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6/08/21 03:38:07 |
Name | 눈부심 |
Subject | 주디 버틀러가 말하는 혐오언어의 해체 |
저는 주디 버틀러가 유명한 젠더이론가인 사실을 몰랐을 때 이 영상을 보고 매료되었었어요. 제 번역은 허접하니까 영상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버틀러의 주장을 퍼 오면, http://minbyun.org/newsletter/20131115/images/2013_sub05.pdf * * *(인용시작) [버틀러가 발언에 대한 국가규제를 반대하는 이유] 버틀러는 언어적 성희롱 등, 혐오발언(hate speech)에 대한 국가규제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버틀러는 젠더라는 주체의 보편성이 허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젠더는 역사적 담론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른바 젠더의 ‘수행성’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젠더가 존재(being)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행함(doing) 그 자체라는 것을 말한다. ‘행함’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어오는 과정이므로, 여기에서 생겨나는 행위자(doer)의 정체성이란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과정에 불과하다. 이것은 젠더 정체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발화 주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버틀러에는 발화의 주체 역시 반복적으로 구성된 역사적 담론에서 가변적으로 끊임없이 탄생한다. 그러니까 혐오발화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발화는 말하는 순간 화자의 통제에서 벗어나 무관한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 역시 과거, 현재, 미래의 맥락에 놓이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성희롱에 대해서 처벌하는 것은 ‘발화 주체’를 벌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문제의 효과이자 결과물을 처벌하는 것이 된다. 화자를 떠난 발화는 사회의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구성된다. 그렇다면 설사 어떤 발화가 성희롱의 의도로 행해졌다 하더라도 화자를 떠난 그 발화는 그 의미가 끊임없이 재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텍스트가 한번 행위한다면, 다시 행위할 수 있고, 그 이전의 행위에 반해 다시 행위할 수 있다. 이것은 수행성과 정의 대안적 독해로서의 재의미부여(resignification)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혐오 발언는 발화자가 청자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반박하는 가운데에서 그 의미가 재창조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그러한 가운데에서 초기에 발화자의 의도에 담긴 ‘해악’은 스스로 치유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어떤 발화를 규제한다는 것은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에서 수용가능한 발화가 될지 아닐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미리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그 발화의 문제점에 대한 해석권한과 처벌권한을 독점하는 것은 발화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할 권한을 전적으로 국가에 넘겨주는 일이 되어 버린다. 법적 해결은 문제가 담론에서 자율적으로 치유될 가능성을 오히려 봉쇄하고, 국가의 규율권력의 힘을 증가/확대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권리와 권력을 축소시킨다. 즉, 법원이 판결로서 문제를 특정한 의미로 전환하는 것은 “(법적) ‘결정’의 특별한 폭력”이다. 만약 국가의 자의적인 권력이 어떤 유형의 언어가 성희롱을 성립시키는지 여부를 결정한다면, 이것은 국가에게 그것을 결정하는 규율권력을 남용하게 허용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버틀러는 “법의 한계”를 경고하고, 정치적 도구로서 법의 사용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버틀러가 모든 규제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를 낳은 진정한 원인도 동시에 봐야 하며, 특히 그 문제해결의 권한을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는) 국가에게 넘겨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법에 의해 담론이 잘못 전유되어서는(misappropriation) 안되며, 대신 그 재전유(reappropriation)이 “보호된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때 그 결과는 더욱 바람직하고 민주적일 것이라는 게 버틀러의 주장이다. * * *(인용 끝) 영상은 이렇게 어렵고 세세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혐오발언에 관한 그녀의 주장을 집약적으로 설명해주는 에피소드가 나와요. 44초에서 시작해요. 지인과 길을 가는데 버스에 타고 있던 여고생일 법한 아이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며 'Are you a lesbian?' 이렇게 소리를 질러요. 그 아이는 질문이 무례한 줄 알았고 모욕의 의중을 담고 뱉은 말이었죠. 주디가 그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Yes, I am'이라고 대응하자 그 아이가 흠칫 놀라요. 이 에피소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재미있게 목격하게 되는 혐오언어의 해체를 보여줘요. 'Are you a lesbian?'이라는 표현 자체는 발화자의 의중 속에서는 모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이 언어가 다수의 청자에게 던져졌을 때 발화자의 의중을 일관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의중이 무엇이었든 그 의중조차도 해체가 돼요. 주디가 여고생의 말에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에는 아이의 발언은 혐오에 힘을 싣게 돼요. 덩달아 아이는 혐오발언자가 되고요. 반면에 주디가 'Yes, I am'하고 눈 똑바로 뜨고 되받아치는 순간 이 장면을 목도하는 이들에게는 아이의 stupidity가 더 부각될 거예요. 그리고 아이 자신은 혐오발언자라고 낙인찍히는 것보다는 형량이 덜한 철없는 십대라는 정체성이 부여되고요. 이와 같이 혐오발언이라는 건 그것이 발화자를 떠났을 때 중구난방으로 해체되기 때문에 그걸 특정하고 정의내려서 국가가 형벌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이 주디 버틀러의 주장인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이해했어요. 다른 곳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주디는 이런 예도 들어요. queer라는 말은 원래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들을 비하하는 뉘앙스를 담는 말이었어요. 이걸 그네들이 주도적으로 사용해서 queer festival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LGBT가치를 해치는 일이 없어졌듯 가시적인 언어정복을 이루어냈어요. 이건 특정혐오언어의 권력이 쇠퇴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언어의 권력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전복시킨 거예요. 역설적인 현상인데 언어가 이렇게 쉽게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건 언어권력이란 게 그만큼 작동하기 때문일 거예요. 언어권력이라고 하면 마치 그걸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아요.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67095&page=2 피지알에서 스까드립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 글을 읽었어요. 그치만 이런 의식화는 오히려 일상의 언어에 혐오를 실어주는 일인 것 같아요. 레즈비언이냐고 묻는 철없는 십대아이에게 과도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랄까요. 저런 게시물은 일개 stupid한 글일 뿐이에요. 조심해야할 가치가 전혀 없어요. '태일하다'라는 워마드의 신조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그보다 더, 신조어를 만들어 혐오를 생산해내겠다는 얄팍한 부심이 정말 stupid하고 한심한 거예요. 온라인에 자신의 모습을 그와 같은 흔적으로 남겨보겠다고 작심한 그 처자는 인간으로서 매우 무가치하고 형편없어요. 그 처자를 같이 증오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옹호받고 있는 것은 아닐 거예요. 주디가 여고생을 증오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일 거예요. stupidity에 먹이를 주면 안돼요. 그가 고발을 당하면 법의 응징을 감당해야 할 일일 것이고(주디는 혐오발언에 대한 국가개입에 무조건적인 반대입장은 아니에요.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말해요) 우리는 스까묵자란 말이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끼리의 일상언어를 즐겨야 할 거예요. 맨밥에 고추장, 참기름만 넣고 스까서 김에 싸먹으면 정말 맛있어요. * 카테고리를 철학/종교라고 해놓으니 정말 민망하군요. 저는 주디 버틀러의 책을 읽은 적도 없고 영상 하나에 크게 매료되었고 링크 몇 개 읽어봤을 뿐이에요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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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누군가의 싸이월드 일기장에서 "보고싶노" 라고 단 네 글자만 쓰여있던 글을 봤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2007년쯤이였던 거 같은데, 경상도 사투리 사용자인 제게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온 네글자였어요. 왜냐하면 제 문법적 직관으로는 완전히 틀린 말이었거든요. 보고싶노 앞에 (왜 이렇게)가 생략된 것이 명백한 문장. "보고 싶다" 보다 훨씬 강한 그리움이지만, 그걸 다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부끄럽다는 그 미묘한 느낌. 경상도 사투리 화자라면 알아차릴 그 미묘한 정서. 그걸 너무 효과적으로 잘 표현한것 같았어요.
제게 저 문장이 너... 더 보기
2007년쯤이였던 거 같은데, 경상도 사투리 사용자인 제게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온 네글자였어요. 왜냐하면 제 문법적 직관으로는 완전히 틀린 말이었거든요. 보고싶노 앞에 (왜 이렇게)가 생략된 것이 명백한 문장. "보고 싶다" 보다 훨씬 강한 그리움이지만, 그걸 다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부끄럽다는 그 미묘한 느낌. 경상도 사투리 화자라면 알아차릴 그 미묘한 정서. 그걸 너무 효과적으로 잘 표현한것 같았어요.
제게 저 문장이 너... 더 보기
문득 누군가의 싸이월드 일기장에서 "보고싶노" 라고 단 네 글자만 쓰여있던 글을 봤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2007년쯤이였던 거 같은데, 경상도 사투리 사용자인 제게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온 네글자였어요. 왜냐하면 제 문법적 직관으로는 완전히 틀린 말이었거든요. 보고싶노 앞에 (왜 이렇게)가 생략된 것이 명백한 문장. "보고 싶다" 보다 훨씬 강한 그리움이지만, 그걸 다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부끄럽다는 그 미묘한 느낌. 경상도 사투리 화자라면 알아차릴 그 미묘한 정서. 그걸 너무 효과적으로 잘 표현한것 같았어요.
제게 저 문장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와서 제가 그렇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의문사가 있는 의문문에서만 쓰여야 하는 "-노" 어미가 ('왜 이렇게' 가 생략된 형태로) 일반 감탄사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건 그 무렵쯤으로 기억해요. 물론 젊은 세대에서 일어난 유행같은 변화이고, 나이가 있으신분들은 여전히 어색해 하시는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아무튼, 이게 왜 떠올랐냐면, 일베의 등장 이후로 "-노"로 끝나는 문장을 인터넷에 게시하기가 너무 어려워졌어요. 그냥 전통적인 경상도 사투리 문법에 맞게 "-노"를 사용해도 그 문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를 일베유저로 오인하기 십상이고, 젊은 세대의 유행어로 사용하면 심지어 같은 경상도 사투리 화자 집단 내에서도 "일베유저"로 오해받는 상황이 나옵니다. 그냥 타이핑해서 쓰는 글에는 "-노"를 안 쓰는 게 속편한 상황인 거죠. 사실 일베유저들이 틀린 문법으로 "-노"체를 쓰건 말건 내가 왜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 것인지 짜증 날 때가 있었어요. 가끔은 사투리가 표준어보다 내 감정을 표현하기가 훨씬 좋을때가 있는데... 이젠 뭐 익숙해요.
2007년쯤이였던 거 같은데, 경상도 사투리 사용자인 제게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온 네글자였어요. 왜냐하면 제 문법적 직관으로는 완전히 틀린 말이었거든요. 보고싶노 앞에 (왜 이렇게)가 생략된 것이 명백한 문장. "보고 싶다" 보다 훨씬 강한 그리움이지만, 그걸 다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부끄럽다는 그 미묘한 느낌. 경상도 사투리 화자라면 알아차릴 그 미묘한 정서. 그걸 너무 효과적으로 잘 표현한것 같았어요.
