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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2/27 12:26:51수정됨
Name   SCV
Subject   AI의 충격파가 모두를 덮치기 전에.
우리 옆 팀에는 지독한 AI 사랑꾼이 있다.

그는 AI와 관련된 주식을 투자하고 AI와 관련된 책과 영상을 늘 탐독하며 여러 AI를 동시에 부리며 멋지게 일하고 퇴근 후에도 AI 공부에 여념이 없다.
그는 개발자 출신은 아니지만 개발자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난 AI 스킬을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몇 달 전 n8n을 기반으로 자기 업무, 생활과 관련된 많은 것들에 대한 자동화의 기틀을 세웠다고 뿌듯해 했다. 많은 사람들은 러닝커브가 꽤나 가파른 n8n을 정복해버린 그의 의지에 감탄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클로드 코드가 나타났다.

그가 몇 개월을 걸려 만들어낸 산출물을 그 몇 달 동안 다른 일 하느라 정신없던 막내가 클로드 코드를 한 시간 만져보고 똑같이 만들어냈다. 그의 AI 사랑은 앞으로도 더 지독해지겠지만, 누구나 그가 앞으로 엄청나게 고민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는 뭔가를 배운다는 것조차도 두려움이 생길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무언가 배워둔 것이 쓸모없어지는 시간이 꽤나 길었지만 이제는 터무니없이 짧아지게 된 것이다. 러닝커브를 다 끌어올리기도 전에 그 러닝커브를 짓밟는 괴물이 나타난다. 새로 나온 기술을 익히지 못하게 된다는 공포보다 쓸 수 없게 된다는 공포감이 더 커져버린 현재는, 붉은 여왕이 달리기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렇게 죽도록 달리는 사람들조차, 사실 전체 인류에서 보면 극히 일부다.

우리 팀은 AX 컨설팅을 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AI, 특히 LLM의 최전선에 서 있다. 메이저 LLM의 가장 비싼 플랜들을 쓰고, 그도 모자라 온갖 마이너한 모델들, LG의 엑사원 같은 국산 모델들, 더 나아가 국산 NPU까지 두루두루 만져보며 변화에 대응하고 이를 기반으로 고객에게 컨설팅과 솔루션을 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AI를 좀 더 나은 수준의 구글 정도로 생각하고 활용한다.
사실 내가 몇 년 전 쓰던 수준보다 못한 활용성으로 AI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아마도 최신 AI 모델을 극한으로 활용하는 사람과 AI를 그저 검색 도구 수준으로 쓰는 사람의 격차는, 그 검색 도구 수준으로 쓰는 사람과 AI를 전혀 쓰지 않는 사람과의 격차보다 이미 클 것이다.

숫자로 보면 더 실감이 난다.

AI 사용을 위해 매달 $20 이상을 지불하는 사람은 전체 인류의 0.3%에 불과하다고 한다. AI를 극한으로 쓰는 사람이 현재 인류라면 가볍게 활용하는 사람이 구석기 시대 인류쯤 될 정도의 격차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발전 속도도 언젠가는 포화되겠지만, AGI가 그 즈음 등장해버린다면? 이제는 포화고 뭐고 없이 격차는 더욱 심각하게 벌어지게 될 것이다.

달리지 않으면 뒤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날지 못하면 뒤로 뛰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이 되어간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사람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사람을 대체하는 일을 돕고 있는 건지. AX 컨설턴트로서 결국 AX를 성공해서 얻고자 하는 목표는 동일 노동자 대비 높은 생산성이 아니라 같은 생산성을 적은 노동자로 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미 취업 시장에서부터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내가 그 일을 만들어내는 장본인 중 하나가 아닐까 괴로울 때가 있다. 이게 다 사람 편하게 살자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느낌.

명쾌한 답은 아직 없다.

다만 이것 하나는 알 것 같다. 달리다 보면 떨어뜨리는 것들이 생긴다. 더 빨리 달리면 더 많이 떨어뜨리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뜨린 것들 중에 다시 주워야 할 것들이 아마도 있을 것이다. 기술부채는 빠르게 줄고 있지만 인지부채는 더욱 빠른 속도로 쌓이고 있다. 기술부채는 코드를 고치면 되지만, 인지부채는 사람이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코드보다 훨씬 느리다.

초음속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소닉붐을 만들어낸다. 그 충격파는 결국 모두를 덮치게 될 것이다. AI가 초음속으로 날아가는 동안,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금 사람을 위해 달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달리느라 사람을 떨어뜨리고 있는 건지 뒤를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비단 이러한 생각들이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서 세상에 꺼내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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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스타일 상 평어체로 작성하였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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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뭐라건, 우리는 그저 걸어갈 뿐.
  • 무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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