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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2/18 07:44:36 |
Name | 리틀미 |
Subject | 이론물리학 vs 신경생물학 ... and 실존주의 |
작성자가 본문을 삭제한 글입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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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일 이론(grand unified theory) 자연의 4대 기본 상요작용 중, 강력과 전약력(electroweak interaction)을 통합하려는 이론입니다. 70년대 약력과 전자기력을 같은 힘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게 밝혀졌고, 이걸 전약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약력과 강력을 같은 힘으로 통합한 것이 대통일 이론입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실험적으로 입증된 것은 없고요. 여기에 중력을 통합한 새로운 이론을 ToE(Theory of Everything, 모든 것의 이론)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통일 이론(grand unified theory, GUT)과 통일장 이론(unified field theory ,UFT)은 기본 상호작용을 통합하려는 목적은 같지만 구분되는 이론입니다. 역어가 구분없이 쓰인 것 같아서 사족을 붙여봅니다...
물리학이 완성 직전이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가까이 와있지 않습니다.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의 갭이 점점 커져서 4대 기본 상요작용중 압도적으로 제일 약한 중력을 제대로 이론화 시키기에는 무리가 생기지요.
물리학은 실제실험으로 이론의 확인이 불가능하면 혹은 이론으로 유의미한 예측을 할수 없으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초끈이론이 그래서 진전이 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암흑에너지나 암흑물질은 아직도 미스테리입니다.
인공지능으로 돌아가 얘기하자면 최근 인공지능 연구를 보면 인간의 뇌에 대한 완전한 이해없이 인공지능을 만들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의 갭이 점점 커져서 4대 기본 상요작용중 압도적으로 제일 약한 중력을 제대로 이론화 시키기에는 무리가 생기지요.
물리학은 실제실험으로 이론의 확인이 불가능하면 혹은 이론으로 유의미한 예측을 할수 없으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초끈이론이 그래서 진전이 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암흑에너지나 암흑물질은 아직도 미스테리입니다.
인공지능으로 돌아가 얘기하자면 최근 인공지능 연구를 보면 인간의 뇌에 대한 완전한 이해없이 인공지능을 만들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개인적으로 물리학은 학문적 발전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성은 없다고 봅니다. 이미 이론물리학의 한계가 온지 수십년이 넘었고 그 이유가 실험으로 증명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은 철학이나 순수 수학이 아니라 자연적인 행위를 수학으로 변환해서 증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성이 없다는게 일단 선형 가속기가 없습니다. 원자 이하의 것을 쪼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데 지금가지고 있는 선형, 비선형 가속기로는 물리학 이론을 증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죠.
그러면 선형 가속기를 만들면 된다? 그건 현실불가능합니... 더 보기
현실성이 없다는게 일단 선형 가속기가 없습니다. 원자 이하의 것을 쪼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데 지금가지고 있는 선형, 비선형 가속기로는 물리학 이론을 증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죠.
그러면 선형 가속기를 만들면 된다? 그건 현실불가능합니... 더 보기
개인적으로 물리학은 학문적 발전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성은 없다고 봅니다. 이미 이론물리학의 한계가 온지 수십년이 넘었고 그 이유가 실험으로 증명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은 철학이나 순수 수학이 아니라 자연적인 행위를 수학으로 변환해서 증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성이 없다는게 일단 선형 가속기가 없습니다. 원자 이하의 것을 쪼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데 지금가지고 있는 선형, 비선형 가속기로는 물리학 이론을 증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죠.
그러면 선형 가속기를 만들면 된다? 그건 현실불가능합니다. 거의 미국의 한주길이 만큼의 땅굴을 파서 만들어도 저 실험이 가능할지 장담을 못하거든요. 그돈이 있을까요? 미국이 전국민적 의료보험도 돈이 없어서 못하는데요?
그리고 인공지능도 그렇습니다. 일단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의 전자식 계산인 0, 1 이걸로는 사람의 두뇌를 표현할수 있지 않습니다. 자연현상은 양자적인데 그걸 0, 1로 변환해서 계산하고 다시 현실적인 것으로 변환하는데 중간에 병목현상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양자 컴표터요?? 불가능합니다.
