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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2/03/06 13:47:32수정됨 |
Name | 기아트윈스 |
Subject | 한문빌런 트리거 모음집 |
맨날 한자 보는 일을 하게 된 죄로 몰랐으면 차라리 행복했을 것을 이제는 안다는 이유로 고통받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1. 매일(每日) 매일(每日)은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오는 신문이기 때문에 매일신문... 마이니찌(每日) 신문입니다. 날마다 마시는 우유이기 때문에 매일(每日)우유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매일(每日)이라고 썼는데 그 뒤에 다시 '마다'를 붙이면 군더더기가 됩니다. "그 뒤부터 그녀는 [매]일[마다] 그의 방을 찾아왔다" "[매]번 식사를 할 때[마다] 그는 술을 마셨다" 등등이 있겠습니다. 저라면 첫 문장은 [매일] 혹은 [날마다]로 통일하고, 두 번째 문장은 아예 [매번]을 빼버릴 것 같네요. 옛날 글에선 이런 군더더기가.... 많았던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만, 아무튼 요즘 글에선 제법 보입니다. 2. 억하심정(抑何心情) 여기서 '억'은 '대체', '대관절' 같은 뜻으로 쓰이는 어조사입니다. '하'는 '무슨'이라는 뜻의 의문사. 심정은 심정. 정리하면 [너 지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도가 됩니다. 상대방이 저지른 일에 빡쳤거나 벙찐 나님의 기분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지요. "너 지금 억하심정으로 나한테 이러는 거니~?" = "너 지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러는 거니~?" 요즘은 이 '억'자의 어감이 '억울함'을 연상시키는 관계로 억하심정 네 글자를 뭉뚱그려서 어떤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가리키는 말처럼 쓰이곤 합니다만... 따지고보면 잘못된 용법입니다. 예컨대 "영감님께서 제게 섭섭한 일을 하신 적이 없는데 제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겠습니까" 여기서도 억하심정이 '억울한 심사'로 쓰였죠? [하(何)]라고 이미 의문사가 있건만 그 앞에 [무슨]이라는 의문사가 추가로 붙었구요. 중복이네요. 잘못 말한 겁니다. 한문빌런 트리거 눌리는 소리 달칵달칵. 저라면 이렇게 쓰고 싶네요. "영감님께서 제게 섭섭한 일을 하신 적이 없는데 제게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 3. 막(莫) '막'자는 부정대명사입니다. 이게 뭔소린가하면 부정의 의미를 담은 대명사... 음.... 영어로 치면 nothing 이나 nobody 같은 겁니다. 브아솔의 Nothing better라는 노래가사를 생각해보세요. Nothing better than you 라고 하면 [없는것. 더좋은. 보다. 너] 이렇게 되지요? 대충 우리말로 풀면 [그 어떤 것도 없다 너보다 좋은 건] 뭐 이렇게 됨. '막'자가 정확히 이렇게 쓰입니다. 순자에서 한 구절 인용해봅시다 在天者, 莫明於日月 재천자, [막명]어일월 하늘에 있는 것으로, [없는것. 더밝은] 보다. 해와 달. 하늘에 있는 것 중에 해와 달 보다 더 밝은 것은 없다. -->해와 달이 제일 밝아 'ㅅ' 그래서 막(莫)자가 조합된 단어들은 모두 최상급입니다. 막강한 군대: 그보다 더 강할 수 없는 군대 막대한 피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피해 후회막심: 그보다 더 심할 수 없는 후회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면 이상해집니다 "A 기사단의 전력은 막강하지만 그래도 B 기사단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이번 전쟁으로 C공작령은 상당히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런 문장 보면서 한문빌런은 PTSD로 쓰러짐. 정 헷갈리면 '막'자를 '최(最)'자로 바꿔서 읽어보셔요. 막강한 군대는 최강의 군대. 막대한 피해는 최대한의 피해. 4. 아니하다(不) 아니다(非) 不자는 하느냐 아니하느냐가 문제일 때 붙입니다. 非는 명사에 붙입니다. 비인간(非人間): 사람이 아닌 [것] 부정(不正)한 사람: 바르지 아니[한] 사람 그래서 가만 떠올려보면 부/불 로 시작하는 말은 대체로 [-하다]로 끝납니다. 부당하다. 불공평하다. 불분명하다. 불편하다. 러시아가 늘 탐낸다는 부동항도 [얼지 아니하는 항구]이기 때문에 '부'동항인 것이죠. 비동항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됨. 반면에 비는 다 명사. 그래서 비정상하다라고 하지 않고 비정상[이다]라고 하지요. 비전문가하다라고 하지 않고 비전문가[이다]라고 함. 이런 것도 재밌는 참고가 됩니다. 훈민정음을 읽어보지 아니하신 분들도 그 첫문장은 대충 기억하실 겁니다. "나랏말싸미 듕긕에 달아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할쌔(不相流通)" 대충 이렇게 시작하는데 이때 아니'할'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不]相流通입니다. 비상유통 아님. 근데 이것도 이젠 구분이 좀 모호해지는 추세이긴 합니다. "저 친구 재주가 비상(非常)해"라고 할 때 비상[하다]는 이제 나무랄 데 없이 현대한국어의 일부가 되어버렸죵. 참고로 미(未)는 [아직] 아닌 / [아직] 아니한 것입니다. 미숙하다: 아직 숙련되지 아니하다 (언젠가 숙련됨 ㅇㅇ) 미래: 아직 오지 아니하다 (언젠가 옴 ㅇㅇ) 미래에셋: 아직 오지 아니한 나의 자산 (언젠가 옴 ㅇㅇ) 5. 주간(主幹)/주관(主管) 간(幹)은 일을 맡아서 처리해주는 행위입니다. 오래된 모임에서 제일 귀찮고 짜증나는 행정/연락 업무 따위를 맡은 사람들을 '간사(幹事)'라고 부르지요. 문자 그대로 '일담당'입니다. 한 기업이 주식시장에 새로 상장할 적에 이런저런 귀찮고 짜증나는 일들을 도맡아서 처리해줄 증권사를 찾아서 계약합니다. 이렇게 일을 맡아서 처리해주는 회사를 주간사(主幹社)라고합니다. '주관'은 윗자리에서 일을 통솔하는 뉘앙스가 더 강합니다. 그래서 뒤치닥거리는 '간사'가 하지만 위에서 통솔하는 일은 '관리자'가 하지요. 요즘 경제기사를 보다보면 자꾸 근본없이 상장'주관사'라고 쓴 것들을 보는데.... 증권사들은 고갱님의 일을 맡아서 뒤치닥거리해주는 친구들이니 '주간사'라고 써야 맞습니다. 어딜 고갱님 일을 '주관'하려고 해! 증권사가 상전이야!? 킹치만, 언어는 살아있는 거니까 'ㅅ'; 꼭 저런 규칙들을 하나하나 신경써가며 세상에 맞서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온 세상이 일치단결해서 '시발 주관사야 주관사. 따라해봐 주.관.사.'라고하면 걍 주간사-->주관사 되는 거죠 뭐 ㅋㅋㅋㅋ 다만 이런저런 용법들과 연원들을 알고 있으면 글을 쓰고 교정할 때 도움이 되긴 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거칠었던 문장들을 매끈하게 다듬어주려면 우선 다듬을 곳을 포착하는 예리한 안목이 있어야 하니까요.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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