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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5/24 11:25:46 |
Name | 당근매니아 |
Subject | Do WOMAD dream of electric amazones? |
0. 들어가며 가입하자마자 올리는 첫 글이 이런 글이라 송구스럽습니다. 최근 공부하는 게 있어서 엔간한 커뮤니티들을 다 정리하고 최대한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번 건은 머릿속이 유난히 복잡해져서 방해가 되더군요. 그래서 외부기억장치에 쏟아낸 뒤에야 좀 조용해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하 평어체로 진행되는 점 양해 바랍니다. 1. 중식이밴드. 나는 중식이밴드를 좋아한다. TV 자체를 보지 않고 집에 케이블도 달지 않은 데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질려서, 슈스케 나올 때는 사실 관심도 없었다. 듣는 팟캐스트에서 중식이밴드의 음악을 처음 접하고 디지털 싱글들을 사서 모았다. 싱글이 발매되지 않은 곡들은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다. 중식이밴드는 요절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 이진원의 대체재로 작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난 그 끝이 같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고, 여전히 바라고 있다. 때문에 지난 총선에 중식이밴드가 정의당과 테마곡 파트너로 등장했을 때 내심 기대가 컸다. 이 기회를 타고 조금 더 편안하게 음악할 수 있는 환경이 그네들에게 조성되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다들 아는 바와 같다. 중식이는 사과문을 올렸고 그 사과문은 다시금 비판 받았다. 이 글은 애초에 중식이밴드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한 글이다. 다만 시험이 끝난 뒤로 작성을 미뤄놓았던 것이, 이제 그러지 못하게 되어 지금 키보드를 놀리고 있다. 글감이 모이면 머릿속에서 글감들은 서로 패를 지어 악다구니를 하고, 그걸 외부 기억 장치에 쏟아내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해왔다. 다른 펜시브들을 모두 사용하지 못하게 스스로 제약을 건 탓에 이 곳에 남기게 된다. 2. 연민과 분노의 차이. 내가 고민 없이 비난과 분노를 쏟아내는 대상이 몇가지 있다. 창조론자, 알바 돈 떼먹는 사업주, 일베 스타일 현대사 인식을 가진 작자들, 환빠 등등. 반면에 앞에서 말한 이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행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아닌 연민을 느끼게 되는 이들 또한 존재한다. 모태 천주교의 중1짜리 창조론자, 돈을 떼어먹히는 알바, 자신이 표를 던지는 당이 나라를 부강케 해주리라 믿는 노인들. 그리고 중식이. 이들은 사실 전부 다른 층위에서 불쌍하거나 한심하다. 3. 구분의 기준. 나는 이들을 대강 세 가지로 구분하고, 그에 따라 기준을 달리 적용한다. 우선 창조론과 일베식 역사관 혹은 환단고기에 심취한 이들은 공교육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이들이다. 이 사회는 분명히 해당 사안에 대한 공인된 사실들을 교육 서비스의 일환으로 제공했고, 해당 교육은 경우에 따라 자신이 해당 사안에 대한 의구심이 생길 때 그 의심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의 제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책임은 국가 시스템에서 개인으로 옮아간다. 때문에 나는 성당에서 배운 이론을 소중히 하는 중1 짜리 창조론자를 비난하지 않는다. 현행 교육과정 상 진화의 아이디어를 처음 배우는 것은 중학교 3학년 2학기이고, 아직 그 코스를 밟지 않은 이에게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두번째는 입법권의 위임에 의해 책임 지워진 경우다. 언론에서 매일 같이 역대 최악의 식물국회였다는 둥 매도하는 19대 국회가 사실 반영 법안 수는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것을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렇게 반영된 법안 발의안 수가 4년 간 7441건이다. 우리는 당연히 그 세부를 전부 알지 못한다. 그건 의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통과된 법률에 따라 행동할 의무를 진다. 투표권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우리는 의원들에게 입법의 권한을 위임했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본 적도 없는 법안을 '이미 본 것으로 간주'된다. 그걸 법학에서는 '법에 대한 무지는 용서 받지 못한다' 라고 표현한다. 그러니 나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지 않는 사업주를 비난한다. 또한 무지로 인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안타까워 한다. 여기서의 기준은 법이 책임을 지우는지, 그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여부가 된다. 이러한 사안에 두번째 기준이 적용되는 까닭은 공교육에서 노동법이나 민법 등의 생활법률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사회의 인식 구조 그 자체를 만지작거리는 케이스들이다. 