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4/06 00:56:09
Name   프렉
Subject   일기 5회차.
오전 0005

냄비 태워먹은 일, 아니 불을 낼 뻔한 일에 대해 적지 않은 생각을 했다.
슬슬 피곤해졌다. 몇 시간 뒤엔 출근해야했다. 잠을 청했다. 근데 잠이 안온다.
할 수 없이 옆에 있던 맛폰을 켜서 유튜브로 동영상을 몇 편 봤다. 슬슬 눈이 감긴다. 잤다.

오전 0630

옆 집에서 갑자기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옆 집 아저씨가 출근할 모양이다.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시는 걸 소리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벽 사이가 얇다. 어쨌든. 일찍 나가시는 소리에 눈에 떠진 모양이다.
창문을 보니 퍼런 빛이 들어오고 있다. 시간을 보니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다. 잠을 청했다.

오전 0810

멍하니 일어났다. 부엌으로 무심코 눈이 갔는데 갈색으로 산화한 냄비가 햇빛을 반사하며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보일러를 켜고 물을 덥혔다. 5분 뒤에 샤워를 시작했다.
나와서 수건으로 닦고, 머리 말리고, 얼굴에 스킨로션 바르고 옷 입으니 출근 준비 끝. 근데 아직 시간이 남았다.

오전 0930

집에서 마지막으로 잉여짓을 하다가 사무실 나와서 출근을 찍으니 딱 저 시각이었다.
사무실엔 직원 둘이서 글을 이미 쓰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며 아침 환담을 했다. 주제는 MLB 첫 안타친 박뱅이었다.

하... 병호야 행복해야해. X크보의 막장팀 X넥센의 꼬라지는 내가 지켜보고 있을게..........

오전 1102

팀장이 메신저로 나를 따로 호출했다. 드디어 짤리는구나 하고 속으로 애써 기쁨을 억눌렀다.
하지만 들어가서 들은 이야기는 나를 실망시켰다. 시킬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난 누가 나에게 "커뮤니티 사이트 프론트 페이지에 절대 하지 말아야할 짓이 뭘까요?" 라고 물으면 단언컨데 '라이브채팅'이라고 대답하겠다.
갖은 욕설과 수모, 패드립, 해킹, 음란채팅, 주기적인 광고 메세지. 사이트를 싼 티나게 만드는 1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샌 수익도 잘 안난다!
그런데 그 고돔과 소모라 같은 하얀바탕의 기능이 우리 커뮤니티 사이트 프론트에 달려있다. 심지어 이거 데이터 손보면 자동으로 채팅한다.

그 데이터를 손보라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동 채팅에 들어갈 내용을 생각해서 자유롭게 입력해달라는 것이었다.
글은 안써도 되니 하루 종일 이 일에 매달리라는 지시였다. 얼핏 들으면 편해보였지만 사실 글은 할당량만 채우면 되는데 반해
이 데이터 작업은 근무가 땡하고 끝나는 순간까지 매달려야하는 손가락 노가다였기 때문이다. 까라면 까야지. 알겠습니다. 대답했다.

오후 0012

오늘의 점심 메뉴는 제육덮밥. 관리자를 따라 들어온 새로 생긴 고깃집에서는 이런 점심메뉴를 팔고 있었다.
국 나오고 반찬 나오고 고기 나오고.. 제육 시리즈 싫어하는 자취생은 드물거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머리에 스치는게 있었다. 아무도 말을 안해서 몰랐는데 얼마 전에 입사한 신입 남직원이 출근을 안했다.
관리자한테 물어보니까 쓴 웃음을 지으면서 "XX씨는 집에 우환이 있어서 급히 퇴사하시고 고향으로 갔어요." 라고 대답한다.

내 심정이 어땠냐고?


집에 우환이 생긴 것 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기껏 근처에 월세까지 얻은지 한 달도 안되서 급히 방빼고 퇴사했다고??
답은 하나였다. 이 신입사원은 자기 회사가 비전도 없는데다 경력에 도움도 안되는 곳이라는 걸 빠르게 눈치 깐 것이다.
그리고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덕분에 나는 사표 던질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신입사원보다 판단이 늦다니 참으로 창피했다.

직원들도 애써 티는 안냈지만 이 친구가 관둔 이유를 다들 마음 속으로 공감하는 느낌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회사는 창업한지 석 달 된 회사다.

오후 0207

아....... 의식이 멀어져 간다. 좌뇌 우뇌 분리시켜서 서로 말 걸게한 내용을 엑셀에 옮겨적는 일은 너무너무 피곤하다.
대강 700여개 쓴 거 같다. 적은 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팀장오면 대강 이야기해서 마무리하고 글이나 적으려고 했다.
마침 팀장이 뭘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온다. 휴대용 선풍기다. 곧 더워지니까 이걸로 더위를 식히라는 모양이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이만큼 했다고 이야기하니까 ????? 하고 의문 부호를 띄운다. 양이 적다는 말이다.
조심스럽게 이 작업을 먼저했던 다른 직원들한테 메신저로 따로 물어보니 다들 기 천개씩은 적은 모양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작업을 천 개씩이나 하지?? 무당파 양심분리공을 십성수련하셨나??
누적된 내용을 보려고 스크롤을 위 쪽으로 땡겨보니 진짜 초딩이나 할 법한 채팅내용들이 보였다. ㅋ나 ㅎ 한자만 적도 넘긴 것도 많았다.
팀장 왈 내용 별로 안 중요하니 대강대강 적어서 양을 늘리세요.

오후 0655

그 뒤에는 분노에 몸을 맡긴 채로 미친듯이 초딩 채팅을 적어갔다. 대세를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급식체도 잊지 않았다.
내 노력ㅇㅈ? 어 ㅇㅈ 팀장 : ㅇㅈ합니다. 5분 뒤에 업무보고 올리고 퇴근 찍고 나왔다. 앙 기무띠.

오후 0830

브라우저 켜놓고 한참 잉여짓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다. 통신판매는 아닌데.. 전화를 받았다.
젊은 남자 목소리였는데 지하주차장에 주차해놓은 내 차 범퍼를 살짝 긁었다며 전화를 했다.
양심적인 사람 아닌가. 내 차는 소형차라서 그냥 무시하고 갈 법도 했는데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와서 차 한 번 보셔야지 않느냐며 미안함을 표시해왔다. 근데 결정적으로 내가 무지하게 귀찮았다.
난 가다듬은 목소리로 지금 출장나와 있어서 확인이 어렵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번호를 저장한 뒤에 사진에 내 차 범퍼를 찍어 보내달라했다.
얼마 후 사진이 왔다. 보아하니 오른쪽 헤드라이트 아랫부분이 살짝 벗겨져 있었다. 내일 확인하고 전화하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보험처리 말만 들었지 어떻게 신청하는지 모른다. 저 사람이 해줘야하는건가 내가 불러야하는건가.

오후 2341

야구도 다 봤다. 할 일이 없다. 이빨 닦고 다시 잉여짓에 몰두한다.

오전 0056

일기를 쓴다. 다 썼다. 오늘의 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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