으로 하는 만큼, 처음에는 인력거 같은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부차교통수단은 "부차(Para-)"라는 네이밍이 붙은 것과는 다르게 보통은 대중교통수단보다 먼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좀더 대형화되고 노선화된 형태의 부차교통수단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 노선화된 형태의 미니버스들입니다. 유명한 사례들이 많지요. 각국의 사례를 좀 알아보겠습니다.

<필리핀의 "지프니(Jeepney)">

필리핀에서 교통의 상징처럼 생각되는 지프니는 2차 대전 이후 미군이 남기고 간 군용차량을 개조하여 상업적으로 활용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칙칙한 국방색의 군용차량을 개조하기 시작하면서, 손님을 끌기 위해 화려한 도색과 장식을 달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특유의 디자인이 생겼죠. 많은 경우에 차량의 외장에 신앙이나 대중문화의 아이콘 등을 그리며 차량에 아이덴티티를 남기기도 합니다.

<케냐의 "마타투(Matatu)"의 외장과 내장>

마타투의 경우 자연발생한 교통수단으로, 초기에 요금이 30센트였던 것에서 스와힐리어의 3(tatu)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호객을 위해 대단히 화려한 그래피티로 치장하고 있으며, 내부의 인테리어 역시 클럽에 준할 정도로 화려합니다. 또한 사운드 시스템 역시 화려하게 되어 있다고 하며 사진으로는 볼 수 없지만 차장들이 곡예를 부리거나 노래나 만담 등으로 손님들을 끌어모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타투는 일종의 "문화"로도 자리매김했다고 하네요.

<태국의 "쏭테우(Songthaew)">

우리나라에서는 바가지로 악명이 높은 태국의 쏭테우는 일반적으로 픽업트럭 뒤에 구조물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개조된 차량들입니다. 치앙마이와 같은 대도시에서 쏭테우는 구역에 따라 색상이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키르기스스탄의 "마르슈루트카(Marshrutkas)">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 시에서 운용되고 있는 마르슈루트카는 위의 사례들과 다르게 대단히 심심한 외양을 보이고 있습니다. 위의 수단들 보다는 "마을버스"에 좀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멕시코의 "페세로(Pesero)">

페세로의 경우 역시 처음에 탑승당 1페소의 요금이 부과되어 지어진 이름입니다.

이런 부차교통수단들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통해 도시에 자리잡게 됩니다.

1. 도시의 급속 성장 → 2. 대중교통의 부족 또는 부재 → 3."비공식" 교통수단으로 자연적 발생 → 4. 폭발적 증가 → 5. 대혼돈의 카오스

각 단계별로 국가나 행정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0년대 일본의 노면전차망입니다.>

"1. 도시의 급속 성장" 단계에서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중교통 기반의 도시계획이 가능합니다. 다만 이건 사실상 꿈에 가까운데, 실질 사례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상당히 입맛이 쓴 내용입니다만, 일본이 관동대지진으로 파괴된 도쿄를 재건하는 데에 대규모의 노면전차와 철도를 계획적으로 설치한 바가 있습니다. 이른바 "제도부흥계획(帝都復興計画)"의 일환으로 시행이 되었던 바가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일본제국의 수도였던 도쿄가 당연히 일정 규모 이상으로 재건될 것이 확실시 된 상황에서 실행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례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 사진입니다. 서울의 대중교통은 부차대중교통의 창궐을 대단히 훌륭하게 막았습니다.>

"2. 대중교통의 부족 또는 부재" 단계에서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중교통을 대량으로 투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대한민국 서울이 이 단계에서 대중교통 대량공급에 성공한 사례입니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부차교통수단이 반드시 발생한다고 봐도 좋습니다.

<홍콩의 PLB들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적색 지붕은 개인형, 녹색 지붕은 기업형입니다.>

"3. 비공식 교통수단 발생" 단계에서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 부차교통수단들을 제도화 하는 방안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성공한 것은 홍콩입니다. 이제는 홍콩의 명물로 자리잡은 홍콩의 미니버스 PLB(Public Light Bus)는 원래 50년대 이후 대중교통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운영된 불법 버스택시에서 시작됐습니다. 여기서 1967년 발생한 이른바 "67폭동"으로 인해 대중교통망이 장기간 마비되자, 홍콩 당국은 이 불법 버스택시의 운영을 한시적으로 눈감아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죠. 폭동 사태가 종료된 이후에도, 이미 퍼질대로 퍼져버린 미니버스를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홍콩 당국은 PLB라는 이름으로 이 부차교통수단을 제도권에 편입했습니다. 다행히도 이 제도권 편입 시도는 어느정도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니버스 자체의 폐지는 불가능해진 것이죠.

<우간다 캄팔라의 택시정류장입니다. 이런 혼잡은 개도국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자, 각 단계별로 대응 방안을 알아봤습니다. 통제에 성공한 국가들을 보면 놀랍게도 모두 동아시아 국가라는 점을 알 수 있지요. 여기에는 대단히 강한 행정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통제에 실패하게 될 경우, 이런 부차교통수단의 폭발적인 성장은 반드시 따라오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이동은 반드시 부가가치를 가지게 되며, 따라서 사람들은 이동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차교통수단이 폭발하게 되면 이에 따른 사회적 문제점들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해당 차량들의 수송력은 버스나 철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혼잡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종사자의 대부분이 극도의 저임금 상황에 처해 있는 운전기사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차량을 적절하게 유지관리하기 어려워 노후차량으로 인한 안전 문제, 환경오염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또한 행정력이 충분하지 못한 곳에서는 이러한 부차교통수단의 운전기사들의 조합이 카르텔이 되어 이권다툼이나 심하면 패싸움에 나서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국가에서는 이러한 부차교통수단을 억제하거나 현대화하거나, 심하게는 폐지하려는 노력을 수행하려고 합니다.