종교 단체 등을 나는 여기로 분류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지나치게 길어지고 이번 논의와 직접 연관되는 것이 없어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생략코자 한다. 3.1. '여혐'은 그 중 어디로 분류되는가. 자 그러면 '여혐'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분류되어야 하는가. 생각해보면 딱히 개념을 그렇게 협소화할 필요도 없다. PC, 정치적 올바름 전체로 이야기를 확대해보자. 우선 첫번째 기준인 '공교육 제공 여부'를 따져보자. 우리의 공교육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주기 위한 시스템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며, 그 정도는 개인에게 해당 정보의 미습득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에 상당한 수준인가?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현행 교육과정 상 사람마다 답이 다르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12년 간 경험한 한국 공교육은 PC에 대해 제대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물론 입시학원에서 이런 것들을 가르칠 가능성도 만무하다. 그러면 이번에는 두번째 기준인 '법률 제정 여부'다. 우리 형법은 혐오 발언에 대한 제재를 규정하지 않으며,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를 한정적으로 적용하여 이를 해결할 뿐이다. 해당 비위행위들을 형법의 대상으로 규율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고라도, 현행 체계 내에서 불특정다수 집단에 대한 혐오 혹은 비난 혹은 명예훼손적 발언 등 PC에 관련된 내용들은 대개 그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니 이를 통한 비난 가능성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3.2. 중식이와 최규석. 그러니 나는 중식이와 최규석을 함부로 재단하여 비난하기 어렵다. 중식이는 사과문에서 자신의 무지를 밝힌다. '아예 그런 쪽의 이슈를 생각해본 경험 자체가 없었다. 나는 여자친구도 좋아하고, 엄마도 좋아하고, 누나도 좋아한다. 여성을 비하하는 의도를 가지고 곡을 쓴 적이 없다.' 물뚝심송은 직썰에 기고한 글에서 중식이밴드의 곡을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 비교한다. 김지운은 살인이 범죄임을 이미 알고 살인마에 대한 비판을 위해 작품을 만든 반면, 중식이는 잘못된 것을 애초부터 모르고 서사를 꾸려 나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차별적 요소는 사회 곳곳에 잔재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러한 성차별의 철폐를 외치는 '미러링 단체'가 잘못된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기득권인 측에서 받아들이고 연대하여 고쳐나가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서 물뚝심송이 이 사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분명한 한계점을 본다. 중식이는 자신의 무지에 기인하여 그에게 쏟아진 정말 무수한 양의 비난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다 해야 하는 개인이었는가. 물뚝심송은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기득권 입장에서 중식이밴드를 옹호하는 이들이 조금 폭력적인 언어로 비판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묻는다. 이건 그냥 옹호하는 자를 옹호하기 위한 '실더'의 논리에 불과하다. 이는 최규석의 국민대 단톡방 관련 트윗 사건에서도 비슷하게 발생한다. '송곳 같은 작품 그린 사람이 이러한 부분의 PC에 대해 이렇게 감성이 무뎌서야 되냐' 혹은 '자칭 좌파가 그래서 쓰냐'는 류의 비판을 많이 보았다. 그럼 역으로 묻자. 최규석에게 그러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당신은 자신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진보 진영' 내 다른 분야의 이슈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각자의 전선에서 각자 싸우고 있고, 이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공계 대학원의 연구원들에게 바로 옆 방에서 연구 중인 주제에 대해 물어보면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또한 결국은 교육과 입법의 문제이다. PC의 정착은 최종적으로 해당 분야의 PC에 대해 '어느 정도 범위까지 공교육에서 당연 제공할 것인가', 혹은 '어떠한 범위까지 법률로서 규율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개인에게 온전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위와 같은 로직을 밟지 않는다고 해도, 사회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부당한가 공평한가에 대한 직관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득과 교육 대신 비난이 가해질 경우, 그 감정은 납득이나 교화보다는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 빠르고 쉽다. 