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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7/24 14:46:07
Name   커피최고
Subject   [왕도의 개], 겨레의 형편을 넘어서는 도리가 있음을 믿는가?


[왕도의 개]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만화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몇 년 전에 미우 출판사에서 정발했고, 총 4권 완결인 작품입니다. 권당 만원 가까이 하는, 꽤 두꺼운 만화책입죠.



이 작품은 야스히코 요시카즈라는 47년생의 원로 만화가가 그렸습니다. 그는 1979년에 나온 건담의 첫 작품을 만드는데 있어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죠. 아시다시피 그가 젊었을 시절의 일본은 학생운동이 성행하던 시기였고, 거기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야스히코 요시카즈 역시 일본 문화산업계의 대표적인 좌파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그리기에 앞서서 1935-1945년대, 만주국과 그 곳에서의 전쟁을 그려내는 [무지갯빛 트로츠키]라는 작품을 연재했습니다. 이 작품의 테마는 "옛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더욱 현명하게, 또한 한눈파는 일 없이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살던 나라에 일본은 과오를 저질렀다" 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함은, 대강 조선, 중국, 몽골,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던 연해주를 이야기한다고 보면 됩니다. 사실상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이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기치는 저 4국의 백성과 일본인, 다섯 민족이 조화를 이뤄야한다는 오족협화인데, 그것을 진정으로 실현할 생각도 없었고, 이를 빌미로 아시아를 짓밟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런데 작가는 이 시기 일본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끝까지 간 상황이라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끝난 이후 작가는 그럼 도대체 일본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되었고, [무지갯빛 트로츠키]의 후속작으로 제가 소개할 [왕도의 개]를 그렸습니다. (사실 무지갯빛 트로츠키는 작가도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여러모로 부족한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왕도의 개]가 다루고자 하는 테마는 "일본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메이지 유신의 성과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그러져 일본을 패권주의 국가로, 그리고 아시아에 대한 가해자로 떨어지게 한 것인가" 입니다.

작가는 그 시작점을 청일전쟁 때라고 봅니다. 그 기세가 크게 기울어졌음에도, 그 본연의 거대함이 청나라를 여전히 아시아의 대국으로 있게 하였습니다. 막 근대국가로서 발돋움한 일본은 그런 청나라가 매우 짜증나는 존재였고요. 메이지 시대의 일본 위정자들은 청나라를 어떻게 쳐낼지, 그리고 또 그 시기는 언제로 할지 고심했습니다. 그 중심에 당시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라는 인물을 놓습니다.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일본인'으로 카츠 카이슈라는 노인을 두고요. 반전론자인 이 노인은 청일전쟁이 일본과 동북아에 있어 무엇을 초래할지 자각한 인물이라고 작가는 평합니다.

작가는 무츠 무네미츠를 패도의 길을 걷는 권모술수에 능한 자로, 카츠 카이슈를 왕도의 길을 걷기 위해 뒷방에서 백방으로 노력하는 인물로 그렸습니다.그런 카츠 카이슈의 뜻을 받들어 왕도를 위한 '개'가 되는 가상의 인물, 카노 슈스케가 이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시아주의에 입각하여 왕도의 길을 걷고자, 아니 열고자 하는 카노 슈스케의 표면적인 정체성입니다. 정치사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 일본인이었던 그의 표면적인 정체성은 탈옥 이후, 패도국가 일본의 핍박에 시달린 피해자들의 것들로 바뀝니다. 당시 한창 개척 중이던 추운 지방 홋카이도의 원주민이었던 아이누족으로서 활동하기도 하고,  나중에 카츠 카이슈를 만나서는 배를 타고 다니며 중국인의 모양새를 하고 다닙니다. 그런 그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오는 김옥균과 전봉준은 또 조선인이죠. 그러면서 점차 그의 내적인 정체성, 본질적인 정체성은 점차 진정으로 '아시아인'이 되어 갑니다.

물론 주인공 카노 슈스케가 가상인물인만큼 역사를 바꿔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왕도의 길을 걷고자했던 실존 인물들에 대해 조명해줌과 동시에, 당시 동북아 정세를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에 있습니다. 특히 조선인 김옥균이 당시 동북아 정세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던 인물인가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던 계기였습니다. 김옥균은 일본을 가까이 하며 조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추구했기에 일본에서는 원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가 일본의 지식인들과 후원자들로부터 냉대받고 배신당하는 뒷이야기까지 자세하게 묘사하면서 나약한 개인으로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죠.

그리고 그런 그를 냉대했던 이들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입니다. 그는 탈아입구 사상으로 유명한 일본의 계몽 사상가이죠. 그런 그에게 주인공이 일본의 근대화 사상에는 일본으로부터 핍박받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비판하니깐 하는 말이 "그래서 내가 공부하라고 이야기했잖아" 입니다. 어째 요즘에도 많이 듣는 말인 것 같습니다 ㅎㅎ

끝으로 이 작품의 대척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는 두 가지 대사를 적어볼까 합니다.

무츠 무네미츠, "허나 잊지 마라! 무츠 한 사람을 벤들, 이제 와서 일본이 갈 길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코무라가! 하라가! 내가 가르친 이들이 계속해서 뒤를 이을 것이다!"

전봉준, "사람은 어딜 가나 다 같은 사람이지만, 초목과도 같이 땅에 그 뿌리를 두는 까닭에 자기 땅을 떠나면 사람이 바뀌거나 시들고 마는법. 나는 죽는날까지 조선의 농민으로 살고 싶네. 그런데 젊은이, 나라의 이득이나 겨레의 형편을 넘어서는 도리가 있음을 자네는 믿는가?"




ps -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동북아 역사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현재 [하늘의 혈맥]이라는 작품을 연재하고 있는 중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막 발견된 때의 정세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완결나는대로 국내에도 정발되지 않을까 싶네요.











4
  • 앙 추천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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