제게 저 문장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와서 제가 그렇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의문사가 있는 의문문에서만 쓰여야 하는 "-노" 어미가 ('왜 이렇게' 가 생략된 형태로) 일반 감탄사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건 그 무렵쯤으로 기억해요. 물론 젊은 세대에서 일어난 유행같은 변화이고, 나이가 있으신분들은 여전히 어색해 하시는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아무튼, 이게 왜 떠올랐냐면, 일베의 등장 이후로 "-노"로 끝나는 문장을 인터넷에 게시하기가 너무 어려워졌어요. 그냥 전통적인 경상도 사투리 문법에 맞게 "-노"를 사용해도 그 문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를 일베유저로 오인하기 십상이고, 젊은 세대의 유행어로 사용하면 심지어 같은 경상도 사투리 화자 집단 내에서도 "일베유저"로 오해받는 상황이 나옵니다. 그냥 타이핑해서 쓰는 글에는 "-노"를 안 쓰는 게 속편한 상황인 거죠. 사실 일베유저들이 틀린 문법으로 "-노"체를 쓰건 말건 내가 왜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 것인지 짜증 날 때가 있었어요. 가끔은 사투리가 표준어보다 내 감정을 표현하기가 훨씬 좋을때가 있는데... 이젠 뭐 익숙해요.
"화자를 떠난 그 발화는 그 의미가 끊임없이 재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초기에 발화자의 의도에 담긴 ‘해악’은 스스로 치유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주디 버틀러의 말이 일리가 있지만(그가 이런 '재해석의 가능성' 개념을 너무 막 사용한다고 생각해서, 반박하려면 반박할 수도 있지만, 넘어가고),
저런 말을 언어폭력을 당한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좀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라고 할까요.(저런 논의를 감히 언어폭력 피해자 앞에서 할 수 있을까요?)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하지만 버틀러가 모든 ... 더 보기
"초기에 발화자의 의도에 담긴 ‘해악’은 스스로 치유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주디 버틀러의 말이 일리가 있지만(그가 이런 '재해석의 가능성' 개념을 너무 막 사용한다고 생각해서, 반박하려면 반박할 수도 있지만, 넘어가고),
저런 말을 언어폭력을 당한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좀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라고 할까요.(저런 논의를 감히 언어폭력 피해자 앞에서 할 수 있을까요?)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하지만 버틀러가 모든 ... 더 보기
"화자를 떠난 그 발화는 그 의미가 끊임없이 재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초기에 발화자의 의도에 담긴 ‘해악’은 스스로 치유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주디 버틀러의 말이 일리가 있지만(그가 이런 '재해석의 가능성' 개념을 너무 막 사용한다고 생각해서, 반박하려면 반박할 수도 있지만, 넘어가고),
저런 말을 언어폭력을 당한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좀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라고 할까요.(저런 논의를 감히 언어폭력 피해자 앞에서 할 수 있을까요?)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하지만 버틀러가 모든 규제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를 낳은 진정한 원인도 동시에 봐야 하며, 특히 그 문제해결의 권한을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는) 국가에게 넘겨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법에 의해 담론이 잘못 전유되어서는(misappropriation) 안되며, 대신 그 재전유(reappropriation)이 “보호된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때 그 결과는 더욱 바람직하고 민주적일 것이라는 게 버틀러의 주장이다."
이 부분이 핵심이긴 하겠지만, 아무튼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언어폭력에 대해 처벌이 극히 가벼운 나라이기도 하고..
"초기에 발화자의 의도에 담긴 ‘해악’은 스스로 치유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주디 버틀러의 말이 일리가 있지만(그가 이런 '재해석의 가능성' 개념을 너무 막 사용한다고 생각해서, 반박하려면 반박할 수도 있지만, 넘어가고),
저런 말을 언어폭력을 당한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좀 현실에서 벗어난 이야기,라고 할까요.(저런 논의를 감히 언어폭력 피해자 앞에서 할 수 있을까요?)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하지만 버틀러가 모든 규제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를 낳은 진정한 원인도 동시에 봐야 하며, 특히 그 문제해결의 권한을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는) 국가에게 넘겨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법에 의해 담론이 잘못 전유되어서는(misappropriation) 안되며, 대신 그 재전유(reappropriation)이 “보호된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때 그 결과는 더욱 바람직하고 민주적일 것이라는 게 버틀러의 주장이다."
이 부분이 핵심이긴 하겠지만, 아무튼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언어폭력에 대해 처벌이 극히 가벼운 나라이기도 하고..
제가 드래곤볼에서 아주 감명 깊게 본 장면이 있습니다. 베지터와 손오공이 처음 만나 싸울때 베지터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사이어인은 태어나자마자 전사로서의 재능을 측정하는데 카카로트 너는 폐기물 수준이어서 지구 같은 형편없는 별로 보내졌고 나는 엘리트라 좋은 별을 정복하고 다녔다> 제가 완전히 대사를 외우고 있는건 아닌데 그런 내용의 대사였습니다. 막 베지터 일당에게 동료들이 살해당하고, 싸우려고 마음먹은 순간 저런 모욕적인 말까지 듣는다면 오죽이나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으련만은, 손오공의 대답은
'고마운 일이야. ... 더 보기
'고마운 일이야. ... 더 보기
제가 드래곤볼에서 아주 감명 깊게 본 장면이 있습니다. 베지터와 손오공이 처음 만나 싸울때 베지터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사이어인은 태어나자마자 전사로서의 재능을 측정하는데 카카로트 너는 폐기물 수준이어서 지구 같은 형편없는 별로 보내졌고 나는 엘리트라 좋은 별을 정복하고 다녔다> 제가 완전히 대사를 외우고 있는건 아닌데 그런 내용의 대사였습니다. 막 베지터 일당에게 동료들이 살해당하고, 싸우려고 마음먹은 순간 저런 모욕적인 말까지 듣는다면 오죽이나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으련만은, 손오공의 대답은
'고마운 일이야. 덕분에 난 지구에 왔지' 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저 착한 건지 멍청한건지 아니면 그냥 말장난 그만하고 싸움이나 시작하지는 건지 이렇게만 보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저 대답에 담긴 자신감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생의 비밀이나 자신의 성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자라난 곳, 나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애착과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전시하고 포장할 필요가 없는 조용한 자부심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이어인의 왕자라는 프라이드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베지터는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질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것이 매력인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만화에서 의도한 대사인지 아니면 제가 살면서 가지게 된 가치관에 의한 제멋대로식의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주디 버틀러라는 사람의 주장과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걸로 일베나 메갈 발언에 이렇게 대응하자 라는 발상은 .... 도저히...
'고마운 일이야. 덕분에 난 지구에 왔지' 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저 착한 건지 멍청한건지 아니면 그냥 말장난 그만하고 싸움이나 시작하지는 건지 이렇게만 보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저 대답에 담긴 자신감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생의 비밀이나 자신의 성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자라난 곳, 나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애착과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전시하고 포장할 필요가 없는 조용한 자부심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이어인의 왕자라는 프라이드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베지터는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질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것이 매력인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만화에서 의도한 대사인지 아니면 제가 살면서 가지게 된 가치관에 의한 제멋대로식의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주디 버틀러라는 사람의 주장과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걸로 일베나 메갈 발언에 이렇게 대응하자 라는 발상은 .... 도저히...
정치적 올바름이나 자기검열에 구속되어 살다가도 이 모든 도덕적 의무로부터 시원하게 해방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유머예요. Saturday Night Live가 이에 능해요.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한창 잘 나갈 때 가슴수술로 구설수에 오르던 중에 SNL에 출연했는데 시침을 떼며 자기더러 가슴수술했다고 유언비어 날리는 이들더러 뭐라고 해요. 그 때 어떤 장치로 인해 가슴이 울렁울렁 움직여요. https://www.youtube.com/watch?v=nh... 더 보기
정치적 올바름이나 자기검열에 구속되어 살다가도 이 모든 도덕적 의무로부터 시원하게 해방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유머예요. Saturday Night Live가 이에 능해요.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한창 잘 나갈 때 가슴수술로 구설수에 오르던 중에 SNL에 출연했는데 시침을 떼며 자기더러 가슴수술했다고 유언비어 날리는 이들더러 뭐라고 해요. 그 때 어떤 장치로 인해 가슴이 울렁울렁 움직여요. https://www.youtube.com/watch?v=nhj231djxVE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유머로 승화시키면 갈등해소역할을 해요. 한국 SNL에서 이예원양을 출연시켜 이런 시도를 했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aQhaowNGuqg 예원양이 눈물을 글썽거리는 바람에 카타르시스를 주는 데 좀 실패를 한 듯요. 갈등이 해소되려면 진짜 웃겨야 돼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메갈리아 만화가 너무 유쾌했어요. 웃기잖아요. 메갈리아만화에 나온 '딱 맞노'에 웃음이 폭발하는 것 등은 알게 모르게 신의 한 수일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언젠가 헤칼트님의 댓글에서 고등학생들의 일상적인 일베용어사용에 대해 엿들을 수 있었는데요. '노란 물체가 있어서 '노랗노'만 해도 빵 터지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전 상상이 잘 됐어요. 정말 웃긴 그런 풍경요. 그 웃음은 노통에 대한 조롱과는 일그램도 연관이 없어요. '---노'가 일베에 의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 이미 아는 건 우리에게 자의식을 강요하지만 메갈만화에서 '딱 맞노'란 대사에 빵 터지며 그만 자기도 모르게 가드를 놓아버려요. 워마드조차도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그 만화에 깔깔깔 웃었다고 하니 갑자기 치열한 싸움을 하다가 마치 휴전상황이라도 맞이한 듯한 착각이 들었을 정도였어요. 백만명의 노사모들이 적극적으로 '---노'라는 어투를 쏟아내며 맹활약하면 '---노'가 강요하는 자의식이 옅어질 지도 모를 일이에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메갈리아 만화가 너무 유쾌했어요. 웃기잖아요. 메갈리아만화에 나온 '딱 맞노'에 웃음이 폭발하는 것 등은 알게 모르게 신의 한 수일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언젠가 헤칼트님의 댓글에서 고등학생들의 일상적인 일베용어사용에 대해 엿들을 수 있었는데요. '노란 물체가 있어서 '노랗노'만 해도 빵 터지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전 상상이 잘 됐어요. 정말 웃긴 그런 풍경요. 그 웃음은 노통에 대한 조롱과는 일그램도 연관이 없어요. '---노'가 일베에 의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 이미 아는 건 우리에게 자의식을 강요하지만 메갈만화에서 '딱 맞노'란 대사에 빵 터지며 그만 자기도 모르게 가드를 놓아버려요. 워마드조차도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그 만화에 깔깔깔 웃었다고 하니 갑자기 치열한 싸움을 하다가 마치 휴전상황이라도 맞이한 듯한 착각이 들었을 정도였어요. 백만명의 노사모들이 적극적으로 '---노'라는 어투를 쏟아내며 맹활약하면 '---노'가 강요하는 자의식이 옅어질 지도 모를 일이에요.
전 말이죠, 일베나 메갈에서 보던거 PGR이나 홍차넷에서도 봅니다. 홍차넷 최근 몇달 박터졌죠? 어쩜 그렇게 다들 예의바르게 폭력적이신지 감탄했습니다. 지금 제 댓글도 그렇구요. 이런걸 저 주틀러 주장을 적용시키면 토비님이 주의를 줄 필요도 없고 게시물이나 댓글을 삭제할 필요도 없고 벌점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눈부심님 같은 주장 질리도록 많이 봤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어떤 사람들은 한창 일베가 기승을 부릴때만 그 주장을 했고 또 다른 쪽 사람들은 그땐 가만히 있다가 메갈이 치고올라오니 이제서야 그 주장 하더라구요. 그 표현방식은 일베,메갈 방식일때도 있고 PGR,홍차넷 방식일때도 있는데 속마음은 똑같다고 봅니다.