그렇기 때문에 '잠재적 가해자'라는 워딩은 조금도 영리하지 못하다. 또한 그로 인해 나는 질문하게 된다. 현재 '언냐'들의 행동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3.1.1 '언냐' 사실 이 글의 대상을 누구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지, 그들을 무엇으로 지칭해야 할 지 고민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중식이밴드 건에서 시작했던 글이고 메갈리아와 워마드 성향의 이른바 '급진파'들을 상대로 쓰고자 마음 먹었으나, 이번 사건이 터지고 주류 여성 단체들의 대응을 보며 내가 무슨 기준을 가지고 그들을 구분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커뮤니티나 단체의 이름을 빌어 그들을 규정하고 일체화된 객체로 지칭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선택한 호칭이나, 여기에 일종의 비하의 의미가 녹아 있을 수 있음을 안다. 적절한 단어가 있다면 수정할 용의가 있다. 덧붙이자면 이 나라에서 여성들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통이 있고 불이익이 상당한 것을 '안다'. 나는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아니고,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결국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한 한계를 전제하고 써내려 가는 글줄이다. 모든 사안에서 다수 그룹에 속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안에서 소수 그룹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4. 대중운동의 대전제. 위에서 굳이 공교육과 입법의 문제로 이야기를 구분해놓았지만, 공교육은 사실 국가 권력에 좌지우지되는 것이라 결국에는 모두 같은 문제가 된다. 다만 후자가 오로지 입법부의 선출과 연관되어 있다면, 전자는 행정부의 선출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 차이가 된다. 헌법 제1조에 의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그 주권은 국민에게 속하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현실화를 위해 헌법 제41조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를 통한 국회 구성을 말하고, 제67조는 대통령 선출에 마찬가지 기준을 둔다. 다시 말해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루트는 모두 공직 선거의 승리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는 방안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그 모든 선거는 '평등' 선거를 원칙으로 한다. 우리는 벌이의 수준, 성별, 나이, 교육 받은 정도, 거주 지역, 인종 등의 차별 없이 모두 1인이 각자 1표를 행사하게 되어 있다. 아군을 증편하고 상대를 와해시켜, 여론과 쪽수의 승리를 통한 방법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언냐'들이 택한 방법이 매우 승리에서 멀고도 먼 길이라는 점을 지적코자 한다. 굳이 인구통계학적 보정을 거치지 않고 보아도 이는 명확하다. 2016년 4월 현재 대한민국 총 인구 중 49.98%는 남자다. 다시 말해 어느 한쪽 성별을 아예 버리고 시작하는 대중운동의 확장성은 기껏해야 50.02%가 한계점으로 미리 규정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뛰어난 공감 능력을 지닌 탈씹치남'이 얼마 존재한다고 해도 이 구도 자체가 뒤집히지는 않는다. 시작부터 이미 패배해 있는 싸움이 비장함으로 포장될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4.1. 킹과 X. 잠시 흑인 인권 운동 이야기를 해보자. 정확히는 말콤X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 사태의 초창기 양상부터, 혹은 그 이전의 맥락에서부터 나는 '언냐'들에게 말콤X를 자주 겹쳐 보았다. 말콤X는 흑인의 거주 분리 또는 아프리카로의 귀환을 주장했고, 백인들의 도움을 완전히 거부할 것이라 했으며, 백인 일반을 악마이자 적으로 규정하고, 킹의 흑백통합노선 인권 운동을 백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말콤X는 흑인에게 도움이 된 백인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히틀러와 스탈린을 말했고, '백인이 흑인에게 나를 증오하는가 라고 묻는 것은 강간범이 강간당한 사람에게, 또는 늑대가 양에게 나를 증오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우리의 선조가 못된 뱀에게 물렸고 나 자신도 사악한 뱀에게 물려서 내 아이에게 뱀에게 물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데, 바로 그 뱀이란 놈이 나더러 증오를 가르치는 자라고 비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말했다. 나는 말콤X를 매우 흥미로운 인물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애정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저러한 방식의 운동 전개가 가지고 있는 한계점 역시 같이 안다. 