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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4/08 01:08:37 |
Name | 커피최고 |
Subject | 종교, 도덕적 결벽증의 저항 |
함석헌평화연구소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계시는 김대식 선생님께서 작성하신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인데, 현대문명의 기술을 거부하시면서 살아가시는 분이라... 그래서 허락받고 홍차넷에 공유합니다. 다른 분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싶기도 하네요. ===== <종교, 도덕적 결벽증의 저항-번스타인과 사르트르의 논리를 중심으로> 왜 우리는 같은 종교인이면서 다른 비종교인이 혹은 심지어 종교인이 실수나 죄책이나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 격한 분노를 표현하며 비판하는가?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적어도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다’, 라는 자신감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믿는 신 앞에서 나는 당당하다고 믿기 때문인가?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죄인이라고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신앙의 자세를 언급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어보지 못했는가?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무한한 용서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조차도 무한한 용서와 관용, 그리고 관대함을 실천하셨는데 왜 용서를 해야 할 인간이 같은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모진 비난과 비판을 쏟아내는 것일까? 그럴 경우 마치 그가 희생양이라도 된 듯이 그를 비판의 도마 위에다 올려놓고 심할 정도로 난도질을 한다. 그에 대해서 본질 환원을 거쳐서 순수 의식과 순수 자아를 통해서 그 사태를 잘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나의 일이 아닌 듯이 쉽게 말을 쏟아내곤 한다. 그것이 객관적인 분석과 통찰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도 주관적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유명한 <지각의 현상학>을 쓴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말이다. 사람과 사태를 부분만 보고 전체를 판단한다는 얘기인데, 현상학적인 환원을 통해서 전체를 읽어내는 훈련이 된 사람이 아니라면 사실 우리는 본질을 호도하고 있을 수 있다. 종교적이 된다고 해서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도덕적이 된다고 하는 것이 종교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보편적인 판단일 것이다. 도덕의 외연이 종교의 외연보다 더 넓은 것이다. 그러나 흔히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관이나 신앙관으로 타자를 판단한다. 자신의 종교적 관념이나 신념이 절대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번스타인(Richard J. Bernstein)은 “종교적 신앙이 선과 악을 알기 위한 충분한 기초라고 무비판적으로 가정한다면, 이는 세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모독하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적 진술들의 정당화는 우리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우리의 도덕-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종교적 양육을 통해 배울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우리의 도덕에 대한 정당화가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앞서 칸트는 “도덕은 그 자체로 종교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실천이성에 의해서 자기 충족적이다”라고 단언하였다. 우리는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종교생활을 하면서 과도한 반복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도덕적 강박증, 혹은 도덕적 결벽증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다. 그것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절대화해서 말이다. 계속해서 리처드 번스타인은 “우리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자신의 도덕적 확실성에 분명하고도 단일한 정당화를 제시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호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덕적 정당성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지 특수한 종교의 신념 체계에 따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종교도 가류주의(fallibilism), 즉 절대적이고 교정이 필요 없는 지식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종교인 자신도 가류주의적 회의주의(fallibilistic skepticism)에 시선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 항상 옳다, 혹은 종교적 신념만이 타자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도덕적 규범으로 작용한다는 지나친 확신은 심리적 상처를 주며 인신공격과 테러까지도 불사하게 된다. 그래서 리처드 번스타인은 “우리는 종교적 신앙과 이데올로기적 광신주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광신주의가 나타날 때마다-그것이 종교적인 형태를 보이든 아니면 비종교적인 형태를 보이든 상관없이-그것에 열정적으로 맞서야 한다. 우리는 적을 악마화하고, 잘못된 이분법을 강요하면서 복잡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며, 확실성에 대한 허울 좋은 주장을 하고, 비판적 사고를 훼손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악의 남용에 열렬히 반대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타자를 사적이든 아니면 공적이든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 자신이 타자를 악마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 저의에는 올바른 신앙관보다는 이데올로기화 되어 있는 종교적 신념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타자는 악이 되고, 그 반대편에 적어도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자신은 선이 되는 이분도식의 인식이 타자를 몰아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거듭 번스타인이 말하고 있듯이, “주관적인 도덕적인 확신(subjective moral certitude)이 추정된 객관적 도덕적 확실성(objective moral certainty)으로 치달아 내려가는 오류의 비탈길”적 사유인 셈이다. “정말 위험한 것은 악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모랄의 내용은 변할 수 있지만 그 모랄의 일정한 형태는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편성과 형식주의는 그 도덕성을 담아내기 위한 철학적, 종교적 장치이다. 그렇다면 종교에서 그 보편성과 형식주의의 기초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사랑과 용서와 관용이다. 타자의 어떠한 사태와 행위가 발생된다고 하더라도 용서와 관용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는 그 평가와 비판은 자못 신중할 수밖에 없다. 타자가 잘못이나 오류,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나도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러한 한계를 가진 인간이다, 나도 그렇게 취급을 당할 수 있는 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험을 하지 않은 이들의 이론과 실천적 한계는 사변에서 그치거나 남의 일로 여기는 데서 드러난다. 도덕적 절대주의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종교적 신념을 가장하여 마치 자신이 신의 대리자인 양 타자를 재단하는 종교적인 도덕적 절대주의자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판단 작용(judging)은 타인들과 세상 공유하기(sharing-the-world-with-others)를 실현시켜 주는 중요한 활동이다... 판단 작용은 우리가 “모든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끔” 해주는 “확장된 멘탈리티”(enlarged mentality)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제는 종교인의 멘탈리티, 즉 정신이나 마음이 타자에게 얼마나 열려있느냐가 관건이다. 타자에게 무한히 확장된 멘탈리티는 가능한 한 타자에 대한 평가, 판단, 재단, 비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가능하다. 자유롭다는 것은 언제든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여지가 있음을 말한다. 내가 타자에 대해서 온당한 평가를 하려면 도덕적 결벽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되레 도덕적 결벽증과 강박증을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종교 본연의 모습이다. 깨끗하고 숭고하려고 하면 할수록 배타적이고 이분법적인 인간, 이분법적인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는 “앙가주망이 생기자마자 나는 나의 자유와 동시에 타인의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내가 또한 타인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아야만 나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타자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어느 누구로부터도 판단이나 비판, 그리고 비난을 받지 않을 권리와 자유를 가진 것처럼 타자 역시 나와 똑같은 목적적 존재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쯤해서 함석헌의 말을 새겨야 할 것 같다. 그는 “사회악과 싸우기 위해 우리의 겨누어야 할 목표는 둘이다. 하느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느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에 와 있다... 하느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민중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말일 터인데, 민중, 곧 타자에 대한 판단작용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 타자에 대한 도덕적 비판과 판단이다. 그러기 전에 타자의 안타까운 심정과 현실이 하느님의 고통이라고 생각해보면 안 되는 것일까? 설령 그것이 내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언제 단 한 번이라도 타자와 공유된 세계가 다 파악된 적이 있었던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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