뭐 이런 저런 이야길 해놨는데...쉘든은 꿈꾸는걸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했다면 에이미는 실재 존재하는 뇌파라던지 이런걸 가지고 실험하고 증명하는 학문이니...에이미 말도 틀린말이 아니고 쉘든이 딱히 반박을 못하고 삐지기만하는거죠.
현실성이 없다는게 일단 선형 가속기가 없습니다. 원자 이하의 것을 쪼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데 지금가지고 있는 선형, 비선형 가속기로는 물리학 이론을 증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죠.
그러면 선형 가속기를 만들면 된다? 그건 현실불가능합니다. 거의 미국의 한주길이 만큼의 땅굴을 파서 만들어도 저 실험이 가능할지 장담을 못하거든요. 그돈이 있을까요? 미국이 전국민적 의료보험도 돈이 없어서 못하는데요?
그리고 인공지능도 그렇습니다. 일단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의 전자식 계산인 0, 1 이걸로는 사람의 두뇌를 표현할수 있지 않습니다. 자연현상은 양자적인데 그걸 0, 1로 변환해서 계산하고 다시 현실적인 것으로 변환하는데 중간에 병목현상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양자 컴표터요?? 불가능합니다.
뭐 이런 저런 이야길 해놨는데...쉘든은 꿈꾸는걸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했다면 에이미는 실재 존재하는 뇌파라던지 이런걸 가지고 실험하고 증명하는 학문이니...에이미 말도 틀린말이 아니고 쉘든이 딱히 반박을 못하고 삐지기만하는거죠.
ㅎㅎ 이거 혹시 유게에서 페르소나 논 그라타 보고 쓰신 거 아닙니까? http://redtea.kr/pb/pb.php?id=fun&no=8957&page=2
일단 선리플 후감상 하겠습니당.
일단 선리플 후감상 하겠습니당.
어떻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가요?
현재의 컴퓨터로도 이미 인간의 뇌 일부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http://health20.kr/3185 참조) 양자컴퓨터 또한 이미 발표되었고요. (http://health20.kr/3519 참조) 지금 인간의 뇌 전체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미래에도 불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또, 인공지능이 꼭 인간의 뇌를 모방하는 방법만 사용하라는 법도 없고요.
현재의 컴퓨터로도 이미 인간의 뇌 일부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http://health20.kr/3185 참조) 양자컴퓨터 또한 이미 발표되었고요. (http://health20.kr/3519 참조) 지금 인간의 뇌 전체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미래에도 불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또, 인공지능이 꼭 인간의 뇌를 모방하는 방법만 사용하라는 법도 없고요.
아니아니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읽는 데 한참 걸렸지 않습니까... 저 짤막한 동영상 클립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걸 알아야 한다니 ㅋㅋ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저가 과학사 및 과학철학에 베이스가 없어서 머라고 코멘트를 하기 힘든데요, 에이미의 말마따나[내가 성공하면 나는 대통일장이론을 유도한 네 사고 과정을 구조화하고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네 결과물을 내 패러다임으로 포섭할 수 있지] 여타 모든 분과학문들의 메타-과학으로서 신경생물학이 자신의 힘을 증명하는 데 만일 성공한다면, 신경생물학 자체를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러주는 학문 체계를 언젠가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하이데거는 싫어하겠지만... ㅋ
저가 과학사 및 과학철학에 베이스가 없어서 머라고 코멘트를 하기 힘든데요, 에이미의 말마따나[내가 성공하면 나는 대통일장이론을 유도한 네 사고 과정을 구조화하고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네 결과물을 내 패러다임으로 포섭할 수 있지] 여타 모든 분과학문들의 메타-과학으로서 신경생물학이 자신의 힘을 증명하는 데 만일 성공한다면, 신경생물학 자체를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러주는 학문 체계를 언젠가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하이데거는 싫어하겠지만... ㅋ
음..