말콤X의 연대기적 영화 마지막 장면에는 만델라가 학생들에게 말콤X에 대해 교사로서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만델라는 늑대의 무리가 양을 사냥했던 것을 '잊지 않되 용서하는', 혹은 '용서하되 잊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킹과 만델라 역시 모든 지점에서 완벽하게 옳은 선택만을 골라나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나는 그 둘의 한계점 또한 알고 있다. 다만 이러한 부족한 부분들은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던 무지에 기인한 것이다. 조지 오웰이 쓴 사설이나 수필, 러브크래프트가 남긴 소설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이 듬뿍 담겨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이는 같은 시대를 영위한 코난 도일 등 다른 작가들에게도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 문장들을 자아냈을 거라 생각지 않는다. 그저 무지에 기초한 선의였을 따름일 것이다. 세종조차 지금의 기준에 대응시킨다면 독재 전제 군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지의 소치였음을 안다면, 거기에서 교훈을 찾아 개선하는 것이 매일 800칼로리를 뇌에서 태우는 인간 된 도리다. 4.2. 군 인권 운동. 그러한 저변 확대의 측면에서 볼 때 군 인권 운동의 역사는 참고할 만 하다. 특히 러시아의 '병사들의 어머니회'는 그 전형이라 할 법 하다. 러시아의 운동가들은 러시아군 내의 가혹행위에 대항하되, 그 '피해자의 범위'를 가혹행위와 학대의 직접 피해자로 규정 짓지 않았다. 가혹행위를 당하고 때때로 죽어나가는 병사들은 병사인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며, 누군가의 형제였다. 광범위한 세력 확장은 지지가 기대되는 최대한의 인력풀을 확보하고 그에 걸맞는 전략을 수립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피해자 그룹을 규정 짓고, 그 외부의 인원이 뻗어오는 도움의 손길을 뿌리쳐 버리는 것은 대중운동의 전개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 할 것이다. 병사들의 어머니회는 인식의 변화를 통한 극적인 저변의 확대를 통해 그 세를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불렸다. 그리고 그 국제적 명성으로 인해 반 독재 국가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나라에서, 정부의 콧털을 뽑아대면서도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 5. 군. 이왕 군대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술만 들어갔다 하면 군대 이야기를 꺼내는 '남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흔히 웃음거리가 된다. 그 반복적인 양태가 사회 전반적으로 얼마나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이면 그토록 넓은 공감대를 얻는 소재가 될 수 있을지를 잠시 생각한다. 그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문득 슬픔과 연민을 느낀다. 나는 그 현상이 집단적 트라우마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종종 '입소하는 꿈'을 꾸는 천만에 가까운 인원들은 공통의 트라우마틱 이벤트를 거친 인간 집단을 형성하고, 이 사회에서 그 사실은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비슷한 양상의 문제에 대한 발화를 요 일주일 간 익히 전해들었다. 이번 사건에 부쳐 '살아男았다' 같은 문구들이 밈이 된 모양이나, 군대에서의 죽음은 일상적이다. 매주 갱신되어 배포되는 사건사고사례 문서에서 죽음이 빠져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거의 매주 사람은 죽고, 때로는 심각한 부상을 당한다. 지인은 자신과 친했던 부사관이 감전사고로 인해 양팔을 절단하게 된 일을 옆에서 보았다. 당장 내 경우에는 부대에서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되어 관리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2012년 현재 해군 나진영 이병은 98년 의문사 이후로 14년을 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냉동고에 보관 중이었고, 이런 식으로 보관 중인 사체만 30구가 넘었다. 그 몸뚱이 자체가 의문사 사건의 유일한 증거품이기에 가족들은 그네들을 차마 장사 지내지 못했다. 나는 2년 간 살아男았지만, 그들은 살아男지 못했다. 2015년 '평시 비전투손실'은 56명이었다. 국방부는 사상 최저라며 보도자료를 뿌렸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해서 '여성 일반' 혹은 '미필자 일반'을 상대로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된 대상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된다. 군 문제에 대한 공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법률 상 의무 또한 없다. 때문에 비난 가능성은 조각된다. 