그럼 이러한 부차교통수단의 폭발 이후에 대응에 나선 국가들의 사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필리핀의 지프니 현대화 사업 시도

<중국산 신형 지프니의 전형적인 모습. 콤비와 같은 미니버스의 형태입니다.>

필리핀 교통부는 대중교통 차량 현대화 프로그램(Public Utility Vehicle Modernization Program)을 시행중에 있습니다. 두테르테 정권에서 처음 시작해서 마르코스 정권 역시 해당 사업을 이어받아 진행중에 있습니다. 2017년에 처음 시작된 내용입니다. 내용은 노후차량을 단속하여 퇴출하고, 차량의 현대화를 지원하고, 운송조합 가입을 의무화하는 내용이죠.

하지만 여기에 끊이지 않는 논란이 있습니다. 운송조합에서는 중국산 신형 차량의 가격이 약 250만 페소로 기존 지프니에 비해 가격이 약 15~20배 정도(한국 돈으로 6천~7천만원 정도)이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의 기사들은 이로 인한 지원이 있어도 가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실제 4천불 수준인 필리핀의 GDP를 감안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가격입니다. 정부에서 대안으로 제시하는 필리핀산 신형 지프니의 경우에는 100만~150만 페소 정도로 가격이 대폭 줄어들긴 하지만 이것 역시도 빈곤에 시달리는 일부 기사들에게는 대단한 압력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필리핀의 제조업체들은 신형 지프니에 대한 생산력이 부족하여 실질적인 지프니 퇴출 압력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점도 큽니다.

<올해 1월의 시위입니다. 지금도 진행중인 이야기라는 것이죠.>

현재도 이 사업은 진행중이며 반발 역시 실시간으로 진행중입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초기 8만 페소에서 현재 26만 페소 수준으로 올렸고 추가적인 인상 역시 추진중이기 때문에 약 80%의 기사들은 지프니 현대화 사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은 20%의 기사들은 9년이나 진행된 사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지속적으로 지프니 현대화 사업에 대한 강한 반대를 보이고 있으며, 추가적으로 해외 업체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고 있는 기존의 필리핀 제조업체들의 실직 역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르코스 정권 역시 구형 지프니 퇴출에 대해 대단히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어 연착륙에 대단한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 시 마르슈루트카 조정

이번엔 성공사례를 알아보겠습니다. 키르기스스탄에도 상기한 바대로 "마르슈루트카"라는 이름의 미니버스가 있으며, 특히 수도인 비슈케크 시에 많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또한 비슈케크 시 역시 많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매연에 크게 시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실제 가면 굉장한 매캐함을 느낄 수 있습다.

2018년 경 비슈케크 시 당국이 마르슈루트카의 규제(보험 의무가입, 정기점검 등)에 나서자 버스기사들이 파업에 나서 도시의 교통이 마비된 사건이 있었는데요, 이 사건 이후로 비슈케크 시 당국은 상당히 오랜 기간 노력을 기울여 마르슈루트카를 대체할 수 있는 대중교통수단의 정비에 나섰습니다. 시 당국은 해외 차관을 통해 CNG버스를 구매하여 시의 핵심 노선에 투입하기 시작했고, 시내 중심가에서 마르슈루트카를 완전히 퇴출하는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이 경우는 필리핀과 좀 다른게, 마르슈루트카의 완전한 퇴출이 아니라 시내 중심가에서만 퇴출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기사들의 대규모 반발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대체 교통수단을 시에서 이미 마련한 상태로 퇴출 정책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반발은 대단히 적은 편이었구요. 다만, 정책 집행 직후에는 일부 출도착지에 대해 통행시간이 대폭 증가하는 바람에 시민들이 엄청난 불편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20분에서 2시간까지 증가한 구간도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다만 지금은 어느정도 정착을 한 상태라고 하네요. 다시 말해, 중간적인 해결책을 찾은 경우라고 보면 됩니다.

(키르기스스탄의 경우 이미지가 잘 찾아지지가 않네요. 직접 가서 봤던 내용이라 변화는 확실히 체감을 한 내용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이미 자리잡힌 부차교통수단을 폐지하거나 통제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특히 시민들에게 대체수단을 제공하지 못하거나, 기사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거나 하는 등의 문제로 대단히 극심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서울시 준공영제 역시 처음에 도입됐을 때 GRYB버스니 하면서 조롱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대중교통에서의 경로의존성이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죠. 실질적으로 이런 부차교통수단의 창궐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국가는 싱가포르나 중국 등 중앙정부의 강력한 행정력을 무기로 삼은 국가 정도 밖에 없습니다.

결국, 도시가 발전할 때 이런 부차교통수단이 발달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제도화해야 하는 것이 대중교통 정책의 목표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경로의존성이 대단히 강한 내용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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