혐오발언과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생리컵을 사용해보려고 여기저기 찾아보는데 메갈에서 나온 글이 제일 잘 정리가 되어있더라고요. 문체는 읽기 거북했지만 인포메이션 자체는 유용했어요. 암튼 근데 그 글속에서 자궁을 포궁이라 바꿔쓰자! 라고 하더라고요. 자궁을 "아들 자"를 쓰니까 남아선호사상이 깔린 단어라 "세포 포"로 바꿔쓰자구요. 저는 이게 좀 짜증났던게, 눈부심님 말씀대로 언어는 (혐오성이 있던 없던간에) 발화자를 떠나면 개개인의 리스너/독자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 거고, 그 시대의 다수가 느끼는 의미에 따라 언어가 바... 더 보기
혐오발언과는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생리컵을 사용해보려고 여기저기 찾아보는데 메갈에서 나온 글이 제일 잘 정리가 되어있더라고요. 문체는 읽기 거북했지만 인포메이션 자체는 유용했어요. 암튼 근데 그 글속에서 자궁을 포궁이라 바꿔쓰자! 라고 하더라고요. 자궁을 "아들 자"를 쓰니까 남아선호사상이 깔린 단어라 "세포 포"로 바꿔쓰자구요. 저는 이게 좀 짜증났던게, 눈부심님 말씀대로 언어는 (혐오성이 있던 없던간에) 발화자를 떠나면 개개인의 리스너/독자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 거고, 그 시대의 다수가 느끼는 의미에 따라 언어가 바뀌는 과정이라 생각하거든요. 근데 자궁이란 단어를 단지 "아들 자 = 남아선호사상 이니 바꾸자!" 라고하는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도 ~~코 하는 여자 이름은 "아들 자" 자를 쓰잖아요. 또 자식이란 단어의 의미도 남자아이만 지칭하는 건 아니구요. 이런 식으로 저는 "아들 자" 자가 현대에선 그냥 성별에 상관없이 아이, child를 의미한다 생각하는데, 굳이 이렇게 꼬투리까지 잡아가며 "남자"라는 의미를 씻어내야 하는가? 벌써 "아들 자"라는 문자가 가지는 의미속에 남자아이란 의미는 많이 희석되었는데도?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런데 보통 여초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더라고요. 적어도 단어가 바뀜으로서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느냐 하면서요. 하지만 굳이 애초부터 중립적으로 쓰이고 있던 단어한테 까지 pc함을 강요하는건 프로불편러중에서도 아주 초일류 프로페셔녈이 아닌가 싶거든요. 그렇게 프로페셔널한 프로불편러들의 입맛에 맞춰주는건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한쪽으로만 그렇게 몰아가면 다른 쪽의 프로불편러들이 반발하겠죠.
아무튼 그냥 일개 단어에도 이런 느낌을 받는 저인데, 전태일 같은 분의 성함을 갖고 저런 짓 하는것은 정말 할말을 잃게 만듭니다. 지금 누구덕분에 그런 소리를 지껄일수 있는건지 알기나 하는지.
아무튼 그냥 일개 단어에도 이런 느낌을 받는 저인데, 전태일 같은 분의 성함을 갖고 저런 짓 하는것은 정말 할말을 잃게 만듭니다. 지금 누구덕분에 그런 소리를 지껄일수 있는건지 알기나 하는지.
저는 포궁이 자궁보다 웃긴다 생각드는게, 낙태문제와도 관련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낙태된 fetus는 인간이냐 아니냐?의 문제와도 연결되어있으니까요. 단순 세포이냐 아이냐... 저는 아이라고 보는 사람이지만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에요. 임산부의 상황에 따라 낙태가 더 득이 될수도 있는 거니까요... 암튼 어렵습니다 ㅠㅠ
영어와 다른 언어에서도 젠더문제는 민감한 것 같아요. Latino/latina도 아예 그냥 latinx 라고 쓰는 사람들도 봤구요, he/she (또는 she/he)도 xe라고 쓰자! 라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저는 그냥 singular they로 쓰면 안되ㅠㅠ..? 라는 입장이에요 ㅎㅎ;;
영어와 다른 언어에서도 젠더문제는 민감한 것 같아요. Latino/latina도 아예 그냥 latinx 라고 쓰는 사람들도 봤구요, he/she (또는 she/he)도 xe라고 쓰자! 라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저는 그냥 singular they로 쓰면 안되ㅠㅠ..? 라는 입장이에요 ㅎㅎ;;
최근에 재미있게 본 유머 동영상이 있는데, PGR과 홍차넷 유게에 모두 올라왔는데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귀여운 남매가 자기 얼굴만한 글러브를 끼고 노는데 여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하이킥에과 펀치에 이은 마운트 자세로 오빠를 쥐어 패는 영상이었습니다. 댓글 반응은 '하이킥 제대로다' '격투기 선수의 자질이 있다' 등등 여자아이의 싸움실력(?)에 대한 감탄이 많았는데, 사실 모두들 속마음은 '너무 귀여워 >_<'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베랑 메갈을 볼때 그런 느낌입니다. 물론 그들의 반사회적 발언들은 엄중히... 더 보기
최근에 재미있게 본 유머 동영상이 있는데, PGR과 홍차넷 유게에 모두 올라왔는데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귀여운 남매가 자기 얼굴만한 글러브를 끼고 노는데 여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하이킥에과 펀치에 이은 마운트 자세로 오빠를 쥐어 패는 영상이었습니다. 댓글 반응은 '하이킥 제대로다' '격투기 선수의 자질이 있다' 등등 여자아이의 싸움실력(?)에 대한 감탄이 많았는데, 사실 모두들 속마음은 '너무 귀여워 >_<'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베랑 메갈을 볼때 그런 느낌입니다. 물론 그들의 반사회적 발언들은 엄중히 처벌되어야 하지만 그 유치함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반면 PGR과 홍차넷을 보면, 물론 두 사이트의 예의바름은 저도 아주 좋아합니다. 아무리 상대가 싫어도 그런 예의는 기본이라고 생각하구요. 다만 제가 감탄하는건 상대방에게 데미지를 입히는 그 화려한 스킬과 힘입니다. 그 스킬과 힘이 뛰어난 만큼 잔인함도 남매의 격투 같은게 아니라 정말 조자룡이 백만대군을 가르며 수많은 사람의 (진짜)피를 땅에 뿌리는 듯한 차이가 있어요. 엄청난 글솜씨로 공격력을 보여주시더라구요. 그렇다고 그 글에 진짜 사람이 죽는건 아니니 무섭거나 그런건 아닌데 뭐랄까... 부럽달까... 나도 저렇게 글 잘 써서 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 명치를 찌르고 싶다... 같은 느낌... 지금 보시면 제 댓글이 얼마나 유치합니까? 마운트 자세로 여자아이한테 얻어 터지는 오빠 같네요 ;
근데 사실 이 얘기를 메갈리안이나 워마드의 언어에 적용하면 너무 우습게 되어요.
우리 사회의 남녀 현실이 매드 맥스 영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거나 영화에서 현실과 유사한 점을 찾아내면 나름의 감상이 될 거에요.
그런데 매드 맥스 영화에서 성별을 바꿔 버리면 그건 그냥 코미디가 되는데 그건 말이 안되기 때문이에요. 말이 안되는 이유는 현실과 매치가 안되기 때문이죠. 혹은 매드 맥스 같은 세상은 그대로 두고 성별을 바꿔 버리자는 주장을 해도 역시 코미디가 되는데 이것 역시 도덕적이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주장이라서 웃긴 ... 더 보기
우리 사회의 남녀 현실이 매드 맥스 영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거나 영화에서 현실과 유사한 점을 찾아내면 나름의 감상이 될 거에요.
그런데 매드 맥스 영화에서 성별을 바꿔 버리면 그건 그냥 코미디가 되는데 그건 말이 안되기 때문이에요. 말이 안되는 이유는 현실과 매치가 안되기 때문이죠. 혹은 매드 맥스 같은 세상은 그대로 두고 성별을 바꿔 버리자는 주장을 해도 역시 코미디가 되는데 이것 역시 도덕적이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주장이라서 웃긴 ... 더 보기
근데 사실 이 얘기를 메갈리안이나 워마드의 언어에 적용하면 너무 우습게 되어요.
우리 사회의 남녀 현실이 매드 맥스 영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거나 영화에서 현실과 유사한 점을 찾아내면 나름의 감상이 될 거에요.
그런데 매드 맥스 영화에서 성별을 바꿔 버리면 그건 그냥 코미디가 되는데 그건 말이 안되기 때문이에요. 말이 안되는 이유는 현실과 매치가 안되기 때문이죠. 혹은 매드 맥스 같은 세상은 그대로 두고 성별을 바꿔 버리자는 주장을 해도 역시 코미디가 되는데 이것 역시 도덕적이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주장이라서 웃긴 거죠.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처음에 웃겼던 이유는 단순히 성별만 바꿔서 말했을 뿐인데 얼마나 어이가 없어지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드러냄에는 정치적 실천성이 있죠.
그러니까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혐오 발언이 아니라 혐오 발언을 대응하는 방식으로서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에 더 부합해요. 여자를 향한 수많은 혐오 발언 앞에 구구절절 PC의 기준을 늘어놓으며 상대방의 도덕적 지위를 타락시키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도덕적 지위를 내려놓으면서 단순히 성별만 바꿔도 이렇게 된다는 보여주고 그야말로 언어를 전유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메갈리아나 워마드에서 생성하는 혐오 발언, 예를 들면 태일해라(지금 처음 알았네요)를 다시 전유해오자고 하는 건 마치 매드 맥스에서 성별을 바꾸자고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과 같은 코미디가 되고 말아요.
성별을 바꾸자는 이야기는 여성이 혐오 발언의 발화자가 되는 것도 여성이 주체성을 띄게 되므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페미니즘이 가끔 보여주는 이론적인 빈약함을 반복하는 게 되고요.
밑에서 워마드가 이걸 보고 좋아했다는데서 식겁한 게 아마 비슷한 이유 같아요. 성별을 바꾼 매드 맥스가 코미디가 되는데 워마드가 콘텐츠 생산자 혹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대상이 되었다는 불쾌감을 이겨내고) 이걸 즐겼을까 아니면 콘텐츠의 대상이 되었다는 뿌듯함일까요. 조지 부시가 자기를 전쟁광 악마에 비유한 작품을 듣고 껄껄 웃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중동의 독재자가 자기를 악마로 그린 그림을 보고 뿌듯해 하는 식겁함이었어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혐오 발언을 전유해오는 과정이었을 때 실천적 의미를 띄게 되고 페미니즘 이론적으로도 합치되었지만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전유해와야 할 혐오 발언이라고 하면 이건 코미디가 되고 이걸 메갈리아가 직접 주장하면 섬뜩한 소통불능성의 정치적 재앙이 되는 거에요.
주디스 버틀러와 여고생의 관계는 메갈리아와 한남충의 관계여야지요. 한남충과 메갈리아의 관계로 되면 진짜 이상해요.
우리 사회의 남녀 현실이 매드 맥스 영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거나 영화에서 현실과 유사한 점을 찾아내면 나름의 감상이 될 거에요.
그런데 매드 맥스 영화에서 성별을 바꿔 버리면 그건 그냥 코미디가 되는데 그건 말이 안되기 때문이에요. 말이 안되는 이유는 현실과 매치가 안되기 때문이죠. 혹은 매드 맥스 같은 세상은 그대로 두고 성별을 바꿔 버리자는 주장을 해도 역시 코미디가 되는데 이것 역시 도덕적이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주장이라서 웃긴 거죠.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처음에 웃겼던 이유는 단순히 성별만 바꿔서 말했을 뿐인데 얼마나 어이가 없어지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드러냄에는 정치적 실천성이 있죠.
