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5/24 15:57:34
Name   Raute
Subject   어머님은 롹음악이 싫다고 하셨어


나도, 내 누나도 아직 독신이기에 엄마는 할머니가 아니지만, 5촌 조카들로부터 할머니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게 벌써 몇 년 전이다. 아직 정년은 좀 남았다며 왕성한 의욕을 불태우며 아침마다 출근을 하지만 엄마의 이마에는 흰머리가 잔뜩 비친다. 그렇다, 노년의 입구에 발을 내딛으려 하는 옛날 사람이다. 막내이모는 아이돌이라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밖에 못 들어봤던 과거의 내 앞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 이! 슈!'를 흥얼거렸고, 둘째이모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00년대 가수들까지는 소화한다. 그러나 엄마는 90년대 이후의 음악에 적응하지 못했고, 세시봉의 향기가 난다던 김광석 이후로는 소화하질 못한다. 엄마에게 최고의 스타는 남진과 조용필이다. 피자는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은 적응하지 못한다는 게 신기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엄마가 특히 싫어하는 장르는 락이었는데, 엄마가 듣기에는 불량한 양아치들이 시끄럽고 경박하게 질러대는 소음 같단다. 조용필의 노래 중에서도 락과 밀접한 곡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대중성을 추구한다고 배신자 소리를 듣던-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제껴두자-윤도현이 엄마가 들어줄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물론 '나는 가수다'를 볼 때도 윤도현은 시끄럽기만 하다고 투덜댔다. 나는 '락덕후'는 아니지만 어쨌든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락이고, 엄마는 나의 음악적 취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그래도 음악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던 힙합보다는 취급이 좋았던 것 같다.

이런 엄마에게 락의 매력을 알려준 건 '나가수'에 나왔던 김경호였다. 엄마는 냉담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정체성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외치는 보수적인 가톨릭 신도이며, 상당히 심한 수준의 호모포비아로 '여성스러운 남성'은 '게이 같다'고 싫어했었다. 그런데 긴 머리 찰랑거리고 분홍색 좋아하는 김경호에게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낸 것이다. 엄마는 '쟤는 지저분하고 경박한 게 아니라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오잖아'라면서 김경호를 '시끄러운 딴따라'들과 다른 부류로 분류했고, 김경호의 행동에 대해서도 '쟤 게이 아니지? 그럼 됐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는 미처 몰랐지만 엄마의 '여성스러운 남성'과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건 (여성과 결혼한 유부남이지만) 김경호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근데 이게 중요한 얘기가 아니니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 엄마가 왜 김경호에게는 다른 잣대를 보인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김경호는 '엄마가 들을 수 있는 락'을 노래하는 유일한 '락커'였다.

원래 '복면가왕'은 엄마가 즐겨보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사실 당연한 게 엄마 입장에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애들이 나와서 듣기 불편한 노래를 꽥꽥 질러대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다 누나가 보기 시작하면서 엄마도 따라 보기 시작했고, 한때 '불후의 명곡'을 보던 것처럼 마땅히 볼 거 없을 때 그냥 틀어두는 프로그램 정도로 바뀌었다. 그렇게 누나랑 엄마랑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방에서 나온 내가 한 마디 던졌다. '지난주 가왕 노래하는 거 봤어?' '아니, 이거 드문드문 보는 거라 잘 몰라. 누군데?' '그냥 들어보슈'

그렇게 엄마는 '우리동네 음악대장'을 영접했다. 그게 아마 3연속 가왕을 했을 무렵일텐데 먼저 한 곡을 들려준 다음, 'Lazenca Save Us'를 재생해봤다. 예전같았으면 듣기 싫다고 치우라고 했을텐데, 이때는 흥분한 목소리로 '얘 누구야? 어쩜 이렇게 노래를 잘해?'라고 했다. 누군지 눈치 챈 누나는 엄마에게 '나가수'에서 하현우가 노래하던 영상들을 틀어줬다. 그리고 엄마는 'The Saddest Thing'을 불렀던 하현우를 기억해냈고, 연달아 몇 곡을 감상하더니 완전히 빠져버렸다. 세상에 락 하는 애들은 찌질이 같다고 손을 절래절래 내젓던 이 아줌마 입에서 '하현우 너무 잘생기지 않았냐?'라는 얘기가 나올 줄이야. 누나와 나의 황당한 표정을 보고 엄마는 태연하게 '하현우 멋있는데?'라고 한 마디를 보탰다. 어메이징.