우리는 각자의 전선에 서서 각자의 싸움을 하고, 바로 옆 벙커에서 무얼하는지 신경 쓰기에는 당장 탄창을 가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연대하거나 지원을 요청하고, 그를 통해 조금 더 살기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할 수 있을 뿐이다. 5.1. 사죄의 요구. 그러니 우리가 서로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된다. 지난 번 포탄이 당신의 토치카 옆에 떨어졌다면, 이번에는 내가 숨어든 엄폐물 앞에 떨어졌을 뿐이다. 우리는 각자에게 얼마나 가까운 문제인가에 따라 사안의 중대성을 상정하고, 자원 배분의 정도를 결정한다.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타자화를 중단하라'라는 문장은 타자화를 배격하며, 동시에 스스로 타자화를 일삼는다. 6. 진보 타래. 절차적 민주주의, 인권(+LGBT), 노동(경제정의), 여성, 환경, 장애인, 통일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내가 진보 진영의 구성을 파악하는 방식은 대강 이러하다. 최규석을 이야기하면서 잠시 언급했으나 흔히 말하는 진보 진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 상이하고, 이 조합의 완성은 기초하고 있는 철학이나 학문적 근간의 유사성이 아니라 단순한 우연이나 정치공학적 흐름의 결과 형성된 바가 적지 않다. 예컨대 절차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들이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는 것은, 한국 보수라는 이들이 전제주의 혹은 전체주의 수준의 정치 체제를 옹호하는 탓에 생긴 기형적 현상일 것이다. 정책 기조만 놓고 보았을 때 '진보'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운 노무현 정권이 진보 진영의 상징이 되어있는 것은 그러한 연유이다. 나는 이 타래 중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와 기회가 있을 때 응원하는 분야, 그렇지 않은 분야를 구분한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추구와 경제정의를 포함하는 노동계 안건들에 관심을 가지고 살피며, 장애인과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나마, 혹은 시위 머릿수라도 채워주고 인터넷에서 쌈박질이라도 대신 해주는 식으로 나름의 응원을 보낸다. 나머지 분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관심의 부재와 제반 지식의 부족이 서로 꼬리를 무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더 큰 이유는 저 운동을 이끌어 나가는 단체나 인물들에 대한 반감이 주원인이 아닐까 한다. 환경단체들이 동강이나 설악산 케이블카 등에 대해 싸우는 것에는 응원을 보낸다. 그러나 GMO 등의 이슈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결코 찬동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미세 플라스틱 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고, 그 이전에는 광우병이 있었다. 학부 수준의 생물학 공부로도 반박될 수 있는 주장을 해당 분야의 대표격이라는 단체들이 휘두르는 이유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여성단체들이 이번 일과 같은 사건들을 다루는 방식, 혹은 자체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그다지 찬동하기 어렵다. '여성 상담은 일반적인 심리 상담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라는 말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상담은', 혹은 '유색인종 상담은' 같은 이야기와 무엇이 다를 수 있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는 상담 공부 십 수년을 하고 현업 종사자로 뛰고 계신 어머니의 의견이기도 하다. 정말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남성중심문화와 사회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 책임자라고 일컫는 남성들에 대한 포섭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오롯한 상향식 변화를 꿈꾸는 것인지 모르나, 더 효과적인 길을 아예 버리고 시작하는 것은 흔히 아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제 민우회의 트윗을 보고 나는 한참을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다른 여성단체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을 접할 때 나는 워마드 같은 인적 집단과 주류 여성단체들의 거리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제반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프레임을 짜고 그 안으로 다이브 해버리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다. 설령 그러한 프레이밍이 자신들이 그간 추구해오던 방향의 정책 수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더라도, 편법의 활용은 언제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 6.1. 