일단 입소 팍토- 오르도 코그노센디 부분은 번역이 맞지 않아요. 에이미가 여기서 한 말은 무슨 대단한 내용을 함축한 게 아니라 \"사고의 진행순서로 볼 때(In the order of cognition) 그 자체로 (in fact) 내가 더 앞섬(prior)\" 이란 말이에요. 무슨 소린가 하면 이론이란 뇌를 굴려서 만드는 거고 자기는 그 뇌를 연구하는 거니까 순서상 자기가 더 앞선다는 말이지요. 여기에 플라톤 같은 걸 더 뿌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프레게와 심리주의에 대해선... 심리주의 비판은 말하자면 에이... 더 보기
일단 입소 팍토- 오르도 코그노센디 부분은 번역이 맞지 않아요. 에이미가 여기서 한 말은 무슨 대단한 내용을 함축한 게 아니라 \"사고의 진행순서로 볼 때(In the order of cognition) 그 자체로 (in fact) 내가 더 앞섬(prior)\" 이란 말이에요. 무슨 소린가 하면 이론이란 뇌를 굴려서 만드는 거고 자기는 그 뇌를 연구하는 거니까 순서상 자기가 더 앞선다는 말이지요. 여기에 플라톤 같은 걸 더 뿌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프레게와 심리주의에 대해선... 심리주의 비판은 말하자면 에이... 더 보기
음..
일단 입소 팍토- 오르도 코그노센디 부분은 번역이 맞지 않아요. 에이미가 여기서 한 말은 무슨 대단한 내용을 함축한 게 아니라 \"사고의 진행순서로 볼 때(In the order of cognition) 그 자체로 (in fact) 내가 더 앞섬(prior)\" 이란 말이에요. 무슨 소린가 하면 이론이란 뇌를 굴려서 만드는 거고 자기는 그 뇌를 연구하는 거니까 순서상 자기가 더 앞선다는 말이지요. 여기에 플라톤 같은 걸 더 뿌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프레게와 심리주의에 대해선... 심리주의 비판은 말하자면 에이미가 말한 것과 같은 환원주의를 겨냥한 거에요. 모든게 인간의 뇌의 장난일 뿐 실재(reality)와는 관련이 없다는 식의 환원주의에 대한 배격이지요. 뭐 사실 요즘 맹위를 떨치는 모든 종류의 생물학 분파들이 거의 다 여기에 해당하긴 하지만 프레게가 심리주의를 비판했을 당시 그의 메인 타겟 중 하나는 후설이었어요. 프레게가 후설의 어떤 저서를 리뷰하면서 \"이놈 심리주의자네\" 하고 공격했거든요.
후설 본인은 인정 안했겠지만 어쨌든 그런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철학을 하긴 했지요.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우리 말야 이제 책상이나 꽃 같은 외부사물 분석에 대해선 이제 판단을 정지하고(epoche) 그걸 그냥 현상(phenomena)으로 취급하자.\"는 거지요. 이 방면으로 생각을 진행시키면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입장이 나오게 됩니다. [사실 따지고보면 진짜 실재한다 (real) 고 할 만한 건 보고 듣는 여기 지금 나, 주체밖에 없고 나머진 다 주체가 구성(constitute)한 것들 아냐?] 같은 거요. 그 어떤 외부세계와의 접촉, 즉 경험과 영향 이전에 근본적으로 보고 들으며 사고하고 활동하는 이 의식(consciousness) 만 리얼한 거고 나머진 이 리얼한 나의 꿈 같은 게 되는 거지요. 어딘가 장자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ㅎㅎ)?
이렇게 보면 하이데거가 후설의 제자가 되고, 후설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보고 열광한 것도 이상할 게 없어요. 또 그런 하이데거를 읽고 사르트르가 열광한 것도 이상할 게 없구요. 이양반들이 공통적으로 배격(?)한 게 바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이에요. 전통 형이상학은 주체인 [나]의 존재양태를 묻지 않아요. 음.. 묻긴 묻는데 [제대로] 묻지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했지요. 대신 전통 형이상학이 집중한 건 주체가 보고 느끼는 저 세계의 존재양태였어요. 이 꽃이랑 저 꽃은 [꽃]의 이데아와 같은가 다른가 등등.