이후 엄마는 '복면가왕'을 본방사수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곡이 나올 때마다 듣고 또 들었다. 심지어 하루는 나한테 국카스텐 콘서트 티켓을 구해달라는 얘기까지 했다. 엄마에게 국카스텐이 뭔 노래를 부르는지 알려줬다. 엄마는 왜 '우리동네 음악대장'이 국카스텐의 노래를 부르면 떨어질 수 있다는 건지 깨달았다. 한 10초쯤 흘렀을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쟤들 노래 내 취향은 아냐. 그래도 하현우는 좋아.' 더 이상 국카스텐 얘기는 하지 않지만, 어쨌든 하현우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일요일에 엄마는 '램프의 요정'과 '우리동네 음악대장'의 대결을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집중하면서 봤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동네 음악대장'이 부른 'Fantastic Baby'를 듣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지금도 엄마가 '락'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건지, 아니면 단순히 김경호와 하현우만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복면가왕'에 패널로 나왔던 박완규에 대한 반응을 생각해보면 후자인 거 같다. 그러나 어쨌든 엄마는 그렇게 싫어하던 롹음악을 스스로 듣고 있다. 그거 하나로 충분히 재밌는 일이다. ROCK WILL NEVER DIE.




0


    ORIFixation
    Rock will never Die!
    이거 보고 생각나서 MV 게시판에 2016 LCK Summer 테마송 올려놓았습니다 ㅎㅎ
    수박이두통에게보린
    자장면은 좋다고 하셨나요?
    파스타 취향인 걸로...
    레지엔
    저희는 어머니가 음악을 듣진 않으시는데... 아버지가 락커, 특히 메탈계랑 신흥 서브장르쪽을 안 좋아하십니다. 음악은 대저 유라이어 힙이나 핑플 같아야 하고 그 수준이 최소 블랙 사바스 미만이어야 한다는 극성 꼰대가...
    뭐랄까 핑플이 기준인 건가요...
    Darwin4078
    김경호를 좋아하셨다니 분명 스트라이퍼의 마이클 스윗도 좋아하실 겁니다.
    일단 김경호가 커버한 지옥송부터 시도해보겠습니다.
    파워후
    Rock will never die 하니까 노라조의 락스타라는 노래 생각나네요...ㅠㅠ
    그거 노래방에서 친구들이랑 많이 불렀었죠. 물론 만용이었지만...
    애패는 엄마
    글 참 왠지 찡하게 좋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구밀복검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회자인데, 어머니는 원래 사업(물론 잘 되지 않아 부채에 허덕였지만) 하시던 아버지를 늦깎이 목회자로 만들어버린 골수 크리스챤이라서...가령 어릴 때는 거룩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일요일에 상품 구매를 할 수도 없었죠. 스타크래프트와 창세기전3 파트2의 경우 거진 전재산을 털어 정품을 샀는데, 어머니께서 케리건과 베라모드의 일러스트를 보고서 악마적이라는 평가를 하시면서 쓰레기통으로 보내신 적도 있고. 락/메탈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스래쉬/데스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부심 쩌는 이들끼리는 메탈... 더 보기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회자인데, 어머니는 원래 사업(물론 잘 되지 않아 부채에 허덕였지만) 하시던 아버지를 늦깎이 목회자로 만들어버린 골수 크리스챤이라서...가령 어릴 때는 거룩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일요일에 상품 구매를 할 수도 없었죠. 스타크래프트와 창세기전3 파트2의 경우 거진 전재산을 털어 정품을 샀는데, 어머니께서 케리건과 베라모드의 일러스트를 보고서 악마적이라는 평가를 하시면서 쓰레기통으로 보내신 적도 있고. 락/메탈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스래쉬/데스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부심 쩌는 이들끼리는 메탈이 아니네 어쩌네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말랑말랑한 LA 메탈 계열 밴드나, 하드락으로 묶이기는 하지만 팝스러운 곡 많은 퀸, 후대 밴드들에 비하면 다소곳하다할 수 있는 비틀즈, 레젭 등등조차도 '사탄의 음악'으로 간주되어 감상하는 데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지금이야 한참 시일이 지나기도 했고 20살 이후로는 자취 생활 기간과 입대 등을 통해 가족 구성원 간에 적절한 거리감이 확보된 터라 적당히 웃으며 이야기할만한 에피소드이지만 당시에는 참...
    저는 어머니께서 '악마적인 XX' 이런 표현을 하신 걸 본 적도 없고 직접적인 규제를 당한 적도 없긴 한데 대신 제가 좀 미친 짓을 한 기억은 있네요.

    친구 중에 어머니께서 상당히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녀석이 있는데 제가 무슨 깡이었는지 그 친구에게 '사탄'이란 제목의 기독교와 악마에 대한 책을 선물했던 기억이...
    기아트윈스
    으아......

