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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9/14 00:52:13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4): 버츄얼 파이터 사건
예상치 못한 성원에 감사드리며 이제 제가 벌였던 사건 하나와 그 후폭풍을 소개하고 슬슬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자칭 버파사건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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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2인 1실을 썼어요. 룸메는 3학년, 저보다 몇 살 형으로 K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이제 막 박사과정에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약간 새침하긴 했는데 그래도 저랑 잘 놀아주었고 이야기도 많이 했지요. 성격이 새콤새콤한 분이라 그런지 다른 여학생들이랑 유독 자주 어울렸어요. 그래서 별명도 [언니].

언니는 다른 여학생들과 저를 이어준 연결고리였어요. 여학생들은 언니를 보러 제 방에 찾아왔고 앉아서 노닥거리며 술도 마시고 가기도 했고, 또는 언니를 데리고 다른 방에 데리고 가기도 했어요. 저만 냅두고 언니를 데리고 나갈 땐 약간 섭섭하긴 했지만 그래도 언니가 아니었으면 전 초반에 친구사귀는 데 애를 꽤 먹었을 테니 뭐라고 투정 부릴 입장은 아니었지요.

또 한 가지 찜찜했던 건 예습할 때 서로 물어보고 도와주면서 하면 더 잘 될 것 같은데 가만보니 다들 개인플레이를 하더라구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플레이를 하는지 아닌지도 몰랐어요. 어쩌면 저만 빼놓고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몰래 예습했던 건지도 모르지요. 여튼 그래서 초반에는 언니 외에는 모르는 걸 물어볼 사람이 없었어요.

그렇게 2~3 일 정도 지났을까, 둘이서 예습/복습하던 어느날 밤, 언니가 저에게 슬그머니 말을 걸었어요.

"기아트윈스야. 넌 혹시 네가 완전히 환영받는 건 아니란 걸 아니?"

"ㅡㅡ;;;? 아뇨. 몰랐는데요. 진짜예요?"

"그래임마. 너네 기수 장학생 10 명 중 최소 3 명, 많으면 5 명은 내년에 여기 못 올 거야. 두 학기분 장학금 640만 원도 못 받는 거구. 너를 제외한 9 명은 서로 각자의 실력과 점수를 가늠하고 있어. 누가 선생님들한테 총애받는지도 알고 있고. 그래서 누가 강등권인지도 대강 짐작하고 있지. 그런데 예측불가능한 존재가 하나 낀거야. 왜 선발된 건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선생님이 꽂아 넣어서 내려온 낙하산 장학생. 자기가 강등권이라고 생각하는 애들은 당연히 널 보면 불안하지 않겠니? 또 걔들 중 상당수는 3 년 과정을 졸업한 뒤에 상급자 코스에 진학하고 싶어해. 그런데 그 코스는 매년 고작 3~4 명 밖에 안 뽑지. 장학생으로 졸업하지 않는 이상 들어가기가 힘들어.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있어 너는 인생계획의 걸림돌일 수도 있는 거야."

헐, 슈밤. 그랬군요. 전 제 실력을 그렇게 높게 평가해본 적이 없어서 누가 절 경계할 거란 생각은 못했어요. 상급자 코스 같은 것도 관심 없었구요. 이거야 원. 어떻게 하면 경계심을 녹이고 학생들 사이로 완전히 끼어들어갈 수 있을까 물었더니 언니는 대수롭지 않게 그냥 잘 먹고 잘 공부하고 잘 지내다보면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요. 누군가가 저를 경계한다는 건 참 불편한 일이잖아요. 그러던 어느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다 양옥으로 소집했어요. 이 서원의 소유주 할배가 학생들 글공부하는 소리가 듣고싶어서 왔다는 거예요. 할배는 나름 이름 있는 집안의 후손으로 유소년기에 배운 한학 지식을 활용해 전후에 한의원을 차려 나름 재부를 모은 지역 유지였어요. 그렇게 모은 돈을 대부분 털어서 옛식으로 서원을 세우고 자기 조상님들께 봉헌했던 거예요. 하지만 서원은 지었으되 조선시대처럼 거기 상주하면서 과거시험 준비할 사람이 없으니 건물이 놀지 않겠어요? 그래서 고전번역원에 연락을 해서 방학기간 동안 학생들을 유치했던 거예요.

