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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3/31 01:21:42
Name   프렉
Subject   일기 1일.
08:30 기상.

요새 아는 형이 만든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은 재밌는데 내가 못해서 조금 짜증난다.

09:15 출근.

우리 회사는 10시-7시 근무제다. 내가 낮잠이 많아서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 아침은 편의점에서 산 두유 한 병.
사무실 들어가기 전에 다 마시고 출근 찍는다.

09:30 업무시작.

나는 모 스포츠 커뮤니티 운영팀에서 일한다. 현재 우리 사이트는 프로야구 개막에 맞춰서 준비중이다
주력 종목이 야구이기 때문에 야구에 대해 아는 지식은 적지만 인터넷과 잡지식, 책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분석글 비슷한 것을 쓴다.
사이트 오픈 준비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활성화 된 척 하려고 가라 글을 잔뜩 써놓는데 지금 그 작업이 한창 막바지다.
근데 이 회사 이사라는 사람이 나를 참 싫어한다. 대놓고 찍힌 상태다. 일하는 방식부터 뭐뭐 마음에 안든다는 말을 팀장하고 관리자를 통해 전달해왔다.
쉽게 이야기해서 내 위로 결재 라인이 전부 다 나를 싫어한다. 참고로 나는 이 회사 입사한지 두 달 밖에 안됐다.

10:30 업무중.

오늘 첫 글은 한 시간만에 작성했다. 그래도 욕 먹으면서 쓰니까 요령이 붙었는지 술술 써진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우리 사이트가 오픈하고나서 야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우리 운영팀원들이 써놓은 가라 글을 보면 높은 확률로 야알못이네 ㅋㅋㅋㅋ 병신들 ㅋㅋㅋ 이라고 욕할 것이 눈에 선하다. 글 내용 부실하다고 욕하는 건 인정하겠는데 병신이라고 하지는 말아주라. 그 병신짓 할당량 채우려고 애쓰는 중이다.

참고로 결재 라인들이 나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비축분 쌓아놓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쓸려면 그 날 다 쓰지 모아놨다가 다음날 할당량 채우는 식으로 써먹지 말라는 말이었다. 난 그게 왜 잘못된 방식이며 욕을 먹어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만약 비축분 없이 그 날 글을 다 못쓰는 실적 저조하다며 지적할 것이 뻔한데 이번엔 실적을 맞출 수있는 합리적인 방법을 요령이라 말하고 있다. 난 지금도 여전히 비축분을 쓰고 있다. 안 걸리는 선에서, 시간 간격도 일부러 길게 텀을 두고 쓴다. 내가 사내 문화를 해치는 트롤러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준다면 제발로 걸어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11:30 업무중.

스타트업 사무실이 다 그렇지만 건물 한 층에 참 많은 회사들이 있다. 그런데 복도 끝에 위치한 사무실은 높은 확률로 공용 배란다를 끼고 있어 사람들의 수다소리가 정말 잘 들린다. 그게 우리 회사 사무실이다. 우리 회사는 점심을 한 시간 늦게 먹기 때문에 남들 점심먹고 노가리 까는 걸 라이브톡으로 들을 수 있다. 다른 회사 여직원들 끼리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장가는 커녕 연애 근처에도 못가겠다는 확신이 점점 굳어진다. 아마 팀 동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인지 글쓰면서 힐끗힐끗 배란다 쪽을 바라본다.

오후 1:00. 점심시간.

관리자가 일어나면서 입사한지 얼마 안된 직원에게 오늘 뭐 먹을지 메뉴 정해달라고 한다. 아마 사무실에서 제일 사람들끼리 말 많이 하는 시간일 것이다. 평소에는 정말 타자치는 소리 밖에 안들린다. 오죽하면 이사가 회의 시간에 일하면서 이야기 좀 하자고 했을까. 근데 당신 딴 짓하면 업무량 늘리잖아. 오늘 점심은 국수를 먹었다. 싼 맛에 먹었더니 역시 싼 맛이 나는 국수였다.

오후 2:30. 업무중.