그러니까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혐오 발언이 아니라 혐오 발언을 대응하는 방식으로서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에 더 부합해요. 여자를 향한 수많은 혐오 발언 앞에 구구절절 PC의 기준을 늘어놓으며 상대방의 도덕적 지위를 타락시키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도덕적 지위를 내려놓으면서 단순히 성별만 바꿔도 이렇게 된다는 보여주고 그야말로 언어를 전유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메갈리아나 워마드에서 생성하는 혐오 발언, 예를 들면 태일해라(지금 처음 알았네요)를 다시 전유해오자고 하는 건 마치 매드 맥스에서 성별을 바꾸자고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과 같은 코미디가 되고 말아요.
성별을 바꾸자는 이야기는 여성이 혐오 발언의 발화자가 되는 것도 여성이 주체성을 띄게 되므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페미니즘이 가끔 보여주는 이론적인 빈약함을 반복하는 게 되고요.
밑에서 워마드가 이걸 보고 좋아했다는데서 식겁한 게 아마 비슷한 이유 같아요. 성별을 바꾼 매드 맥스가 코미디가 되는데 워마드가 콘텐츠 생산자 혹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대상이 되었다는 불쾌감을 이겨내고) 이걸 즐겼을까 아니면 콘텐츠의 대상이 되었다는 뿌듯함일까요. 조지 부시가 자기를 전쟁광 악마에 비유한 작품을 듣고 껄껄 웃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중동의 독재자가 자기를 악마로 그린 그림을 보고 뿌듯해 하는 식겁함이었어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혐오 발언을 전유해오는 과정이었을 때 실천적 의미를 띄게 되고 페미니즘 이론적으로도 합치되었지만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전유해와야 할 혐오 발언이라고 하면 이건 코미디가 되고 이걸 메갈리아가 직접 주장하면 섬뜩한 소통불능성의 정치적 재앙이 되는 거에요.
주디스 버틀러와 여고생의 관계는 메갈리아와 한남충의 관계여야지요. 한남충과 메갈리아의 관계로 되면 진짜 이상해요.
김숙이 윤정수한테 어디 남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감히 밖에 싸돌아다녀, 어디 남자가 함부로 입을 놀려라고 했을때 정말 웃겨요. 김숙이 스스로 이걸 계속 진지하게 얘기할수록 더 웃긴데 우리 사회가 그건 김숙의 상식을 믿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래서 김숙이 농담이라고 변명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 사회에서 그 발언이 진지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현실 때문이에요. 사회적 현실을 무시시하고 떵떵거리는 김숙이 오히려 정치적 의미까지 갖게 되는 이유죠. 김숙의 발언을 보고 점잖치 못하다면서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김숙보다 더 사... 더 보기
우리 사회에서 그 발언이 진지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현실 때문이에요. 사회적 현실을 무시시하고 떵떵거리는 김숙이 오히려 정치적 의미까지 갖게 되는 이유죠. 김숙의 발언을 보고 점잖치 못하다면서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김숙보다 더 사... 더 보기
김숙이 윤정수한테 어디 남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감히 밖에 싸돌아다녀, 어디 남자가 함부로 입을 놀려라고 했을때 정말 웃겨요. 김숙이 스스로 이걸 계속 진지하게 얘기할수록 더 웃긴데 우리 사회가 그건 김숙의 상식을 믿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래서 김숙이 농담이라고 변명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 사회에서 그 발언이 진지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현실 때문이에요. 사회적 현실을 무시시하고 떵떵거리는 김숙이 오히려 정치적 의미까지 갖게 되는 이유죠. 김숙의 발언을 보고 점잖치 못하다면서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김숙보다 더 사회적 현실을 인지하지 못함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되니 이보다 더 웃긴 게 어딨을까요.
김숙 별명 중에 퓨리오숙이라는 게 있대요. 김숙을 퓨리오숙이 되도록 해야 세상이 평화롭지 않겠냐는 주장을 하면 디스토피아를 받아들이자는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되려나요. 그렇게 해서 제가 한남충이 되는 게 적어도 앞뒤가 맞지요. 저보고 메갈 우먼들에 지배를 벗어나 퓨리오남이 되라고 하면 이건 너무 이상해요.
우리 사회에서 그 발언이 진지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현실 때문이에요. 사회적 현실을 무시시하고 떵떵거리는 김숙이 오히려 정치적 의미까지 갖게 되는 이유죠. 김숙의 발언을 보고 점잖치 못하다면서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김숙보다 더 사회적 현실을 인지하지 못함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되니 이보다 더 웃긴 게 어딨을까요.
김숙 별명 중에 퓨리오숙이라는 게 있대요. 김숙을 퓨리오숙이 되도록 해야 세상이 평화롭지 않겠냐는 주장을 하면 디스토피아를 받아들이자는 우스꽝스러운 얘기가 되려나요. 그렇게 해서 제가 한남충이 되는 게 적어도 앞뒤가 맞지요. 저보고 메갈 우먼들에 지배를 벗어나 퓨리오남이 되라고 하면 이건 너무 이상해요.
홍성수 교수의 발제문 링크해 주셔서 고마워요. 따로 읽어볼게요. 홍교수가 페북에서 얼마 전에 버틀러 책 새로 번역된 걸 광고하면서 조만간 책 읽고 글 쓰겠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안 쓰시네...
저도 버틀러든 버틀러를 다룬 논문이든 읽어보지 못했고 해서 조심스러운데, 그가 주저인 Excitable Speech(번역서 제목은 혐오발언)를 쓴 게 벌써 20년 전인 1997년이잖아요. 당시에 언어가 유통되던 플랫폼은 지금과 많이 다를 거예요. 버틀러가 과연 어떤 플랫폼 위에서 이루어진 언어수행을 고찰하면서 연구해온 것인지 궁금해요. 한... 더 보기
저도 버틀러든 버틀러를 다룬 논문이든 읽어보지 못했고 해서 조심스러운데, 그가 주저인 Excitable Speech(번역서 제목은 혐오발언)를 쓴 게 벌써 20년 전인 1997년이잖아요. 당시에 언어가 유통되던 플랫폼은 지금과 많이 다를 거예요. 버틀러가 과연 어떤 플랫폼 위에서 이루어진 언어수행을 고찰하면서 연구해온 것인지 궁금해요. 한... 더 보기
홍성수 교수의 발제문 링크해 주셔서 고마워요. 따로 읽어볼게요. 홍교수가 페북에서 얼마 전에 버틀러 책 새로 번역된 걸 광고하면서 조만간 책 읽고 글 쓰겠다고 그랬던 거 같은데 안 쓰시네...
저도 버틀러든 버틀러를 다룬 논문이든 읽어보지 못했고 해서 조심스러운데, 그가 주저인 Excitable Speech(번역서 제목은 혐오발언)를 쓴 게 벌써 20년 전인 1997년이잖아요. 당시에 언어가 유통되던 플랫폼은 지금과 많이 다를 거예요. 버틀러가 과연 어떤 플랫폼 위에서 이루어진 언어수행을 고찰하면서 연구해온 것인지 궁금해요. 한국의 경우에 PC통신의 언어, 커뮤니티 게시판 언어, 디씨 생태계의 언어,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언어가 각각 다른 수행 상황을 갖죠. 오프라인의 언어수행과는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에서 생장하여 오프라인을 잠식하는.
97년에 과연 버틀러가 인터넷을 기본 플랫폼으로 한 언어를 연구했는지(그러기 힘들었다고 봄), 혹은 그 뒤로 여러 매체들을 꾸준히 연구하면서 업데이트를 시켜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일베나 메갈은 인터넷 언어거든요. 인터넷 언어는 집단을 전제로 하는데, 예를 들어주신 일상생활의 언어 (너 레즈지? -어. 그런데 왜?)는 동등한 1대1 관계를 전제해요. 오프에서 소수자가 저렇게 반응했다면 사이다~겠지만, 예를 들어 모 흉흉한 게시판에서 어떤 유저가 다른 유저한테 '너 메갈하지?'라고 물었을 때 '어, 그런데 왜?'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인터넷에서는 군중이 항상 지켜보며 기억하고 낙인을 찍고 있고, 익명이나 가면 뒤에 숨어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죠. 입말이 아니고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언제든 '캡처'를 해서 증거(그가 메갈이란 것은 팩트다)를 남길 준비도 되어 있고요. 오프라인의 언어수행 환경과는 전적으로 달라요. 메갈리아든 여초사이트든 그들은 영리하게도 그 지켜보는 현장 군중의 다수를 자기 편 군중으로 만들어놓는 것에서 시작했죠. 조직화.
버틀러의 말이 원론적으로는 맞는데, 어떤 플랫폼을 특정하지 않고 혐오발언의 자유유통 전반에 자신감을 갖는 것은 오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queer의 용법 전복은 대단히 성공적인 사례인데, 그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용법이 더 좋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썼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단어 하나의 뜻을 바꾸기 위해 엄청난 물량의 사회운동 에너지를 투척;;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메갈리아에서 '메갈리아 용어사전'을 만들고 '맘충'이란 혐오표현의 뜻을 '개념없는 맘'에서 '엄마 없으면 밥도 못먹는 기생충적인 인간'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죠. 사실 페미니즘이나 소수자운동의 역사는 사전을 다시 쓰려는 역사와도 비슷한 것인데, 그거 쉽지 않다는...
저도 버틀러든 버틀러를 다룬 논문이든 읽어보지 못했고 해서 조심스러운데, 그가 주저인 Excitable Speech(번역서 제목은 혐오발언)를 쓴 게 벌써 20년 전인 1997년이잖아요. 당시에 언어가 유통되던 플랫폼은 지금과 많이 다를 거예요. 버틀러가 과연 어떤 플랫폼 위에서 이루어진 언어수행을 고찰하면서 연구해온 것인지 궁금해요. 한국의 경우에 PC통신의 언어, 커뮤니티 게시판 언어, 디씨 생태계의 언어,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언어가 각각 다른 수행 상황을 갖죠. 오프라인의 언어수행과는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에서 생장하여 오프라인을 잠식하는.
97년에 과연 버틀러가 인터넷을 기본 플랫폼으로 한 언어를 연구했는지(그러기 힘들었다고 봄), 혹은 그 뒤로 여러 매체들을 꾸준히 연구하면서 업데이트를 시켜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일베나 메갈은 인터넷 언어거든요. 인터넷 언어는 집단을 전제로 하는데, 예를 들어주신 일상생활의 언어 (너 레즈지? -어. 그런데 왜?)는 동등한 1대1 관계를 전제해요. 오프에서 소수자가 저렇게 반응했다면 사이다~겠지만, 예를 들어 모 흉흉한 게시판에서 어떤 유저가 다른 유저한테 '너 메갈하지?'라고 물었을 때 '어, 그런데 왜?'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인터넷에서는 군중이 항상 지켜보며 기억하고 낙인을 찍고 있고, 익명이나 가면 뒤에 숨어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죠. 입말이 아니고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언제든 '캡처'를 해서 증거(그가 메갈이란 것은 팩트다)를 남길 준비도 되어 있고요. 오프라인의 언어수행 환경과는 전적으로 달라요. 메갈리아든 여초사이트든 그들은 영리하게도 그 지켜보는 현장 군중의 다수를 자기 편 군중으로 만들어놓는 것에서 시작했죠. 조직화.
