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9/13 00:27:49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3): 구밀복검(口蜜腹劍)




뭔가 연애담을 바라시는 것 같아서 쓸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디테일이 기억나는 것만 꼽아도 세 쌍 정도인데, 아무래도 구체적인 내용을 여기에 쓰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이게 해당 인물들과 아는 사이일때라야 진짜 재밌어서 그런 것도 있고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어서 그래요. 또 이 커플들이 결말까지 좋았던 건 아니라서 ㅡㅡ;; 훗날 사석에서 절 만나실 일이 생긴다면 제가 키야아아 신나게 썰을 풀어드릴 순 있겠지만요 ㅋ.

그래도 큰 그림만 대강 풀어보자면: 

일단, 남/녀가 함께 합숙을 하면 참 그게 참 허 참 그래요. 다들 적령기라 그런지 매우 예민하게 서로를 탐색하고 또 빠져들어요. 툭하면 동성들끼리 "여기서 넌 누가 제일 괜찮냐" 같은 거 물어보고, 심지어 서베이도 돌려요 ㄷㄷ. 이건 남녀 모두 하는짓이라 나중에보면 누가 서원 인기남 인기녀 1위를 했는지, 누가 누구에게 표를 줬는지도 쉬쉬하며 다 알게 되지요. 속세(?)에 남친/여친을 두고 온 걸 모두가 뻔히 아는 데도 한 1~2주 지나고보면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고, 결국 3주차 쯤 되면 빼박 사랑에 빠진 커플이 나와요(니가 걔한테 투표할 때 알아봤다!!). 경남에 내려올 땐 각자였는데 서울가는 버스는 같이 타고...흠흠.. 그렇습니다. 그걸 보면서 만약 남/녀 모두 징병해서 한 부대 안에서 2년간 복무시킨다면 (남/녀 막사를 나눈다 해도) 대한민국 부부의 8할은 군대에서 탄생할 것이요, 동시에 치정 문제로 하루가 멀다하고 총기난사나 자살사고가 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굳이 연애가 아니더라도 다들 친분이 두터워져요. 술을 비롯한 사식을 몰래 밖에 나가서 사오고, 그걸 눈 속에, 혹은 눈 속이나 다름 없는 벽장 속에 숨겨 뒀다가 밤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먹고 마시며 노는데 안 친해지기도 어렵지요.

술을 어디서 사오느냐하면, 가까운 곳에 주유소 + 슈퍼가 하나 있었어요. 겨우 3~4km (...) 밖에 있나 그랬을 거예요. 그 추위를 뚫고 걸어서 갔다오는 건 저희가 파이널판타지6 오프닝에 나오는 티나와 병사들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요. 제가 있던 당시엔 자가용을 가져온 어떤 형님 덕분에 몰래 차타고 가서 물자를 사오곤 했지만 차가 없었던 어떤 시즌에는 정말로 거기까지 걸어가서 맥주를 사서 머리에 이고온 용자들도 있었대요. 




대략 이런 느낌.


또다른 방법은 경남에 내려가기 전에 서원 쪽으로 큼지막한 택배를 하나 부치는 거예요. 그러면 서원학습 4~5일차 즈음에 맥주와 과자를 가득 담은 황금마차 택배가 도착하거든요. 선생님들껜 "아이참 이런 거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어머니께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과자와 귤을 보내왔어요." 하고 조금 진상하고 가장 중요한 알코올 제품들은 꼬불쳐두고 두고두고 먹었어요. 저도 와이프가 한상자 보내줘서 잘 먹었지요. 여보 사랑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술을 먹었냐면, 그거 말고는 달리 유흥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요즘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2009년)엔 맛폰 가진 이가 아예 없었어요. 심지어 랩탑을 가지고 온 이도 30여 명 중 두 명 밖에 없었구요. 그 두 대의 랩탑도 놀이용은 못되었던 게 제 넷북은 그냥 사전셔틀에 불과했고 다른 하나는 성능이 좀 괜찮긴 했지만 영화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당연히 인터넷도 안됐구요.