가장 위험한 시간대다. 나는 잠이 많다. 잠이 많다는 건 언제든 잘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내 몸은 머리에서 잠을 요구한다. 욕 먹긴 싫다. 회사 탕비실에 더치 커피 병이 있다. 종이컵에 더치 커피 좀 덜어낸 다음에 물을 섞어서 마신다. 원액 그대로 마시는 건 좀 그렇다. 의사가 커피 먹지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근데 이거 안 마시면 키보드에 얼굴 처박을 것 같다. 이 시간대까지 글 네 개 정도 썼다. 앞으로 여섯 개는 채워야한다. 해외 사이트 포스팅 컨셉 배낀 것도 써야한다. 이사 왈, 자기 아는 사람은 하루에 글 수십개씩 쓸 수 있다는데 니들 어떻게 할래라고 물어봤단다. 제발 부탁이니까 그 사람 채용 좀 해달라. 야구 기자 출신이거나 야구 지식의 신이라서 양질의 글을 수십개씩 써주신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평범한 인간의 글 솜씨로는 이제 시즌 전 소재꺼리 다써서 내가 뭘 쓰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인데 그런 사람 들어온다면 웰컴이다. 그런 사람 때문에 나를 짜른다면 순순히 짤려주겠다.

오후 4시.

회의실에서 담배 냄새가 풍겨온다. 이사가 관리자하고 팀장, 그리고 다른 사무실의 관리자를 데리고 들어가서 회의 중이다. 정말 물어보고 싶다. 여기 금연 아닌가? 금연 아냐?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나? 당신은 이사라서 회의실에서 떠들면서 피우고 나머지 직원들은 평직원이라 옥상가서 태워야 하나? 날 갈구는 건 업무를 위해서라고 치자. 팀원들 전부 타자 쳐가면서 가라 글 쓰고 있는데 당신은 그 작업장에 담배 냄새 피워야 되나? 자기 방에는 양키 양초 꽂아다놨다. 그렇게 향으로 덮어놓고 담배 피우면 밖에 냄새 안난다고 생각하나? 진짜 성질난다.

오후 6시.

회의 마치고 나온 관리자가 업무 방향을 바꿨다. 우리 사이트는 야구 선수 프로필 밑에 사이트 유저들 써놓은 분석글이  분석글의 주제가 된 선수에게 자동으로 링크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사가 프로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선수들 프로필에 분석 글이 꽉 채워져있지 않다며 관리자한테 한소리 한 모양이다. 사내 메신저로 이거부터 하자면서 채팅이 올라온다. 급하다고 서두에 붙어있는 걸 보니 정말 뭐라뭐라 한 모양이다. 각자 좋아하는 팀 하나씩 맡아서 선수들 프로필에 올릴만한 분석글을 쓰기 시작했다. 참고로 올해 프로야구는 4월 1일에 개막한다. 이번주 금요일 말이다.

내가 이 회사 입사해서 처음 받았던 업무가 선수 분석글 쓰는 거였는데 갑자기 이사가 들어오더니 MLB 관련 글을 쓰라고 했다. 한창 MLB 글 쓰고 있었을 무렵에 오픈 직전 디자인의 사이트가 만들어졌다며 예전 사이트에 써놓은 글을 옮기라고 했다. 어찌어찌 옮기고나니 개막 얼마 안남았으니까 KBO 글을 쓰라고 한다. 그게 저번 달의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사님의 업무 흐름은 KBO-MLB-다시 KBO다. 몇 몇 이름 알려진 선수들은 분석글이 달려있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도 있다. 관리자의 말로는 최소 개막전 엔트리에 들어있는 선수들은 프로필 분석글이 꽉 채워져 있어야한다고 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올해 프로야구 개막일은 이번주 금요일이다. 31일 새벽 두시 기준으로 내일이다.

오후 7:01

본래라면 다들 퇴근할지말지 눈치보는 시간이다. 나름 열린 오피스 컬처를 지향하는 회사라서 관리자가 자기 멜론 리스트에 들어있는 음악 틀어놓고 일을 한다. 사무실 사람들은 약 한 달 정도 마마무의 넌 is 뭔들이랑 프로듀스 101의 픽 미 업, 그리고 정체불명의 EDM 음악리스트들을 실컷 듣고 있다. 내일 출근하면 그 음악들을 또 들을텐데 몸서리가 쳐진다. 그나마 오늘은 옛날 팝송을 섞어주는 신선한 레퍼토리를 장착했다.

이야기가 샐 뻔했는데 결론이 뭐냐면 관리자가 음악을 꺼야 그게 "아, 우리가 퇴근해도 되겠구나." 라는 사인이다. 요 몇 주 사이에 암묵의 룰 처럼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오늘은 관리자와 팀장이 무슨 약속이 있는지 칼 같이 음악을 끄고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하고 퇴근 찍고 나갔다. 우린 마치 서로에게 신부님이라도 된 것처럼 업무에 관해서 고해성사를 실시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늘 최고로 마음 편하게 서로 이야기 했던 것 같다. 퇴근 찍고 집으로 오는 길에 치킨 한 마리 사서 먹었다. 오늘의 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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