버틀러의 말이 원론적으로는 맞는데, 어떤 플랫폼을 특정하지 않고 혐오발언의 자유유통 전반에 자신감을 갖는 것은 오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queer의 용법 전복은 대단히 성공적인 사례인데, 그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용법이 더 좋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썼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단어 하나의 뜻을 바꾸기 위해 엄청난 물량의 사회운동 에너지를 투척;;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메갈리아에서 '메갈리아 용어사전'을 만들고 '맘충'이란 혐오표현의 뜻을 '개념없는 맘'에서 '엄마 없으면 밥도 못먹는 기생충적인 인간'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죠. 사실 페미니즘이나 소수자운동의 역사는 사전을 다시 쓰려는 역사와도 비슷한 것인데, 그거 쉽지 않다는...
말씀대로 자궁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자궁의 '자'가 아들 자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겠지요. 생각을 환기할 기회를 주어 좋다고들 합니다만, 어휘의 의미는 관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 이상 아들 자와 자궁에 대해서 모두 아무 (성차별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가 최고의 상황인 것이죠. 도리어 생각을 하는 순간 지는 거...전형적인 기원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상 한도 끝도 없기도 하고요. 부수로만 따져도 수없는 어휘가 아들 자와 연관되어 있죠. 예컨대 글자 자는 아들 자에 갓머리 씌운 것인 거고... 결정적으로, 작금은 여아선호가 강한 시대이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만큼 남아선호를 기를 쓰고 타파하는 것이 별 의미없기도 하고요.
미러링을 전유, 메갈리아와 한남충의 관계가 아닌 한남충과 메갈리아의 관계.. 이해는 했는데 너무 복잡해서 머리가 아파요 ㅠㅠ
글에 나와 있는 부분에만 이해를 적용하면 될 거예요. '태일해라'를 전유할 필요는 없어요;; 여학생의 '레즈비언이에요?!'란 도발에 청자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혐오가 가중되기도 해체되기도 하다는 점이 흥미로왔어요. 버틀러교수가 말한 queer라는 언어전유과정은 애초발화자의 혐오를 거두는 성과로 인해 칭송받는 것이기 때문에 메갈리아/워마드의 '재기해'같은, 일베를 미러링하는 신조어창출행위가 그들의 가치있... 더 보기
글에 나와 있는 부분에만 이해를 적용하면 될 거예요. '태일해라'를 전유할 필요는 없어요;; 여학생의 '레즈비언이에요?!'란 도발에 청자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혐오가 가중되기도 해체되기도 하다는 점이 흥미로왔어요. 버틀러교수가 말한 queer라는 언어전유과정은 애초발화자의 혐오를 거두는 성과로 인해 칭송받는 것이기 때문에 메갈리아/워마드의 '재기해'같은, 일베를 미러링하는 신조어창출행위가 그들의 가치있... 더 보기
미러링을 전유, 메갈리아와 한남충의 관계가 아닌 한남충과 메갈리아의 관계.. 이해는 했는데 너무 복잡해서 머리가 아파요 ㅠㅠ
글에 나와 있는 부분에만 이해를 적용하면 될 거예요. '태일해라'를 전유할 필요는 없어요;; 여학생의 '레즈비언이에요?!'란 도발에 청자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혐오가 가중되기도 해체되기도 하다는 점이 흥미로왔어요. 버틀러교수가 말한 queer라는 언어전유과정은 애초발화자의 혐오를 거두는 성과로 인해 칭송받는 것이기 때문에 메갈리아/워마드의 '재기해'같은, 일베를 미러링하는 신조어창출행위가 그들의 가치있는 언어전유노력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낭패스럽죠(우리의 전유행위 말고 메갈리아의 전유행위는 주디스 버틀러와 여고생의 관계, 즉 메갈리아와 한남충의 관계에서 메갈리아가 합리화하려는 그 입장과 맥락이 통하긴 해요. 창남 같은 경우 합당하게 들리잖아요. 와 저 이거 쓰면서 머리가 핑핑 돌아요). 그런데 그 혐오언어들을 받아들이는 청자의 반응이 혐오를 가중시키는 그 실재하는 현상은 뭔가 놀라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당위를 떠나 무슨 신기한 물리현상 같아요.
글에 나와 있는 부분에만 이해를 적용하면 될 거예요. '태일해라'를 전유할 필요는 없어요;; 여학생의 '레즈비언이에요?!'란 도발에 청자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혐오가 가중되기도 해체되기도 하다는 점이 흥미로왔어요. 버틀러교수가 말한 queer라는 언어전유과정은 애초발화자의 혐오를 거두는 성과로 인해 칭송받는 것이기 때문에 메갈리아/워마드의 '재기해'같은, 일베를 미러링하는 신조어창출행위가 그들의 가치있는 언어전유노력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낭패스럽죠(우리의 전유행위 말고 메갈리아의 전유행위는 주디스 버틀러와 여고생의 관계, 즉 메갈리아와 한남충의 관계에서 메갈리아가 합리화하려는 그 입장과 맥락이 통하긴 해요. 창남 같은 경우 합당하게 들리잖아요. 와 저 이거 쓰면서 머리가 핑핑 돌아요). 그런데 그 혐오언어들을 받아들이는 청자의 반응이 혐오를 가중시키는 그 실재하는 현상은 뭔가 놀라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당위를 떠나 무슨 신기한 물리현상 같아요.
와따 시기의 문제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모이라님 짱 똑똑하세요!
온라인상의 혐오발언은 기록으로 남는다는 매우 특이한 성질 때문에 발언자체가 주홍글씨로 남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아주 잠깐 일베를 눈팅했는데 말로만 전해 듣는 워마드나 공개 다 되어 있는 일베글을 보면 자신의 신상에 빨간줄을 스스로 긋는 어리석은 중생들 같아요. 일베/워마드형 혐오발언은 손쉽게 각인되는만큼 혐오감에의 접근성을 높이고 대중을 괴롭게 하지만 온라인발화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생의 문신으로 남아요. 저는 이 씻을 수 없는 기록의 성질자체가 그들이 갖는 형벌이란 생각도 들어요. 전 '잊혀질 권리'에 굉장히 민감하거든요.
+) 낙인찍기 말씀하셨는데 그건 사상검증 하거나 낙인찍는 사람의 잘못이니까..
온라인상의 혐오발언은 기록으로 남는다는 매우 특이한 성질 때문에 발언자체가 주홍글씨로 남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아주 잠깐 일베를 눈팅했는데 말로만 전해 듣는 워마드나 공개 다 되어 있는 일베글을 보면 자신의 신상에 빨간줄을 스스로 긋는 어리석은 중생들 같아요. 일베/워마드형 혐오발언은 손쉽게 각인되는만큼 혐오감에의 접근성을 높이고 대중을 괴롭게 하지만 온라인발화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생의 문신으로 남아요. 저는 이 씻을 수 없는 기록의 성질자체가 그들이 갖는 형벌이란 생각도 들어요. 전 '잊혀질 권리'에 굉장히 민감하거든요.
+) 낙인찍기 말씀하셨는데 그건 사상검증 하거나 낙인찍는 사람의 잘못이니까..
진보언론이 워마드와 메갈리아4를 구분하지 않고 메갈리아로 퉁치며 폭력적인 언어에 침묵하고 감싸주는 건 이제 좀 정도껏 했으면 해요. 그거 비판한다고 미소지니척결을 잃는 게 아니에요. NL때문에 민주주의 안 할란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아요. 진보정당이나 언론이 뭔가 탁 까놓고 다 이야기하지 않는 건 제가 보기에 주류페미니스트들조차 메갈과 워마드에 깊숙히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운동권부류는 자기네들끼리 만든 강령에 따르면 일사천리로 운동전개가 되겠지만 온갖 잡탕이 모이는 커뮤니티를 자기들의 이념을 고수하며 이끌기란 불가능해요.
http://www.civic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2
http://news.donga.com/3/03/20141123/68112845/1
뭐 이런 것을 참고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딸바보'라는 것이 대중 팬시... 더 보기
http://news.donga.com/3/03/20141123/68112845/1
뭐 이런 것을 참고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딸바보'라는 것이 대중 팬시...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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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것을 참고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딸바보'라는 것이 대중 팬시 상품이 된 것도 딱 2000년대 중반부터고..
여아 선호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싶습니다. 대충 생각나는대로 열거해보자면
1. 아들을 낳아 가문을 잇는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으며
2. 남아에 비해 여아가 양육이 훨씬 쉬우며
3. 부모와의 유대감과 친밀도에 있어서 남아에 비해 여아가 훨씬 높으며
4. 상속에 있어서도 남아와 여아가 평등해졌으며
5. 혼인 직후부터 시집살이하는 여성의 비율이 낮아지고 분가가 일반화 되었으며
6. 한국이 경제적 안정/교착 국면에 이르면서 남아의 기대가치가 떨어졌다(부모 입장에서는 격변기에는 남아가, 안정기에는 여아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자산이죠).
등등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정리하면 '아들 낳으면 키우는 데 힘은 배로 들어가는데, 그래봐야 부모 소 닭 보듯 하잖아. 낳고 길러봐야 남는 게 없어...그렇다고 요즘 아들 낳는다고 집안을 일으키길 해 뭘해. 되려 결혼할 때 돈은 훨씬 많이 들어가지. 대 잇는 거야 옛날에나 중요했지 요즘에 그게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이젠 딸들도 유산 똑같이 받는데. 예전처럼 시댁 들어가서 딸내미 얼굴 보기 힘든 시절도 아니고' 정도의 정서가 청장년층에는 상당히 농도 짙게 있다고 생각하네요.
http://news.donga.com/3/03/20141123/68112845/1
뭐 이런 것을 참고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딸바보'라는 것이 대중 팬시 상품이 된 것도 딱 2000년대 중반부터고..
여아 선호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싶습니다. 대충 생각나는대로 열거해보자면
1. 아들을 낳아 가문을 잇는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으며
2. 남아에 비해 여아가 양육이 훨씬 쉬우며
3. 부모와의 유대감과 친밀도에 있어서 남아에 비해 여아가 훨씬 높으며
4. 상속에 있어서도 남아와 여아가 평등해졌으며
5. 혼인 직후부터 시집살이하는 여성의 비율이 낮아지고 분가가 일반화 되었으며
6. 한국이 경제적 안정/교착 국면에 이르면서 남아의 기대가치가 떨어졌다(부모 입장에서는 격변기에는 남아가, 안정기에는 여아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자산이죠).
등등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정리하면 '아들 낳으면 키우는 데 힘은 배로 들어가는데, 그래봐야 부모 소 닭 보듯 하잖아. 낳고 길러봐야 남는 게 없어...그렇다고 요즘 아들 낳는다고 집안을 일으키길 해 뭘해. 되려 결혼할 때 돈은 훨씬 많이 들어가지. 대 잇는 거야 옛날에나 중요했지 요즘에 그게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이젠 딸들도 유산 똑같이 받는데. 예전처럼 시댁 들어가서 딸내미 얼굴 보기 힘든 시절도 아니고' 정도의 정서가 청장년층에는 상당히 농도 짙게 있다고 생각하네요.