그런데 자연과학이 성장을 거듭하다보니까 더이상 철학자들이 세계의 존재양태에 대해 뭐라뭐라 말하기가 쑥스러워진 거에요. 그거야 뭐 화학자인지 물리학자인지가 알아서 해주지 않겠어요? 그래서 철학자들 입장에서는 마치 전후 대영제국이 식민지를 하나씩 떼서 떠나보내듯 자기들이 하던 일을 하나씩 떼서 떠나보낼 필요가 있었고 기존 형이상학이 던지던 질문들을 잘 포장해서 이제 너희들이 가지고 놀라고 과학자들에게 던져준 뒤 자신들의 본연의 임무(?)를 하나 새로 만들어낸 거지요. [나]에 대한 탐구.
물론 이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어요. 마치 대영제국이 식민지를 떼내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아서 아직까지 중동문제가 계속되듯 과학과 철학도(음, 대륙철학으로 한정할게요) 이런 할양시기를 거쳐서 사이가 안좋아진 부분이 있었는데 특히 생물학이 그래요. 예컨대 현상학 계통, 후설 하이데거를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검토한 철학자라면 말씀하신 바와 같은 [인간의 뇌와 사고 과정이 신경생물학과 인공지능에 의해 완벽하게 이해되고 재현되어서 인간이 둥둥 떠다니는 사고 회로 전자파로 승격된다]는 말에 1)코웃음을 치거나 2) 격분하거나 3) 두가지를 적당히 섞인 반응을 할 거에요.
예컨대 이런 식이에요. (정확한 인용은 아니고 대강 이런식인데) 미셸 앙리가 인간=나 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면서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뚜껑을 열어보면서 이게 다인 것처럼 연구하고 말하지만 그들이 섹스를 할 때는 전혀 다른 [나]가 된다\" 라고 했지요. 섹스를 할 때도 \'이건 뉴런이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이렇고 저러한 것으로 환원되지. 여기서 섹스의 주체인 나와 저이는 그저 우리 뇌의 착각 속에서 뒤엉켜있는 것 뿐이야\' 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흥이 다 가시고 기분이 식어서 더이상 그 일을 못하게 되고 말 거에요.
지금은 예전만큼 인기가 있진 않지만 하이데거나 미셸 앙리 등의 현상학자들이 회복하려고 했던 인간성은 그 모든 현상들과 외부요인들과 무관한 초월적인(transcendental) 나를 발견하는 데 있었어요. 우리의 모든 사고가 뇌가 만들어낸 착각이든 뭐든 간에 우리의 의식이 매 순간 순간 마다 끝 없이 활동하고 있는 이 활동 (activity) 자체, 그리고 이 활동을 활동 주체인 내가 느끼는 것 그 자체는 그 무엇보다도 진짜(real)라는 거지요. 이 부분이 정말 짜릿해요. 단순히 무언가가 활동하는 게 아니라 활동 주체가 자기의 활동을 느끼고 그 느끼는 활동마저도 느끼는 어떤 완결된 기분, 이게 [나]라는 거에요. 이는 남의 뇌를 들여다봐서는 느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무언가를 보고 있는 나를 보는 나]는 오직 내가 나에게서만 감지할 수 있는 거니까요. 외부로 향하는 시선 속에서 그 시선 자체를 감지하는 것, 시선을 보내는 그 주인공을 찾는 것. 마치 선종의 명상법 같지 않아요?