그래서 그렇게 친구도 되고 연애도 하고 부어라 마셔라 참 좋았겠구나 싶지만, 사실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 듯이 번역원은 학년이 바뀌면 반드시 정해진 숫자 만큼 장학생들을 탈락시켰어요. 서원학습 마지막 날에 치르는 시험 성적에 따라 누군가는 다음 1년간의 장학금 및 특권을 보장받고, 누군가는 짐을 싸고 떠나야만 하는 구조였지요. 모두가 친구이면서도 모두가 경쟁자였어요. 쟤가 잘하면 내가 죽는 거고 내가 잘하면 쟤가 죽는 배틀로얄. 그래서 학생들은 웃고 떠들고 서로 좋은 말을 해주는 한 편 (구밀口蜜) 뱃속엔 때로 작은 칼을 품었어요 (복검腹劍).

자, 이제 다른 학생들이 기아트윈스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감이 오시나요. 2학년 장학생 중 남은 이는 10명, 이 중 3~4 명은 올 겨울을 마지막으로 탈락할 운명이었요. 그런데 한 사람이 탈주하면서 9명이 됐던 거예요. 남은 9명은 떠난 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내심 자신의 생존률이 올라갔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뜻밖에 웬 말뼈다귀 하나가 굴러들어와서 다시 10명이 된거예요. 마사토끼(♡)가 집필한 <매치스틱 트웬티> 같은 상황이지요.

땜빵 장학생 기아트윈스는 그래서 초장부터 묘한 견제를 받게됩니다. 제가 [그 일]을 벌이기 전까지....


(꼐속)




5
  • 현기증난단 말이에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686 스포츠[9.9]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이대호 시즌 14호 솔로 홈런,강정호 2타점 2루타) 김치찌개 16/09/11 3409 0
3687 음악개인 취향 듬뿍 들어간 노래들 3 별비 16/09/12 3821 0
3688 스포츠[9.10]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오승환 1이닝 2K 0실점 시즌 17세이브) 김치찌개 16/09/12 3345 0
3689 기타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2): 디제이디제이 드랍 더 비트 30 기아트윈스 16/09/12 5447 11
3690 꿀팁/강좌택시에 물건 두고 내렸을 때 꿀팁!! 4 보내는이 16/09/12 6144 0
3691 육아/가정아들이 말을 참 잘합니다. #2 26 Toby 16/09/12 6605 8
3692 스포츠LG팬들 계시나요? 장진감독이 영상을 만들었네요ㅎㅎ 3 뚜리 16/09/12 3450 0
3693 일상/생각나아감으로써 힘을 얻는다 5 차우차우 16/09/12 3897 1
3694 기타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3): 구밀복검(口蜜腹劍) 30 기아트윈스 16/09/13 4034 5
3695 일상/생각추석을 앞두고. 어이없는 큰집의 문제가 터져나오다. #1 7 Bergy10 16/09/13 4192 0
3696 일상/생각추석을 앞두고. 어이없는 큰집의 문제가 터져나오다. #2 18 Bergy10 16/09/13 4393 0
3697 기타핸디캡 이론 (흡연과 음주의 이유) 9 모모스 16/09/13 5520 6
3698 IT/컴퓨터갤노트7. 통신비 지원 및 60% 충전 업데이트 안내 4 Leeka 16/09/13 3742 0
3699 스포츠[MLB] 강정호 이주의 선수.jpg 2 김치찌개 16/09/13 3192 0
3700 정치우본,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 우표 발행' 예정 30 모여라 맛동산 16/09/13 4835 0
3701 창작큐브툰 #001 - 수요일의 이중인격 8 문틈 16/09/13 3951 6
3702 기타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4): 버츄얼 파이터 사건 14 기아트윈스 16/09/14 3808 4
3703 정치오바마의 자랑: 미국 소득증가율 폭발!! 14 elanor 16/09/14 4617 0
3704 게임해외 웹진들의 롤드컵 파워랭킹 5 Leeka 16/09/14 4462 0
3705 기타어떤 밈 19 눈부심 16/09/14 8822 2
3706 기타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끗): 에필로그 23 기아트윈스 16/09/14 4636 12
3707 영화이번 주 CGV 흥행 순위 AI홍차봇 16/09/15 2977 0
3708 의료/건강니코틴과 히로뽕 이야기 5 모모스 16/09/15 11452 6
3709 일상/생각이것은 무슨 해괴한 꿈이었을까..(1) 5 피아니시모 16/09/15 3396 0
3710 방송/연예질투의 화신 7화 (개인적으로)재밌는 장면! 6 혼돈의카오스 16/09/15 4192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