1. 두 자녀 이상의 자녀를 계획하는 남아선호 가구들이 두번째 아이를 낙태함으로써 목표를 달성하곤 하였다는 관습은, 한자녀 문화 아래서는, 첫번째 아이를 낙태하는 방식으로 얼마든 전환될 수 있습니다. 일례로 1980년 한자녀 정책이 시행 된 중국의 경우를 보면, 1982년 107명, 1990년 113명, 2000년 116.9명, 2004년 121.18으로 출생성비 불균형이 확대되고 있다는 걸 알 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출생성비 균형을 출산률저하에 의해 강제적으로 맞추어진 성향이 강하다고 폄하하는건 타당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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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자녀 이상의 자녀를 계획하는 남아선호 가구들이 두번째 아이를 낙태함으로써 목표를 달성하곤 하였다는 관습은, 한자녀 문화 아래서는, 첫번째 아이를 낙태하는 방식으로 얼마든 전환될 수 있습니다. 일례로 1980년 한자녀 정책이 시행 된 중국의 경우를 보면, 1982년 107명, 1990년 113명, 2000년 116.9명, 2004년 121.18으로 출생성비 불균형이 확대되고 있다는 걸 알 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출생성비 균형을 출산률저하에 의해 강제적으로 맞추어진 성향이 강하다고 폄하하는건 타당하지 않아요.
2. 여아선호가 얼마나 과장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은기수 교수의 "동아시아 사회의 자녀 성선호"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2006년 시점 한국의 남아선호는 42%, 딸 선호는 34.2% 입니다. 여전히 남아선호가 강한 것 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연령대별 자료를 확인할 경우 조금 다른 결과가 있습니다. 남아선호를 보면 20대는 34.6%, 30대는 33.5%, 40대는 39%, 50대는 43.4%, 60대는 66.9% 입니다. 여아선호의 경우 20대는 46.2%, 30대는 42.5%, 40대는 30.6%, 50대는 32.1%, 60대는 15.1 입니다.
지금보다 결혼시기가 빨랐던 80-90년대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80-90년대 시점에 가임기의 여성을 25세-35세로 설정한다면, 그들이 딱 2006년 시점에 40,50대 입니다. 50대의 남아선호와 여아선호의 격차는 11.3% 이며, 40대는 8.4%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남아선호가 대두되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2006년 시점에 여아선호와 남아선호의 격차를 보면 20대는 11.6%, 30대는 9% 입니다. 여아선호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죠. 물론 80년 시점에 동일한 자료로 비교하지 않는 이상 한계는 존재합니다. 다만 그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80년대 남아선호만큼 여아선호가 심하다라고 말할 수 없을 뿐, 여아선호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생성비가 반전되지 않는 이유 중에는 그 시절과 달리 낙태가 불법화되었다는 점도 있을 겁니다. 또한 위 자료는 선호의 방향만을 조사하고 있을 뿐 선호의 크기까지 조사하진 않았습니다. 이 두 점을 고려한다면, 불법으로 남아를 낙태할 만큼 여아선호의 정도가 크지 않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네요. 다만 현재의 출생성비가 역-불균형상태가 있지 않다고 하여 여아선호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 여아선호가 얼마나 과장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은기수 교수의 "동아시아 사회의 자녀 성선호"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2006년 시점 한국의 남아선호는 42%, 딸 선호는 34.2% 입니다. 여전히 남아선호가 강한 것 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연령대별 자료를 확인할 경우 조금 다른 결과가 있습니다. 남아선호를 보면 20대는 34.6%, 30대는 33.5%, 40대는 39%, 50대는 43.4%, 60대는 66.9% 입니다. 여아선호의 경우 20대는 46.2%, 30대는 42.5%, 40대는 30.6%, 50대는 32.1%, 60대는 15.1 입니다.
지금보다 결혼시기가 빨랐던 80-90년대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80-90년대 시점에 가임기의 여성을 25세-35세로 설정한다면, 그들이 딱 2006년 시점에 40,50대 입니다. 50대의 남아선호와 여아선호의 격차는 11.3% 이며, 40대는 8.4%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남아선호가 대두되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2006년 시점에 여아선호와 남아선호의 격차를 보면 20대는 11.6%, 30대는 9% 입니다. 여아선호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죠. 물론 80년 시점에 동일한 자료로 비교하지 않는 이상 한계는 존재합니다. 다만 그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80년대 남아선호만큼 여아선호가 심하다라고 말할 수 없을 뿐, 여아선호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생성비가 반전되지 않는 이유 중에는 그 시절과 달리 낙태가 불법화되었다는 점도 있을 겁니다. 또한 위 자료는 선호의 방향만을 조사하고 있을 뿐 선호의 크기까지 조사하진 않았습니다. 이 두 점을 고려한다면, 불법으로 남아를 낙태할 만큼 여아선호의 정도가 크지 않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네요. 다만 현재의 출생성비가 역-불균형상태가 있지 않다고 하여 여아선호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버스운전기사 아저씨께 수고하신다고 초콜렛을 건네주는 일베, 세월호 아이들, 민간잠수사들 등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러 간 일베도 있었어요. 살인사건현장을 따라가 본 일베(출발 전에 집에서 칼 쥐고 포즈). 제가 한 사람의 아이디를 눌러서 작성글을 읽어보다 발견한 건데 초콜렛, 세월호, 살인사건현장방문 일베가 한 페이지에 모두 떴는데 아이디가 달랐어요. 같은 사람이 아이디를 바꾼 모양인지... 온갖 유흥업소, 오피스텔을 전전하며 수많은 여자들을 상대하다가 40대가 되어 여자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는 이야기에 다시 오싹해졌던..(왠지 여자... 더 보기
버스운전기사 아저씨께 수고하신다고 초콜렛을 건네주는 일베, 세월호 아이들, 민간잠수사들 등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러 간 일베도 있었어요. 살인사건현장을 따라가 본 일베(출발 전에 집에서 칼 쥐고 포즈). 제가 한 사람의 아이디를 눌러서 작성글을 읽어보다 발견한 건데 초콜렛, 세월호, 살인사건현장방문 일베가 한 페이지에 모두 떴는데 아이디가 달랐어요. 같은 사람이 아이디를 바꾼 모양인지... 온갖 유흥업소, 오피스텔을 전전하며 수많은 여자들을 상대하다가 40대가 되어 여자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는 이야기에 다시 오싹해졌던..(왠지 여자를 물건취급할 것 같은 느낌에..)
결국 우리는 일베를 많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베에 대한 공포는 미국사람들의 백신공포만큼이나 과장되어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다가도 여자다보니 온갖 글에 퍼져있는 여혐언어들을 보면 정말 무서워요.
결국 우리는 일베를 많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베에 대한 공포는 미국사람들의 백신공포만큼이나 과장되어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다가도 여자다보니 온갖 글에 퍼져있는 여혐언어들을 보면 정말 무서워요.
1. 정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실시되는 한자녀 정책 아래에서 신혼부부들에게조차 자녀계획이 강제되는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는게 오히려 비정상적인 비교입니다. 또한 첫 자녀로도 사실 굳이 따지고보면 남아가 더 선호되는데 이건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조차도 마찬가지인 문제입니다. (http://www.gallup.com/poll/148187/americans-prefer-boys-girls-1941.aspx... 더 보기
1. 정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실시되는 한자녀 정책 아래에서 신혼부부들에게조차 자녀계획이 강제되는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는게 오히려 비정상적인 비교입니다. 또한 첫 자녀로도 사실 굳이 따지고보면 남아가 더 선호되는데 이건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조차도 마찬가지인 문제입니다. (http://www.gallup.com/poll/148187/americans-prefer-boys-girls-1941.aspx)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자녀를 대상으로 성별낙태를 하지 않는 건 일반적으로 첫 자녀는 이른 시기에 가지게 되며 중국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그 시기에는 가족계획을 수립하기 이전이거나 또 비교적 늦은 시기에 혼인을 하여 한 자녀만 가지게 될 경우 성별선호에 따라 낙태를 하는 것이 너무 나이가 많은 부모에게는 너무 큰 부담등으로 작용하기 때문 등등..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사회적 인식변화(깨진 유리창 이론)보다 저출산이 성비균형을 가져왔다는 측이 사실 통계적으로보면 더 깔끔한 결론입니다. 특수한 통제사회인 중국을 가져와 중국은 오히려 강해졌는데 반대가 아니냐하는 것 보다는 사실 이건 의론이 분분하니까 이해라도 하겠습니다.
2. 한 자녀만 있는 경우에 남아와 여아 중 누구를 고를지 중에 20대의 과반이 여아를 선택한 설문도 보긴 했으나, 여전히 '남아'가 있을 경우 추가자녀 계획없다는 것이 과반인게 현실인식입니다. 단순히 아들딸 선호보다 보다 현실적으로 '남아'가 있을 경우 '여아'를 낳기 위해 아이를 낳는 비율과 '여아'가 있을 경우 남아를 낳기 위해 추가적으로 아이를 낳는 비율 등.. 여전히 둘째의 경우 남아가 출생성비에서 앞선다는 걸 2008년에 본 것이 현실입니다. 여아선호를 말하기엔 이릅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0209_0013468508&cID=10201&pID=10200
사회적 인식변화(깨진 유리창 이론)보다 저출산이 성비균형을 가져왔다는 측이 사실 통계적으로보면 더 깔끔한 결론입니다. 특수한 통제사회인 중국을 가져와 중국은 오히려 강해졌는데 반대가 아니냐하는 것 보다는 사실 이건 의론이 분분하니까 이해라도 하겠습니다.
2. 한 자녀만 있는 경우에 남아와 여아 중 누구를 고를지 중에 20대의 과반이 여아를 선택한 설문도 보긴 했으나, 여전히 '남아'가 있을 경우 추가자녀 계획없다는 것이 과반인게 현실인식입니다. 단순히 아들딸 선호보다 보다 현실적으로 '남아'가 있을 경우 '여아'를 낳기 위해 아이를 낳는 비율과 '여아'가 있을 경우 남아를 낳기 위해 추가적으로 아이를 낳는 비율 등.. 여전히 둘째의 경우 남아가 출생성비에서 앞선다는 걸 2008년에 본 것이 현실입니다. 여아선호를 말하기엔 이릅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0209_0013468508&cID=10201&pID=10200
1-1 미국의 전세대는 남아를 더 선호하는군요. 하지만 유사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의 20-30대는 미국의 전세대보다도 훨씬 높게,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왜 미국을 인용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1-2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는게 비정상적인 비교라 말씀하신건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겁니다. 중국은 한자녀밖에 날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이 미리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들을 원할 경우 반드시 첫자녀로 아들을 택할겁니다. 반면에 한국은 첫아이를 낳는 시점에는 두번째 아이로 남아를 낳으면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겁니다. 그... 더 보기
1-2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는게 비정상적인 비교라 말씀하신건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겁니다. 중국은 한자녀밖에 날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이 미리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들을 원할 경우 반드시 첫자녀로 아들을 택할겁니다. 반면에 한국은 첫아이를 낳는 시점에는 두번째 아이로 남아를 낳으면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겁니다. 그... 더 보기
1-1 미국의 전세대는 남아를 더 선호하는군요. 하지만 유사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의 20-30대는 미국의 전세대보다도 훨씬 높게,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왜 미국을 인용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1-2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는게 비정상적인 비교라 말씀하신건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겁니다. 중국은 한자녀밖에 날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이 미리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들을 원할 경우 반드시 첫자녀로 아들을 택할겁니다. 반면에 한국은 첫아이를 낳는 시점에는 두번째 아이로 남아를 낳으면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를 주장하시기 위해서는 한국사람들은 '남아'를 선호한다는걸 입증하셔야겠죠. 위에서 언급한 은기수 교수의 논문을 보면 20대는 여아를 46.2% 선호하고 남아를 34.6% 선호합니다., 30대는 여아를 42.5% 선호하고 남아를 33.5% 선호하구요. 그렇다면 '사실'은 여전히 남아를 선호하지만 한자녀 가구를 구성하다보니 여아가 선택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남아존재시 추가출산확율이 여아존재시 추가출산확율보다 높다는 게 그 근거가 될 수 있을겁니다.