그렇게 양옥 거실에 모여 앉아 할배와 선생들의 사장개그를 들으며 '하하하 아이쿠 배꼽에 발이 달렸나 이놈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모르겠네요,' '하이고 할배요 이렇게 재밌는 얘기 하시면 저희 다 웃다 죽심니더 껄껄껄' 하던 중에 선생님이 "과일 좀 내오지" 라고 했어요. 그러자 여학생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고, 잠시후 사과 등을 깎아서 내오더군요. 

음. 음? 그러고보니 며칠 전에도 한 번 윤독 후에 "과일 좀 내오지" 소리에 누가 냉큼 주방에 가서 과일을 깎아 내왔던 것 같은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때도 여학생들만 우르르 갔던 것 같아요. 머릿속에서 '이건 아닌데' 센서에 불이 들어왔어요. 같은 학생인데 남학생은 거실에 꿈쩍 않고 앉아있고 여학생만 과일 시중을 들어야하나?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걸 조선식으로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제가 잘못봤을 수도 있으니 다음에 한 번 더 지켜보기로 했어요.

다음 날 윤독 시간. 윤독 장소인 양옥 거실에 모여서 앉는데, 이제사 가만히 보니 여학생들은 모두 주방과 가까운 쪽에 모여서 앉더라구요. 오호라. 윤독이 끝나갈 때쯤 선생님이 또 "과일 좀 내오지"라며 말을 꺼냈어요. 전 두 눈을 부릅뜨고 누가 주방으로 가는지 지켜봤지요. 역시. 여학생들만 일어나는 거 아니겠어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남학생들은 다 가만히 앉아있었고 선생님은 하던 이야기를 계속 했어요. 

전 더이상 생각할 겨를 없이 척수반사로 벌떡 일어나서 여학생들을 따라갔어요.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냉장고 지점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길어야 3초였을 거예요. 하지만 여학생들과는 달리 저는 주방에서 가장 먼 쪽에 앉아있었고, 그래서 거실 중앙을 횡단해서 가야만 했어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모두가 보란 듯이 무대 중앙을 가로질러서 걸어간 셈인데, 핵쫄보인 저에겐 그 시간이 마치 300초 같이 느껴졌지요. 선생님이 불러세우면 어쩌지, 뭐라고 대답해야하나 하는 생각에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떨렸어요.

전 일부러 아무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대부분이 '쟤 뭐하지' 싶어서 쳐다보고 있었대요. 하지만 역시 제일 놀란 이들은 주방에 먼저 들어간 여학생들이었어요. 3학년 누님 한 분이 뚱그레 눈을 뜨고 '야 니가 왜 왔어?' 하고 소곤소곤 묻길래 선생님이 불러세워서 물을 경우에 대비해 준비했던 대답을 했어요.

'저 연습좀 하려구요. 사과를 잘 못깎아서'

개 어색;;;;;;

그리고 같이 둘러 앉아 사과를 깎으며 여학생들과 짧막한 대화를 나눴어요. 3학년 누님들 말론 지난 3년간 여섯 차례 서원학습을 하는 동안 이 주방에 들어와서 과일을 깎은 [놈]은 제가 처음이었대요.

그렇게 사과를 깎아 들고 나와서 모두가 먹을 수 있게 과일을 분배했어요. 누구보다도 선생님 본인이 제게 뭔가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렇게 안하시더군요. 뭔가 '왜 자네는 여자도 아닌데 주방에 갔나'라고 묻는 자체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거예요. 제가 깎은 사과는 과장 좀 보태서 이렇게




생겼었어요 -_-;; 썩둑썩둑 서툴게 깎은게 꼭 버츄얼 파이터 1의 아키라 머리처럼 생겼었지요. 안깎아본 놈이라는 티가 많이 났을 거예요. 그렇게 서원학습 사상 최초로 남학생에게 과일대접을 받으신 선생님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조각난 아키라를 낼름낼름 드셨고, 공부와 관련해서 몇마디 더 하시곤 윤독을 마쳤답니다. 그 후 기아트윈스는 ...



(꼐속)



4
  • !!!!!
  • 조선시대 스타일에 성평등 같은 걸 끼얹으면 츄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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