선택과 집중, 그리고 설득논리의 개발. 내가 관심 분야를 한정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도 있지만, 동시에 물리적인 문제도 있다. 모든 분야에 안테나를 꽂고 개개의 사안에 대해 매번 PC warrior를 자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안건들에 대해 매번 적절한 양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도 어려운 일이고, 그렇다고 해도 설익은 인스턴트식 내용을 기반으로 언쟁을 벌이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다. 이건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니 자신이 전문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분야에 대해, 같은 진영의 다른 분야 관심 있는 이들을 원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는 것은 중요하다. 반대로 말해, 설득력 높은 논리 체계를 개발하지 못한 채 증원을 바라는 것은 염치 없는 짓이다. 물론 '언냐'들 중 상당수가 사타구니의 살덩이 존부로 지원군의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알고 있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 관심 사안 안에서나 사회 참여하고, 내 주변 사람들한테나 공정하게 굴고자 하는 노력 뿐이다. 6.2. 진영주의 언론 그런 맥락에서 진보주의 언론들, 혹은 독자적인 언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에 실망할 때가 많다. 중요한 건 내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주장을 한 사람이 비도덕적이라고 해서 혹은 특정한 집단에 속해있다고 해고 그 사람의 주장이 틀렸다는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하려면 그 주장 자체가 틀린 것임을 증명해야 한다.' 인신공격의 오류에 관한 스티븐 J 굴드의 말이다. 코끼리맨 사건을 대하는 그네들의 태도는 여기에서 얼마나 구분될 수 있는가. 7. Do WOMAD dream of electric amazones? 글 쓰는 내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정치세력화 된 집단의 목표를 추구하는 수단의 문제였다. 예컨대 킹과 말콤X의 최종적인 목표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말콤X는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운동과 킹 목사의 비폭력 운동은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목표는 항상 같다. 그 목표는 백인이 무방비상태의 흑인에게 저지르는 만행과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다. 이 나라의 이런 풍토에서, 흑인 문제에 대한 '두 극단적 접근방식'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 즉, '비폭력'의 킹 목사인지, 이른바 '폭력적'이라는 나인지는 -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이제 궁금해지는 것은 '언냐'들이 최종적으로 바라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근래의 여성주의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것은, '강자의 폭력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자의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시스템은 유지되기만 해도 강자의 편이 된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전혀 가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받아들인 뒤, 그 무저항을 해소하기 위해 무얼하길 바라는가 하는 점이다. 일상에서의 공정함? 그걸로 충분한가. 그건 '시스템에 대항하지 않아서 문제'였던 과거에 비해 얼마나 다른 행동양식인가.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친애를 가지는 것은 목표가 아니며, 그저 최종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도구와 경로에 불과하다. 최종 목표로서 '공감'을 요구하는 것은 공허한 말이다. 그건 다르게 읽어 '무작정 내 편을 들어달라'라는 강요에 지나지 않기 쉽다. 아니면 한겨레 등이 말하듯이 스스로를 잠재적 가해자, 혹은 잠재적 흉기로서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목표되어야 하는가? 그 내용이 과연 PC한가 하는 질문은 제쳐두고라도, 그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언냐'들이 말하듯 '재기'하면 되는 것인가. '내가 공포를 느끼니 너희가 알아서 조심해달라'라는 말은 다시금 상대를 타자화한다. 인도를 침범한 자동차에 치인 경험이 있는 이가 자동차에 대해 공포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자동차가 그런 이들을 알아서 피해 다녀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인도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키는 것만으로 운전자들의 의무는 달성된다. 