요즘 AI 관련 글마다 빠짐없이 나오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감각질(qualia) 같은 게 이 자기경험과 비슷해요. 비롯 감각질 논쟁에선 자기의 자기경험을 이야기하진 않지만 자기가 무언가를 보고 느낀다는 그 느낌의 내재성이 과연 우리 손으로 물리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가를 문제삼지요. 뇌를 공장에서 찍어낸다거나, 완벽한(?) 전자두뇌를 만들어낸다거나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지 아닐지는 여기서 결판날 거에요. 전자두뇌는 과연 행복감을 느낄까요. 섹스의 즐거움을 알까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실존적 공포를 느낄까요. 개인적으론 회의적인데... 결국 어떻게 될진 모르겠네요 :)
일단 입소 팍토- 오르도 코그노센디 부분은 번역이 맞지 않아요. 에이미가 여기서 한 말은 무슨 대단한 내용을 함축한 게 아니라 \"사고의 진행순서로 볼 때(In the order of cognition) 그 자체로 (in fact) 내가 더 앞섬(prior)\" 이란 말이에요. 무슨 소린가 하면 이론이란 뇌를 굴려서 만드는 거고 자기는 그 뇌를 연구하는 거니까 순서상 자기가 더 앞선다는 말이지요. 여기에 플라톤 같은 걸 더 뿌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프레게와 심리주의에 대해선... 심리주의 비판은 말하자면 에이미가 말한 것과 같은 환원주의를 겨냥한 거에요. 모든게 인간의 뇌의 장난일 뿐 실재(reality)와는 관련이 없다는 식의 환원주의에 대한 배격이지요. 뭐 사실 요즘 맹위를 떨치는 모든 종류의 생물학 분파들이 거의 다 여기에 해당하긴 하지만 프레게가 심리주의를 비판했을 당시 그의 메인 타겟 중 하나는 후설이었어요. 프레게가 후설의 어떤 저서를 리뷰하면서 \"이놈 심리주의자네\" 하고 공격했거든요.
후설 본인은 인정 안했겠지만 어쨌든 그런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철학을 하긴 했지요.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우리 말야 이제 책상이나 꽃 같은 외부사물 분석에 대해선 이제 판단을 정지하고(epoche) 그걸 그냥 현상(phenomena)으로 취급하자.\"는 거지요. 이 방면으로 생각을 진행시키면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입장이 나오게 됩니다. [사실 따지고보면 진짜 실재한다 (real) 고 할 만한 건 보고 듣는 여기 지금 나, 주체밖에 없고 나머진 다 주체가 구성(constitute)한 것들 아냐?] 같은 거요. 그 어떤 외부세계와의 접촉, 즉 경험과 영향 이전에 근본적으로 보고 들으며 사고하고 활동하는 이 의식(consciousness) 만 리얼한 거고 나머진 이 리얼한 나의 꿈 같은 게 되는 거지요. 어딘가 장자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ㅎㅎ)?
이렇게 보면 하이데거가 후설의 제자가 되고, 후설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보고 열광한 것도 이상할 게 없어요. 또 그런 하이데거를 읽고 사르트르가 열광한 것도 이상할 게 없구요. 이양반들이 공통적으로 배격(?)한 게 바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이에요. 전통 형이상학은 주체인 [나]의 존재양태를 묻지 않아요. 음.. 묻긴 묻는데 [제대로] 묻지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했지요. 대신 전통 형이상학이 집중한 건 주체가 보고 느끼는 저 세계의 존재양태였어요. 이 꽃이랑 저 꽃은 [꽃]의 이데아와 같은가 다른가 등등.
그런데 자연과학이 성장을 거듭하다보니까 더이상 철학자들이 세계의 존재양태에 대해 뭐라뭐라 말하기가 쑥스러워진 거에요. 그거야 뭐 화학자인지 물리학자인지가 알아서 해주지 않겠어요? 그래서 철학자들 입장에서는 마치 전후 대영제국이 식민지를 하나씩 떼서 떠나보내듯 자기들이 하던 일을 하나씩 떼서 떠나보낼 필요가 있었고 기존 형이상학이 던지던 질문들을 잘 포장해서 이제 너희들이 가지고 놀라고 과학자들에게 던져준 뒤 자신들의 본연의 임무(?)를 하나 새로 만들어낸 거지요. [나]에 대한 탐구.