    그런 경우라면 부모에 대한 반감이 성장하던 시기에 그 반감의 화살이 종교로 향하는 경우가 많은데 구밀복검님은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제 선배 중 한 분의 경우는 컬러링으로 반야심경을 걸어놨었어요. 독실한 개신교인인 부모님이 전화거는 걸 원천차단한다고...;;
    구밀복검
    뭐 제가 좀 덤덤한 편이라 그냥저냥...몰래몰래 다 즐겼죠. 물론 가족에 대한 애정은 크게 감소해서 소 닭 보듯..
    그리고 제가 신앙인이 아니라서 그렇지 래디컬한 신앙인 입장에서야 우상이고 사탄 맞죠. 한국도 그렇고 개신교란 종교 자체가 세속화 된 터라 보기 드문 일일 뿐. 그래서 동의했다기보다는 '저들의 세계관 내에서는 저게 원칙이지 뭐'라고 이해할 수 있었죠.
    기아트윈스
    넘나 어른스럽군요. 제 입장에서 엄마가 제 부루드워 씨디나 창3파2 패키지를 버렸었더라면 그건 루비콘강을 건너는 급이었을 거에요 ㅎㅎ
    구밀복검
    뭐 어른스럽다기보다는 체질적으로 밸이 없던 게 아닌가 합니다. -0-;
    저희 어머니는 일상생활에서의 별다른 강요같은거 없었는데도 단지 성당만 다니라고 하는걸 가기 싫다고 미친 듯이 싸워서 1년도 안 갔는데...
    90년대말에 한번 갈때 2천원 정도 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냥 갔을걸 그랬나 하기도 하네요 ㅋㅋ 어릴때 교회 강제로 다니는 일은 없으셨나요?
    구밀복검
    모태신앙이다보니 19살까진 강제로 갔죠 껄껄.
    그 당시에 교회 안 가겠다고 하면 진지하게 의절을 각오해야 할 분위기여서..
    리니시아
    비틀즈가 사탄의 음악이라니 덜덜...
    중년~노년분들이 싫어하는 음악이...
    락이라 하면 너무 범위가 넓어서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확실한건 힙합은 대부분 엄청 싫어하시더군요
    뭐랄까, 힙합은 아예 메인스트림으로 간주하지 않거나 발라드 부를 때 깔아주는 부속품처럼 생각하시는 어른들이 많더군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525 일상/생각어젯밤 이야기 12 열대어 17/04/26 4664 4
    2142 기타어제자 손석희 앵커브리핑.jpg 9 김치찌개 16/01/29 5693 1
    9351 게임어제자 블소 이벤트 던전 플레이 후기 2 뜨거운홍차 19/06/27 5558 0
    14003 일상/생각어제의 설악산-한계령, 대청봉, 공룡능선. 2 산타는옴닉 23/06/25 3212 11
    1246 일상/생각어제의 기분 좋음/나쁨 12 새벽 15/10/13 7556 0
    346 기타어제는 잠에만 취했습니다 27 지니 15/06/17 7742 0
    7125 일상/생각어제, 오늘 국도로 부산-대구를 왕복한 이야기 5 맥주만땅 18/02/16 3617 0
    15282 일상/생각어제 회식하고 돌아온 아내 상태 체크중입니다. 2 큐리스 25/02/26 1210 6
    1282 일상/생각어제 전철에서 있던 일 때문에 우울해요. 13 얼그레이 15/10/18 7765 0
    192 기타어제 있었던 "메르스 확산, 어떻게 막을 것인가?" 에 대한 토론 전문입니다.(스압) 2 아나키 15/06/03 11793 0
    14037 기타어제 이벤트 홍보 글 올렸었는데... 8 오리꽥 23/07/13 2670 2
    14807 일상/생각어제 와이프한테 청양고추 멸치볶음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3 큐리스 24/07/29 1698 5
    14971 일상/생각어제 와이프한테 맞아 죽을뻔했습니다. 7 큐리스 24/10/10 1766 4
    14812 일상/생각어제 와이프랑 10키로를 뛰었습니다. 8 큐리스 24/07/31 1897 7
    3956 스포츠어제 승부조작을 다뤘던 피디수첩 본편 영상이 내려졌습니다. 2 키스도사 16/10/19 3472 0
    1278 기타어제 서울 광화문.. 어느 여고생..swf 8 김치찌개 15/10/17 8069 1
    1079 음악어제 본조비 내한 공연에 다녀왔습니다. 10 세계구조 15/09/23 10339 1
    14826 일상/생각어제 마트에서 황당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10 큐리스 24/08/06 2007 1
    10905 도서/문학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 서머싯 몸 6 트린 20/08/31 5185 7
    4965 일상/생각어부인이 르사의 스마트폰을 스사 아니면 엑스사껄로 바꾼다고 합니다. 9 집에가고파요 17/02/22 3555 0
    9115 영화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포일러 리뷰 15 Cascade 19/04/24 4306 2
    9111 영화어벤져스 영화를 역주행하며 느낀 히어로 등록제. (스포주의) 14 moqq 19/04/23 4599 0
    6259 창작어베일러블. 2 와인하우스 17/09/11 4320 4
    2713 정치어버이연합 게이트 진행상황이 흥미롭네요 18 Toby 16/04/29 4568 4
    2879 일상/생각어머님은 롹음악이 싫다고 하셨어 23 Raute 16/05/24 4680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