2. 그런데 해당 기사를 읽다가 의문점이 발생하더군요. 뉴시스의 기사는 송유진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기혼여성의 자녀 출산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분석' 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본 논문은 여성의 현재 연령과 결혼연령, 여성의 교육수준과 남성의 교육수준, 여 성의 경제활동 여부와 남성의 종사상 지위, 현존 자녀수, 현존 남아수, 거주지역이 자녀출산계획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습니다. 본 논문은 현존 여아수는 독립변수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본 논문은 [ '여아'가 있을 경우 남아를 낳기 위해 추가적으로 아이를 낳는 비율]을 제시하지 않았고, 따라서 여아가 있는 경우와 남아가 있는 경우를 비교대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위 논문이 남아선호 사상이 여전히 강하다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송유진이 현존 여아수를 독립변수로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논문에 따르면 ' 현존 남아자녀 수에 따라 셋째 자녀 이상의 출산계획이 달 라진다는 기존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현존 남아수 를 변수로 사용하였다(Kim 2007a; Park 2008)'라고 하였군요. 그래서 해당 논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김정석 교수의 '기혼여성의 출산아수별 추가출산계획' 이더군요. 그런데 위 논문에서도 여전히 남아 존재시 2번째 자녀 출산확율이 67.7%로 감소한다라는 결론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아 존재시 두번째 아이 출산확율 수치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위 논문 통계자료에 유의성 수치가 나와있지 않아 통계의 정확성도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저는 두 논문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를 선호하지만 한자녀 가구를 구성하다보니 여아가 선택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알 수 없습니다. 근거가 무엇인가요? 다른 논문이 있다면 소개부탁드립니다.
1-2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는게 비정상적인 비교라 말씀하신건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겁니다. 중국은 한자녀밖에 날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이 미리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들을 원할 경우 반드시 첫자녀로 아들을 택할겁니다. 반면에 한국은 첫아이를 낳는 시점에는 두번째 아이로 남아를 낳으면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를 주장하시기 위해서는 한국사람들은 '남아'를 선호한다는걸 입증하셔야겠죠. 위에서 언급한 은기수 교수의 논문을 보면 20대는 여아를 46.2% 선호하고 남아를 34.6% 선호합니다., 30대는 여아를 42.5% 선호하고 남아를 33.5% 선호하구요. 그렇다면 '사실'은 여전히 남아를 선호하지만 한자녀 가구를 구성하다보니 여아가 선택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남아존재시 추가출산확율이 여아존재시 추가출산확율보다 높다는 게 그 근거가 될 수 있을겁니다.
2. 그런데 해당 기사를 읽다가 의문점이 발생하더군요. 뉴시스의 기사는 송유진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기혼여성의 자녀 출산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분석' 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본 논문은 여성의 현재 연령과 결혼연령, 여성의 교육수준과 남성의 교육수준, 여 성의 경제활동 여부와 남성의 종사상 지위, 현존 자녀수, 현존 남아수, 거주지역이 자녀출산계획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습니다. 본 논문은 현존 여아수는 독립변수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본 논문은 [ '여아'가 있을 경우 남아를 낳기 위해 추가적으로 아이를 낳는 비율]을 제시하지 않았고, 따라서 여아가 있는 경우와 남아가 있는 경우를 비교대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위 논문이 남아선호 사상이 여전히 강하다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송유진이 현존 여아수를 독립변수로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논문에 따르면 ' 현존 남아자녀 수에 따라 셋째 자녀 이상의 출산계획이 달 라진다는 기존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현존 남아수 를 변수로 사용하였다(Kim 2007a; Park 2008)'라고 하였군요. 그래서 해당 논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김정석 교수의 '기혼여성의 출산아수별 추가출산계획' 이더군요. 그런데 위 논문에서도 여전히 남아 존재시 2번째 자녀 출산확율이 67.7%로 감소한다라는 결론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아 존재시 두번째 아이 출산확율 수치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위 논문 통계자료에 유의성 수치가 나와있지 않아 통계의 정확성도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저는 두 논문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를 선호하지만 한자녀 가구를 구성하다보니 여아가 선택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알 수 없습니다. 근거가 무엇인가요? 다른 논문이 있다면 소개부탁드립니다.
가끔 기자들이 너무 얼토당토 않은 해석을 내놓을 때가 있어요. 중국이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비정상적이라고 해도 한국 출산률은 압도적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이고요. 그런 상황에서 첫째가 있을 때 둘째 성별의 선호도를 물어보는 상황도 아니고 첫째가 있을 때 둘째를 낳을 의지를 물어보고 성별 비교 데이터도 없는데 여기서 남아 선호 사상을 끌어내다니요. 저런 방식의 통계로 남아 선호 사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건 지나친 억지죠.
출산율은 이미 아웃라이어 상태고 가족 제도가 빠르게 붕괴되면서도 가부장제도가 남아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한 여아 선... 더 보기
출산율은 이미 아웃라이어 상태고 가족 제도가 빠르게 붕괴되면서도 가부장제도가 남아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한 여아 선... 더 보기
가끔 기자들이 너무 얼토당토 않은 해석을 내놓을 때가 있어요. 중국이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비정상적이라고 해도 한국 출산률은 압도적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이고요. 그런 상황에서 첫째가 있을 때 둘째 성별의 선호도를 물어보는 상황도 아니고 첫째가 있을 때 둘째를 낳을 의지를 물어보고 성별 비교 데이터도 없는데 여기서 남아 선호 사상을 끌어내다니요. 저런 방식의 통계로 남아 선호 사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건 지나친 억지죠.
출산율은 이미 아웃라이어 상태고 가족 제도가 빠르게 붕괴되면서도 가부장제도가 남아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한 여아 선호 현상을 만들어 냈다고 봐요. 몇몇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남아를 키우는데 사회적 비용이 더 발생한다는 통념을 반영하고 여아가 부모에게 더 살갗게 대한다는 편견 같은 게 작용하는 것이겠죠.
Barable님은 한국 사회가 여아 선호라니 그렇게 성평등주의적이리고 말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사람들이 머릿속과 인식이 어떻냐는 건 통계로 말하긴 쉽지 않죠. 그렇지만 여아 선호 현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성평등주의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어요.
할머니님이 가져온 통계가 좀 더 직접적이긴 하지만 또 10년 사이에 출산율은 더 저하되었고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죠. 그렇지만 남아를 얻기 위해 둘째를 출산하려는 의지가 있는 경우가 많고 이것은 남아 선호 사상이다라는 해석이 베이비붐 세대에는 딱 들어맞는데요. 지금 과연 둘째를 출산하려는 의지 자체가 어떤 유의미한 차이를 찾을 정도의 통계가 잡힐지...
출산율은 이미 아웃라이어 상태고 가족 제도가 빠르게 붕괴되면서도 가부장제도가 남아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한 여아 선호 현상을 만들어 냈다고 봐요. 몇몇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남아를 키우는데 사회적 비용이 더 발생한다는 통념을 반영하고 여아가 부모에게 더 살갗게 대한다는 편견 같은 게 작용하는 것이겠죠.
Barable님은 한국 사회가 여아 선호라니 그렇게 성평등주의적이리고 말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으신 것 같은데 사람들이 머릿속과 인식이 어떻냐는 건 통계로 말하긴 쉽지 않죠. 그렇지만 여아 선호 현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성평등주의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어요.
할머니님이 가져온 통계가 좀 더 직접적이긴 하지만 또 10년 사이에 출산율은 더 저하되었고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죠. 그렇지만 남아를 얻기 위해 둘째를 출산하려는 의지가 있는 경우가 많고 이것은 남아 선호 사상이다라는 해석이 베이비붐 세대에는 딱 들어맞는데요. 지금 과연 둘째를 출산하려는 의지 자체가 어떤 유의미한 차이를 찾을 정도의 통계가 잡힐지...
과거의 여혐 문화는 남자는 여자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하고 성공할 수 있어서 집안에서도 더 의미 있는 존재고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적이어야 한다였다면,
젊은 세대의 여혐 문화라는 것이 여자는 군대도 안 가고 힘든 일도 안 하려고 하고 생리 휴가나 쓰고 남자나 꼬셔서 편하게 밥값도 안 내고 결혼해서 남편 돈으로 먹고 논다는 얘기에 가깝죠.
칼로 자르기는 어렵겠지만 세대에 따른 분명한 경향성이 있어요. 이 생각이 암암리에 퍼져 있다면... 더욱이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처한 어려움에는 공감하지 못한다면 여아 선호 현상이 그닥 이상하진 않아요.
젊은 세대의 여혐 문화라는 것이 여자는 군대도 안 가고 힘든 일도 안 하려고 하고 생리 휴가나 쓰고 남자나 꼬셔서 편하게 밥값도 안 내고 결혼해서 남편 돈으로 먹고 논다는 얘기에 가깝죠.
칼로 자르기는 어렵겠지만 세대에 따른 분명한 경향성이 있어요. 이 생각이 암암리에 퍼져 있다면... 더욱이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처한 어려움에는 공감하지 못한다면 여아 선호 현상이 그닥 이상하진 않아요.
자고 오느라 뒤늦게 확인했네요. 이에 대한 제 견해는
1. 자녀수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낙태보다는 사전 피임이 선호되고 있다. .
2. 남아보다는 여아를 선호하지만 굳이 남아 임신 시 여아 출산을 위해 낙태할 정도는 아니다.
3. 그렇게 남아든 여아든 하나만 낳으면 가정계획은 종료. 굳이 남아 혹은 여아 출산을 위해 둘째를 가지진 않는다.
정도의 매뉴얼이 대부분의 신혼 가정에 확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남아 선호가 강하게 잔존하는 상태에서 출산률이 격감했다면 맏이의 성비도 불균형한 것이 당연하겠죠. 물론 ... 더 보기
1. 자녀수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낙태보다는 사전 피임이 선호되고 있다. .
2. 남아보다는 여아를 선호하지만 굳이 남아 임신 시 여아 출산을 위해 낙태할 정도는 아니다.
3. 그렇게 남아든 여아든 하나만 낳으면 가정계획은 종료. 굳이 남아 혹은 여아 출산을 위해 둘째를 가지진 않는다.
정도의 매뉴얼이 대부분의 신혼 가정에 확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남아 선호가 강하게 잔존하는 상태에서 출산률이 격감했다면 맏이의 성비도 불균형한 것이 당연하겠죠. 물론 ... 더 보기
자고 오느라 뒤늦게 확인했네요. 이에 대한 제 견해는
1. 자녀수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낙태보다는 사전 피임이 선호되고 있다. .
2. 남아보다는 여아를 선호하지만 굳이 남아 임신 시 여아 출산을 위해 낙태할 정도는 아니다.
3. 그렇게 남아든 여아든 하나만 낳으면 가정계획은 종료. 굳이 남아 혹은 여아 출산을 위해 둘째를 가지진 않는다.
정도의 매뉴얼이 대부분의 신혼 가정에 확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남아 선호가 강하게 잔존하는 상태에서 출산률이 격감했다면 맏이의 성비도 불균형한 것이 당연하겠죠. 물론 말씀대로 초산이니까 어지간하면 낙태하지 않고 바로 낳는다..라는 경향성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남아 선호가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런 커플이 100%는 아닐 것이며 '우리는 이미 계획 다 끝난 상태고 하나만 낳을 것이며 그건 아들이어야만 해'라는 커플들이 분명 상당수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맏이의 출생성비는 균형을 이룰 리 없겠죠.