사고 운전자가 아닌 다른 운전자들을 싸잡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으로 화하지도 못한다. 도로 체계가 보행자보다 자동차에 지나치게 초점이 쏠려 있다면 그것은 도로교통법을 개정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자동차 운전자들의 각성과 공감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규칙으로 정해진 경계선을 넘지 않은 이상, 인도에 가까이 붙어 주행했다고 해서 보행자들에게 그 차를 마구 긁어댈 권리가 생기는 것은 더더욱 아닐 터이다. 다수의 차들이 운전을 개판으로 하고 개선의 여지가 없어서 싸잡아 욕먹을 만 하다고 하자. 최소한 운전자들은 차에서 내려 같이 걸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어슐러 K 르 귄이 자신의 SF 소설에서 자주 하던 식의 실험적인 사회 실험으로서, 현대의 아마존이 구축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한다. 이는 말콤X의 흑인 자치거주구역을 연상케하는 면도 있다. 다만 흑인 자치거주구역은 세대를 이어갈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갓양남을 운운할 거라면 글쎄... 예일대 사교클럽을 떠올리게 된다. 7.1. 파토스의 극복 예전에 서강대 총학회장을 했던 고명우 씨가 대자보 무단 폐기 사건 당시 쓴 글을 종종 찾아읽는다. 거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xxx씨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대자보, 그런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동아리들, 싸고 몇주동안 치우지 않는 대자보를 보면, 정말 찢어버리고 내가 뜯어내버리고 싶은 그런 감정이 듭니다. 열람실에 어떤 개새끼가 내 자리에 커피 쏟아놓고 의자에 껌 뱉어 놓았을때 흥분감이죠.“ 그 감정, 파토스를 이겨내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인류는 수 천년을 투자했습니다. 수 차례의 세계대전도 있었고, 노예제의 역사, 억압의 역사, 성차별의 역사, 반공의 역사, 학살의 역사들을 거치면서 지금의 민주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인권을 만들었고, 사회를 구성했습니다. 당신이 그 앞에서 “왜 나에게 민주주의를 강요하는가”라고 물으셔도, 그것은 당신의 행동을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않아요. 그것은 당신이 탑을 갈지 미드를 갈지, 봇을 갈지 정글을 갈지 당신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호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게임 자체를 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은 누군가 당신만의 보금자리에 커피를 쏟았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아무도 당신의 자리에 커피를 쏟지 않았어요.. 커피를 쏟은 건 당신입니다.' 파토스를 이겨내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인류는 수 천년을 투자했다. 코끼리맨에 대한 폭행은 그 시계를 그 순간 다시 수 천년 뒤로 돌려놓았다. 7.2. 의회 민주주의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노동문제 혹은 경제적정의 문제에 대해 천착하는 이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다. 예컨대 조성주나 제윤경 등이 있을 것이다. 나는 조성주가 보여주는 장기적 플랜과 그 비전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사회구조 변화에 발 맞추어, 기존 기업별 노조 위주의 운동이 아닌 청년유니온 등의 초기업별 노조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러한 세력과 저변 확대를 통해 최종적으로 의회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비전은 매우 설득력 있다. 제윤경이 추진하는 추심채권 소각 운동은 재기 불가능한 사회 빈곤층의 재활을 가능케 하고, 결과적으로 '우리 편이 되어 줄 사람'을 증강한다는 점에서 장기성이 있다. 전순옥은 당내 정치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였을 지언정, 노동법을 공교육에서 소화하도록 하는 교육 법안을 내놓았고 그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발상이었다. 결국 문제는 입법부에 진입해 법안을 추진하고, 행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공교육과 법률 체계를 개편함으로서 사회 제도를 개선해나가는 것이다. 사회 일반 인식의 변화와 현실적 제도 개선은 닭과 달걀 같은 것이리라. 다만 둘 중 하나를 배제했을 때 바퀴는 결코 굴러가지 못한다. 친애하는 NL둥이와 한국기독당, 혹은 통일교 동지들은 그런 면에서 차라리 현실적이다. 7.3. 가르쳐야 할 가치 얼마 전 미 특수부대원들이 여성 대원 도입에 대해 언급한 인터뷰들을 읽었다. 레드넥 스타일 마초병신들이 낼 만한 의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어떤 대원의 이야기는 귀담아 들을만 했다. '나는 최소한 부상 당한 날 들쳐 메고 뛰거나, 위험 장소에서 끌어내 줄 수 있는 이가 내 동료이기를 바란다. 내 체중은 90kg이 넘고 각종 장비를 모두 장착하고 나면 120kg에 달한다.' 