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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6/17 00:02:18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공각기동대 ARISE
공각기동대는 작화 면에서든 서사의 측면에서든 언제나 그 시대 최강 최고의 작품이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오시이가 맡았던 물건들 ㅡ 95년 극장판 퀄리티는 버블시대의 작품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고, 이노센스는 그 서사에 불만이 있을지언정 비주얼에 대해 태클 걸 수 없는 작품이었다. 이후 카미야마 켄지가 담당한 TV판, SAC와 GIG, OVA인 SSS 모두가 당대 TV 애니메이션이 뽑아낼 수 있는 최고급의 화면과 서사를 선사했다. 퀄리티 유지를 위해 SAC는 격주 방영했다.

95년 극장판이 던져준 존재론적 질문의 함의는 울림이 컸고, 그에 대해 따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고전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막대한 부담감 위에서, 카미야마 켄지는 또 다른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그 시간적 간격 사이에 식상한 레토릭이 되어버린 안드로이드의 고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타치코마를 통해 풀어내는 동시에, 탁월한 상상력으로 웃는 남자와 개별 11인 등의 소재를 풀어나갔다. 하나의 시즌에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도 각화 별로 개별적인 메세지를 던져주는 서사의 구성은 탁월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이전의 극장판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던 공안 9과의 인물들 개개인과, 그 관계는 두 시즌의 TVA를 통해서 완전히 다져졌고 각각에게 하드보일드의 극을 달리는 캐릭터성이 부여되었다.

어라이즈는 이 모든 걸 깔아뭉개고 짓밟고 부숴서 무위로 되돌렸다.

프리퀄이라는 측면에서, 또한 정체할 수 밖에 없는 공각이라는 브랜드를 새로 리붓하기 위한 프로젝트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시도였다. 어차피 그 세계관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쏟아낸 참이었고, 새로운 측면을 모색해 본다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그 시도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됐다.

어라이즈는 기본적으로 공안 9과를 구성하고 있던 인물들의 관계를 전부 리셋 후 재구성하고, 세부적인 과거의 설정도 전부 뜯어 고치며, 501기관과 같은 신규 집단을 등장시키고, 그 위에 시로 마사무네의 오리지널 코믹스를 리믹스한 서사를 얹었다. 카미야마 켄지의 TVA들이 오리지널 코믹스에 관한 오마쥬 하나 제대로 넣지 않았던 것과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와중에 하드보일드의 극한을 달리던 캐릭터들에게는 개그성 기믹이 붙고, 특히나 소좌는 그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완벽성'을 상실한 채 표류했다.

전원의 성우를 갈아치울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면, 차라리 9과의 구성 인물들을 통째로 갈아치우는 것을 고려하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소좌, 바토와 토구사, 아라마키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을 그대로 가져갈 필요는 없다. 애초에 이들의 캐릭터성을 정립한 것은 95년 극장판도, 원작 코믹스도 아닌 카미야마의 TVA 시리즈였다. 사카모토 마아야의 개런티를 부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타나카 아츠코를 교체할 필요도 없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사카모토는 점차 SAC의 소좌와 비슷한 톤으로 연기하는데, 이를 위해서 굳이 사카모토를 써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서사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미 공각에서 다 다루었던 이야기들, 혹은 다른 SF 작품들에서 우리고 우려서 쓴 물만 나올 소재들을 재활용했다. TVA가 아닌 OVA를 채택한 이유 또한 보여주지 못했다. 작화는 시시때때로 후졌고, 이는 전혀 공각답지 못했다.

신규 캐릭터들의 디자인은 특히 외적인 측면에서 과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다 카즌도 등의 괴기스러운 모습을 한 캐릭터들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년 점프의 능력자 배틀물에 나올 법한 작자들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이는 공각기동대가 추구해오던 '현실적 근미래' 세계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고, 때문에 501 기관 등의 인물들은 배경과 유리되어 둥둥 떠다녔다.

이 총체적 난국 앞에서 무어라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할 지 쉽게 알 수 없다. 다만, 차라리 SAC를 마지막으로 좋은 기억을 남겨 놓는 편이 이보다는 훨씬 더 나은 방식의 작별이었을 거란 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남은 건 사와시로 미유키의 로지코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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