물론 이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어요. 마치 대영제국이 식민지를 떼내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아서 아직까지 중동문제가 계속되듯 과학과 철학도(음, 대륙철학으로 한정할게요) 이런 할양시기를 거쳐서 사이가 안좋아진 부분이 있었는데 특히 생물학이 그래요. 예컨대 현상학 계통, 후설 하이데거를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검토한 철학자라면 말씀하신 바와 같은 [인간의 뇌와 사고 과정이 신경생물학과 인공지능에 의해 완벽하게 이해되고 재현되어서 인간이 둥둥 떠다니는 사고 회로 전자파로 승격된다]는 말에 1)코웃음을 치거나 2) 격분하거나 3) 두가지를 적당히 섞인 반응을 할 거에요.
예컨대 이런 식이에요. (정확한 인용은 아니고 대강 이런식인데) 미셸 앙리가 인간=나 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면서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뚜껑을 열어보면서 이게 다인 것처럼 연구하고 말하지만 그들이 섹스를 할 때는 전혀 다른 [나]가 된다\" 라고 했지요. 섹스를 할 때도 \'이건 뉴런이 이렇게 저렇게 해서 이렇고 저러한 것으로 환원되지. 여기서 섹스의 주체인 나와 저이는 그저 우리 뇌의 착각 속에서 뒤엉켜있는 것 뿐이야\' 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흥이 다 가시고 기분이 식어서 더이상 그 일을 못하게 되고 말 거에요.
지금은 예전만큼 인기가 있진 않지만 하이데거나 미셸 앙리 등의 현상학자들이 회복하려고 했던 인간성은 그 모든 현상들과 외부요인들과 무관한 초월적인(transcendental) 나를 발견하는 데 있었어요. 우리의 모든 사고가 뇌가 만들어낸 착각이든 뭐든 간에 우리의 의식이 매 순간 순간 마다 끝 없이 활동하고 있는 이 활동 (activity) 자체, 그리고 이 활동을 활동 주체인 내가 느끼는 것 그 자체는 그 무엇보다도 진짜(real)라는 거지요. 이 부분이 정말 짜릿해요. 단순히 무언가가 활동하는 게 아니라 활동 주체가 자기의 활동을 느끼고 그 느끼는 활동마저도 느끼는 어떤 완결된 기분, 이게 [나]라는 거에요. 이는 남의 뇌를 들여다봐서는 느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무언가를 보고 있는 나를 보는 나]는 오직 내가 나에게서만 감지할 수 있는 거니까요. 외부로 향하는 시선 속에서 그 시선 자체를 감지하는 것, 시선을 보내는 그 주인공을 찾는 것. 마치 선종의 명상법 같지 않아요?
요즘 AI 관련 글마다 빠짐없이 나오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감각질(qualia) 같은 게 이 자기경험과 비슷해요. 비롯 감각질 논쟁에선 자기의 자기경험을 이야기하진 않지만 자기가 무언가를 보고 느낀다는 그 느낌의 내재성이 과연 우리 손으로 물리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가를 문제삼지요. 뇌를 공장에서 찍어낸다거나, 완벽한(?) 전자두뇌를 만들어낸다거나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지 아닐지는 여기서 결판날 거에요. 전자두뇌는 과연 행복감을 느낄까요. 섹스의 즐거움을 알까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실존적 공포를 느낄까요. 개인적으론 회의적인데... 결국 어떻게 될진 모르겠네요 :)
(신경)심리학과 철학은 갈수록 그 사이가 벌어지는 기분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증거를 찾아냈죠. 이건 뭐 반대쪽을 단백질 덩어리 취급하는 수준이니 척을 질 수밖에요. 이런 심리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바라볼 때 흥미롭게 다가오는 철학자가 \'모리스 메를로퐁티\'입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외부와의 소통 창구이자 선험적 근원으로 상정했죠. 신경심리학의 결론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메를로퐁티의 이론을 여럿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할 때, 저는 신경생물학의 발달이 철학 전체와 척을 진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 서양 철학사를 지배한 \'이원론적 사고\'(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있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를 반대하고 \'일원론적 사고\'(정신과 육체는 하나)를 지지하는 거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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