여하간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구태여 남아선호를 타파하기 위해 디테일한 노력(아들 자 자를 둘러싼 논의를 전개한다든가)을 해야할 정도로' 남아선호가 존재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1. 자녀수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낙태보다는 사전 피임이 선호되고 있다. .
2. 남아보다는 여아를 선호하지만 굳이 남아 임신 시 여아 출산을 위해 낙태할 정도는 아니다.
3. 그렇게 남아든 여아든 하나만 낳으면 가정계획은 종료. 굳이 남아 혹은 여아 출산을 위해 둘째를 가지진 않는다.
정도의 매뉴얼이 대부분의 신혼 가정에 확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남아 선호가 강하게 잔존하는 상태에서 출산률이 격감했다면 맏이의 성비도 불균형한 것이 당연하겠죠. 물론 말씀대로 초산이니까 어지간하면 낙태하지 않고 바로 낳는다..라는 경향성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남아 선호가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런 커플이 100%는 아닐 것이며 '우리는 이미 계획 다 끝난 상태고 하나만 낳을 것이며 그건 아들이어야만 해'라는 커플들이 분명 상당수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맏이의 출생성비는 균형을 이룰 리 없겠죠.
여하간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구태여 남아선호를 타파하기 위해 디테일한 노력(아들 자 자를 둘러싼 논의를 전개한다든가)을 해야할 정도로' 남아선호가 존재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말씀하고 계신 것이, 남아선호사상이 줄어들고 심지어 여아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어난 것은 맞는데 호불호가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성비는 반반인 상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떤 기업의 입사시험문제에 나왔다고 하는데 부부가 여아를 선호해서 여아를 낳으면 둘째는 갖지 않고 남아를 낳으면 여아를 갖기 위해 둘째를 가졌다 어쨌다에서 결과적으로 남아가 많이 태어났냐 여아가 많이 태어났냐가 문제였는데 답은 반반이었어요. 사람이 인위적으로 성별을 판단하고 낙태를 감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희망이 무엇이건간에 남아나 여아가 태어날 확률은 1/2이니까.. 낙태를 감행하면서까지 여아를 선호하지는 않으니까 지금 태어나는 비율은 반반이 맞을 거예요. 걍 너무들 안 낳는 게 문제이겠네요.
과거에 남아 선호 사상과 같은 정도의 뜻으로 여아 선호 사상이라는 말을 쓰면... 어불성설이 되겠죠. 그정도로 여아를 선호하는 건 아닐테니.
베이비붐 세대에서는 낙태를 할 수 있다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서 남아를 낳을 때까지 계속 아이를 낳는다거나 남아 여아를 차별하는 형태였다면 출산제한 정책을 실시하던 80~90년대에는 낙태로 인해 상당한 성비 불균형이 초래되었어요. 피해는 그 세대 남자들이 보겠죠. 이 당시에 태아 성감별을 의료법으로 규제해서 아직까지 남아 있어요. 지금은 사실상 죽은 법이 되어서 알려줘도 처벌하지 않고요.... 더 보기
베이비붐 세대에서는 낙태를 할 수 있다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서 남아를 낳을 때까지 계속 아이를 낳는다거나 남아 여아를 차별하는 형태였다면 출산제한 정책을 실시하던 80~90년대에는 낙태로 인해 상당한 성비 불균형이 초래되었어요. 피해는 그 세대 남자들이 보겠죠. 이 당시에 태아 성감별을 의료법으로 규제해서 아직까지 남아 있어요. 지금은 사실상 죽은 법이 되어서 알려줘도 처벌하지 않고요.... 더 보기
과거에 남아 선호 사상과 같은 정도의 뜻으로 여아 선호 사상이라는 말을 쓰면... 어불성설이 되겠죠. 그정도로 여아를 선호하는 건 아닐테니.
베이비붐 세대에서는 낙태를 할 수 있다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서 남아를 낳을 때까지 계속 아이를 낳는다거나 남아 여아를 차별하는 형태였다면 출산제한 정책을 실시하던 80~90년대에는 낙태로 인해 상당한 성비 불균형이 초래되었어요. 피해는 그 세대 남자들이 보겠죠. 이 당시에 태아 성감별을 의료법으로 규제해서 아직까지 남아 있어요. 지금은 사실상 죽은 법이 되어서 알려줘도 처벌하지 않고요. 성별 때문에 낙태하는 경우가 사라졌다고 보는거죠.
젊은 부부들이 이왕이면 딸이 좋다고 여기게 된 정도고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교육 및 투자 비용이나 성역할에 대한 기대일 거에요. 그만큼 여권이 신장되었다 그런 거라기 보다.
베이비붐 세대에서는 낙태를 할 수 있다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서 남아를 낳을 때까지 계속 아이를 낳는다거나 남아 여아를 차별하는 형태였다면 출산제한 정책을 실시하던 80~90년대에는 낙태로 인해 상당한 성비 불균형이 초래되었어요. 피해는 그 세대 남자들이 보겠죠. 이 당시에 태아 성감별을 의료법으로 규제해서 아직까지 남아 있어요. 지금은 사실상 죽은 법이 되어서 알려줘도 처벌하지 않고요. 성별 때문에 낙태하는 경우가 사라졌다고 보는거죠.
젊은 부부들이 이왕이면 딸이 좋다고 여기게 된 정도고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교육 및 투자 비용이나 성역할에 대한 기대일 거에요. 그만큼 여권이 신장되었다 그런 거라기 보다.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주장이 패드립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죠. 당장 자신의 부모님이 낙태를 경험했을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높으니..
http://i.imgur.com/HvQWCam.png
http://i.imgur.com/HvQWCam.png
그럴 일은 없겠죠...아마? 일단 아이를 낳지도 않을뿐더러 지금 여아 선호라고 하는 건 출산 행태에 영향을 줄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우스운 이야기인데 저희 어머니 집안은 비슷한 1남4녀 집안인데요. 아버지는 3남 집안이에요. 그런데 그 3남이 몽땅 아들을 낳았어요. 저희 어머니가 제 남동생을 마지막에 낳았는데 할머니가 딸이 아니라 섭섭해 했다는 것 때문에 속상했다고 하셨다더라고요. 100% 진실은 아니겠으나 100% 거짓도 아닌 그런 얘기죠.
80~90년대 세대의 남아 선호 사상은 확실한 사회 현상으로 나... 더 보기
우스운 이야기인데 저희 어머니 집안은 비슷한 1남4녀 집안인데요. 아버지는 3남 집안이에요. 그런데 그 3남이 몽땅 아들을 낳았어요. 저희 어머니가 제 남동생을 마지막에 낳았는데 할머니가 딸이 아니라 섭섭해 했다는 것 때문에 속상했다고 하셨다더라고요. 100% 진실은 아니겠으나 100% 거짓도 아닌 그런 얘기죠.
80~90년대 세대의 남아 선호 사상은 확실한 사회 현상으로 나... 더 보기
그럴 일은 없겠죠...아마? 일단 아이를 낳지도 않을뿐더러 지금 여아 선호라고 하는 건 출산 행태에 영향을 줄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우스운 이야기인데 저희 어머니 집안은 비슷한 1남4녀 집안인데요. 아버지는 3남 집안이에요. 그런데 그 3남이 몽땅 아들을 낳았어요. 저희 어머니가 제 남동생을 마지막에 낳았는데 할머니가 딸이 아니라 섭섭해 했다는 것 때문에 속상했다고 하셨다더라고요. 100% 진실은 아니겠으나 100% 거짓도 아닌 그런 얘기죠.
80~90년대 세대의 남아 선호 사상은 확실한 사회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에요. 그 현상의 원인이 남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전반적 인식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고 Moira님 이야기 같은 게 너무도 흔한 우리네 삶의 모습이었죠.
지금도 사회 현상에서 삶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삶의 모습에서 사회 현상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되어야 겠죠. 근데 어느 방향으로 통과하든 저출산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정면으로 뚫고 가지 않을 길은 없을 것 같아요.
우스운 이야기인데 저희 어머니 집안은 비슷한 1남4녀 집안인데요. 아버지는 3남 집안이에요. 그런데 그 3남이 몽땅 아들을 낳았어요. 저희 어머니가 제 남동생을 마지막에 낳았는데 할머니가 딸이 아니라 섭섭해 했다는 것 때문에 속상했다고 하셨다더라고요. 100% 진실은 아니겠으나 100% 거짓도 아닌 그런 얘기죠.
80~90년대 세대의 남아 선호 사상은 확실한 사회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에요. 그 현상의 원인이 남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전반적 인식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고 Moira님 이야기 같은 게 너무도 흔한 우리네 삶의 모습이었죠.
지금도 사회 현상에서 삶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삶의 모습에서 사회 현상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되어야 겠죠. 근데 어느 방향으로 통과하든 저출산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정면으로 뚫고 가지 않을 길은 없을 것 같아요.
와 오늘에야 글을 읽었는데 정말 꿀잼이네요.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버틀러의 책을 리뷰하면서 이를 인용하며 은근히 미러링을 옹호한 기사에 대해 논의가 진행됐는데 논의 방향성이 달랐거든요.
http://www.hankookilbo.com/v/e80f6ef2abab4b178c4bae267d06426e
버틀러의 견해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있었고, 일반론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수긍하는 경우에도 메갈과 워마드 일... 더 보기
http://www.hankookilbo.com/v/e80f6ef2abab4b178c4bae267d06426e
버틀러의 견해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있었고, 일반론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수긍하는 경우에도 메갈과 워마드 일... 더 보기
와 오늘에야 글을 읽었는데 정말 꿀잼이네요.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버틀러의 책을 리뷰하면서 이를 인용하며 은근히 미러링을 옹호한 기사에 대해 논의가 진행됐는데 논의 방향성이 달랐거든요.
http://www.hankookilbo.com/v/e80f6ef2abab4b178c4bae267d06426e
버틀러의 견해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있었고, 일반론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수긍하는 경우에도 메갈과 워마드 일반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게 적절한가에 초점을 맞췄어서. 그런데 버틀러의 생각자체는 한 번쯤 고민해볼만 한 것 같아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차별금지법도 도입하고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를 통해 혐오발언을 통제하는 쪽을 지지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해볼 수 있는 대응이라 생각하더군요, 초기 메갈리아라면 몰라도 현재의 워마드에 대해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도. 버틀러의 논리에 기반해서 저것과 같은 상황에 놓인 레즈비언들에게 무조건 쿨하게 받아치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지만 스스로가 저렇게 대응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좀 더 유쾌한 대응책일 수도 있죠.
http://www.hankookilbo.com/v/e80f6ef2abab4b178c4bae267d06426e
버틀러의 견해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있었고, 일반론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수긍하는 경우에도 메갈과 워마드 일반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게 적절한가에 초점을 맞췄어서. 그런데 버틀러의 생각자체는 한 번쯤 고민해볼만 한 것 같아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차별금지법도 도입하고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를 통해 혐오발언을 통제하는 쪽을 지지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해볼 수 있는 대응이라 생각하더군요, 초기 메갈리아라면 몰라도 현재의 워마드에 대해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도. 버틀러의 논리에 기반해서 저것과 같은 상황에 놓인 레즈비언들에게 무조건 쿨하게 받아치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지만 스스로가 저렇게 대응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좀 더 유쾌한 대응책일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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