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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3/26 21:41:20 |
Name | 기아트윈스 |
Subject | 수업시간 추억 한 폭 |
때는 08년 2학기였어요. 저는 강의실 한 켠에 앉아서 데이빋 흄의 철학을 한 학기간 강의해줄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닮아가게 마련이잖아요. 송창식을 좋아하는 아버지 친구분은 송창식처럼 생겼고 비트겐슈타인을 전공하는 교수님은 꼭 비트겐슈타인처럼 생겼지요. 전 데이빋 흄을 좋아하는 여선생님은 어떻게 생겼을지 무척 궁금했어요. 마침내 강의실에 입장한 40대 중반의 선생님은 마치 근세 영국에서 방금 걸어나오신 것처럼 생겼었어요. 그 시대의 옷을 입은 건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시대풍이 느껴졌지요. 작고 호리한 몸과 묘하게 어울리는 번쩍이는 눈빛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화안금정火眼金睛으로 강의실을 가득 매운 30여 학생들을 슥 둘러보시곤 허스키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강의계획을 알려주셨어요. 계획이랄 것도 없었던 게 그저 우리는 이번 학기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및 해당 서적의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몇몇 논문들 (예컨대 러셀)을 읽어볼 것이고 나머지는 다 질의응답 및 토론이라고 하셨어요. 수업은 또 그런 수업이 없었지요. 질의응답이 도대체가 끊어지질 않아서 수업시간엔 텍스트를 거의 읽지 못할 정도였어요. 간혹 학생들이 도대체 질문을 안한다며 한탄하는 선생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 자기 얼굴에 침 뱉는 말이에요. 질문이 나오느냐 안나오느냐는 거의 전적으로 응답의 퀄리티에 달려있는 거니까요. 응답자가 질문자의 질문 내용을 질문자 본인보다도 더 명쾌하게 짚어내고 예기치 못한 시원한 답변을 쑥쑥 내놓으면 질문이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가 없어요. 그건 마치 아무리 탁구 초보자라도 고수와 함께 치면 티키타카 유려한 랠리가 되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바보 같이 쳐도 상대가 어떻게든 그걸 받아올려서 다시 치기 좋게끔 올려주는데 어떻게 랠리가 끊기겠어요.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어요. 수업시간에 못다한 이야기는 수업이 끝나고도 이어졌어요. 뒷시간이 비는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선생님을 포위하고 나가서 교정 이곳저곳에서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고 그런 시간이 오히려 수업시간보다도 더 길었지요. 그걸로도 모자라 집에가면 학교에서 제공하는 강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게시판 토론을 이어갔어요. 단 3학점 짜리 수업이었지만 그 학기의 다른 15학점어치 강의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로 그 강의는 흡입력이 있었어요. 한 학기를 지배했지요. 실은 학부생활 전체를 지배했어요. 다른 강의에 대한 기억이 모두 흐릿해도 그 강의만은 잊을 수가 없어요. 유일한 한이 있었다면 그분이 그저 시간강사였다는 거에요. 아니 세상에. 어떤 친구는 이분이 지도교수라면 두 말 없이 대학원 원서를 넣었을 거라며 무척이나 아쉬워했어요. 저도 어쩌면 흄을 전공하게 됐을지도 몰라요. 강의 홈페이지에 쏟은 열정 역시 대단했어요. 08년 겨울에 마친 강의인데, 09년 말까지도 누군가가 들어와서 인사를 남기거나 또 질문을 하면 하루이틀안에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그곳은 마치 우리들만의 홍차넷, 피지알 같았지요. 13년, 영국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찾아뵈었어요. 아이 낳은 이야기, 유학가는 이야기, 철학 이야기 등을 버무려 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야기를 계속했어요. 선생님은 몸조심히 잘 다녀오라며 무슨 선물까지 주셨지요.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아 몹시 기뻤어요. 14년에 잠깐, 15년에 잠깐 귀국했었지만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진 않았어요. 왜 그렇잖아요.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겐 좋은 모습 성공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지금 말고, 나중에 유학을 다 마치고 나면 마치 그 모든 고통스런 과정이 전혀 어렵지 않기라도 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뭐 그럭저럭 무난하게 학위도 받고 귀국했어요" 하고 쿨한척 자랑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우쭐하게 자랑하고 나면 선생님께서 언제나 그랬듯 활짝 웃으시며 잘했다고, 잘 할 줄 알았다고 칭찬해주실 테고. 그러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어요. 작년에 돌아가셨대요. 14년에 폐암 판정을 받고 15년에 돌아가셨대요. 믿기지가 않았어요. 그런 지성을 가지고 싶었고 그런 감성을 가지고 싶었어요. 그분처럼 되고 그리고 잘 했다고 칭찬 받고 싶었어요. 열 번이고 칭찬 받고 싶었어요. 동명이인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저기 알아보니 정말이래요. 이젠 안계신대요. 다시 08년 2학기의 그 강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어요. 선생님과 학생들이 이런저런 철학 주제들을 놓고 수백플씩 주고 받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선생님이 쓰시던 ^^도, ㅋㅋㅋ도 모두 남아있는데 이제 그 사람은 없어요. 사람만 없어요. 한 이틀을 넋을 놓고 지냈어요. 밤에 잠도 안왔어요.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마음 속에 가득 막혀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더군요. 그렇다고 또 눈물이 나오거나 한 것도 아니에요. 표현해야할 게 있는데 그게 무언지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채 시간만 보내다가 다시 그 강의 홈페이지에 들어갔어요. 선생님께 드리는 짧은, 아주 짧은 글을 쓰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늘 생각만 했지 꺼내진 못했던 말을 썼어요. 존경하고 사랑한다구요. 그리곤 바보처럼 한 참 울었어요.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인간은 그 앞에서 속절 없이 쓰러져요. 절대로 안그럴 것 같던 분도 그러더라구요. 그러니 여러분은 소중한 사람이 있거든 언젠가 만나자고 기약만 하지 마시고 오늘 만나세요. 오늘이 아니면 내일 만나세요. 할 말이 있으면 바로 하세요. 그리고 누군가와 헤어질 때는 늘 그 모습을 잘 갈무리해두세요. 그게 마지막일 지도 모르니까요. 두서 없는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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