당국은 기존 기준과 똑같은 수준을 달성한 경우 성별을 구분치 않고 선발하기로 결정했다고 들었다. 나는 AA정책을 통해 성평등과 장애인 고용 상태 개선을 이루어낸 것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대중 영상물 등을 제작할 때 인종별 쿼터를 제시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본다. 그런 '의도적 역차별'을 적용할 수 있는 분야와 그렇지 않은 분야를 구분하고, 그 정도를 규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회적 논의에 의해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세종을 전제 군주라 이야기했지만, 그럼에도 농지 개혁에 입안부터 시행까지 13년을 투자했다. 구분과 정도의 규정이 쉽지 않음은 그렇게 증명된다. 8. 타자화, 객체화의 극복 타자화되고 객체화 되는 현실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런 현실로 인해 받고 있던 불이익을 거부하는 것과 동시에 그로 인해 얻고 있던 작은 혜택들을 포기하겠다는 다짐을 의미한다. 개인 대 개인의, 미시적인 레벨에서 '지켜주겠다'는 발화를 거부하는 것은 객체로서 주체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부를 향하는 국가 주도의 폭력 ㅡ 다시 말해 군의 혜택을 향유키만 하겠다는 것은 미시와 거시의 충돌, 모순을 야기한다. 군 가산점 문제 따위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며, 병역 이행자들에게 국가가 제공해야 하는 금전적 보상과 제대로 된 대우를 병역 미대상자들에게 떠넘겨버릴 뿐이다. 2014년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이야말로 여성을 타자화하고 객체화한다. 때문에 오늘 아침 경향일보에 게재된 정희진의 글에 매우 깊은 유감을 표한다. '군사주의를 반대하는 평화운동가들 중 일부는 징병제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등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군대를 없앨 수는 없으므로 지원병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도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사람의 아들, 어둠의 자식들로 신분 질서가 정해진 판에 지원병제가 되면 어떤 계층이 군대에 가겠는가? 군대는 더욱 계급화, 게토(ghetto)화될 것이다.' 조금도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문장이다. 8.1. 생각해보면 문제들은 의외의 상황, 기본 전제 자체의 변동으로 인해 해결이 아닌 소멸이 되어버릴 가능성을 내포한다. 학벌에 따라 차별 받는 사회의 개조를 주장하던 시민단체 하나가 최근 해체를 선언했다. 명문대생들도 어차피 취직 못해 버둥대야 하는 상황에서 학벌주의에 대한 비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 탓이라고 했다. 남녀 문제와 관련해 인터넷에서 쉽게 불타오르던 주제 중 하나는 '군대 vs 출산'이었다. 출산을 꿈꿀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후 이런 논쟁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 식이다. 9. 다시, 말콤X. 말콤X는 평화주의를 주장한 킹과 흔히 대비되고, 때로는 테러리스트 같은 모습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말콤X가 주장한 것은 KKK단 같은 류의 직접적 인종 폭력에 대한 자위권이었고, 그 자신이 폭력사태에 연루된 바는 없다. 말콤X는 어디까지나 말과 문장과 단어로 싸웠다. 애초에 X가 중요 인사로 급부상하게 된 계기는 경찰의 폭행으로 분노한 흑인 군중과 경찰 간의 충돌위기를 중재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사이비 이슬람 교단의 얼굴마담 역할을 하던 시절이 지나고, 메카를 순례하는 과정에서 X는 꽤나 큰 심경의 변화를 느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로 다른 인종들이 같은 종교적 이념을 통해 묶이는 광경을 목도한 탓이 아닐까 상상한다. 샤바즈의 이름을 쓸 수 있게 된 X가 남겼던 말로 끝을 맺는 것이 좋겠다. "나는 과거 '양심적인 백인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대답한 것을 후회한다. 흑인 조직에 가담하고 싶어하는 백인들은 현실 도피로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면 안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양심을 증명해야 하는 곳은 흑인 사이에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에 사로잡힌 동료 백인 사회 속이다. 나는 양심적인 백인들에게 말한다. 우리 함께 일하자; 각자가 자신의 인종 속에서..." 10. 건투를 빈다. - 참고 정중식, 정의당을 지지해주세요, 2016.0401, 중식이의 블로그. 물뚝심송, 중식이 밴드는 여혐인가?, 2016.04.04, 이승로그(직썰 게재). 작자미상, 살아男지 않고 있어,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게재. 정희상, 그는 왜 14년째 냉동고에 누워 있나, 2012.05.11, 시사IN. 정희진, 피해를 공유하는 윤리, 2016.05.22, 경향신문. 고명우, 서강대사랑방.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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