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10/06 08:20:28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펌] 시대로부터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기타리스트 A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방에 살면서 혼자 매일매일 클래식 기타를 연습하던 아저씨가 있었다고 한다. 지역 아마추어 대회 같은 것도 나가서 작은 상도 타오곤 했고, 유튜브에도 자신의 연주를 올려서 사람들의 칭찬도 꽤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던 그는 꽤 큰 콩쿨의 예선을 운좋게 통과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기타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며 젊은 경쟁자들의 연주를 듣는다. 한 명, 한 명 더. 그는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결국은....

"엉엉 울었어요. 정말 서서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우시더라고요. 한참 울다가 결국은 돌아서서 나가셨어요."

우리는 동시대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왜죠?"

"자기가 컨템포러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신 것 같아요"

"납득이 안 가는데요? 공연도 많이 봤을 거고, 음반도 많이 들었을 거잖아요. 컨템포러리라는 게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아니예요. 컨템포러리는 실제로 그걸 눈앞에서 보지 않으면 두려움을 몰라요. 열심히 연습하는 자신을 놔두고 동시대가 휙 지나가버렸다는 걸 갑자기 깨달은 거예요."

호오.

"철학자 '장 아메리'가 '오스카 코코슈카'의 말년에 대해서 쓴 글이 있어요. 한때는 가장 실험적인 예술가였던 코코슈카가 환갑이 넘어서 새로 등장한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봐버린 거예요. 그의 행동이 사뭇 흥미로운데..."

"질투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상이죠. 장 아메리는 코코슈카가 '격분'했다고 쓰고 있어요. 맹렬하게 공격하고 저주해요."

"그 마음 알 거 같아요. 저도 그럴 것 같은데요"

"결국 그것도 노화의 한 양상이라고, 아메리는 써요. 인간은 단지 몸과 마음만 늙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늙어간다는 거죠."

"흐, 다행히 그렇지 않게 나이를 먹은 선배들이 제겐 좀 있네요."

"저도요. 많지는 않지만"

"저도 두 명 정도."


----------

Hyunho Kim 님의 페북에서 허락을 득하고 퍼왔어요.

최근 본 웹툰 AD7000에서 받은 인상과 묘하게 호응하는 글이에요.

인간은 무의미하게 살 순 없고, 의미있게 살고자하면 반드시 타자가 필요해요. 사람이 있어야 대화가 생기고 사랑이 생기고 사회가 생기고 문화가 생기고 역사가 생기니까요.

최근 다시 본 월E의 한 장면과도 조응해요.

"난 생존하고 싶은 게 아냐. 살고 싶다구! (I don't wanna survive. I wanna live!)"

'나의 삶'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삶과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의미의 왕국을 이루어요. 공동 작품이지요. 그러므로 나의 의미, 나의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이 등장해 그들만의 덕지덕지한 의미의 군체를 이루고 있음을 목도할 때 깊은 좌절과 격한 분노를 느끼는 것도 당연해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일 거예요. 노인들이 툭하면 "젊은 것들이 날 무시한다"고 할 때 이런 감정이 아닐까요.

흠흠

과연 우리는 곱게 늙을 수 있을까요.

쉽게 예단하기 어렵군요.



12
  • 춫천
  • 짧지만, 콱!하고 와서 박히는 글이네요
  • 먼저 가... 난 이미 틀렸어.
  • 크흑 슬프네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813 일상/생각가면 13 elanor 16/10/03 3241 0
3814 도서/문학지난 달 Yes24 도서 판매 순위 10 AI홍차봇 16/10/03 3568 0
3815 게임[불판] 시즌6 롤드컵 16강 4일차 불판 #1 20 곧내려갈게요 16/10/03 3721 0
3816 게임롤드컵 1주차 조별/지역별 현황 정리 1 Leeka 16/10/03 2796 0
3817 일상/생각엄마와 나의 연결고리 6 성의준 16/10/03 3643 7
3818 스포츠우베 젤러의 선택 4 Raute 16/10/03 7122 2
3819 음악노래 몇 개... 2 새의선물 16/10/03 3752 1
3820 IT/컴퓨터컴퓨터는 어떻게 빠르게 검색을 할까 - 보이어-무어-호스풀 알고리즘 18 April_fool 16/10/04 5988 7
3821 게임[LOL] 세계 최고의 선수 1~20위 공식 번역 정리 1 Leeka 16/10/04 7496 0
3822 일상/생각사기당하고 나니 멍하네요. 9 Xayide 16/10/04 4082 1
3823 일상/생각사..좋아하는 인물에 대해 말해봅시다. 50 기아트윈스 16/10/04 4258 0
3824 음악걸스데이 민아의 노래들 감상하세요. 6 Ben사랑 16/10/04 4613 0
3825 문화/예술영어의 두 얼굴: 게르만-로망스 41 Event Horizon 16/10/04 7284 6
3826 역사고대 그리스를 오마쥬한 로마 5 모모스 16/10/04 10516 1
3827 일상/생각 기억의 초단편 - 벼봇춤 12 피아니시모 16/10/04 4148 0
3828 스포츠두산 베어스가 단일시즌 최다승을 달성했습니다. 2 키스도사 16/10/04 3573 0
3829 스포츠[KBO] 4~6위 경우의 수 정리 2 Leeka 16/10/05 3144 0
3830 스포츠ESPN에서 KBO의 배트플립 취재 기사를 냈습니다.+번역 링크 추가 19 키스도사 16/10/05 6484 0
3831 일상/생각제주입니다. 미치겠습니다. 8 Xayide 16/10/05 4209 0
3832 음악제멋대로 Playlist : 비 오는날 듣는 노래들 8 SCV 16/10/05 3905 1
3833 일상/생각분사난(忿思難) 8 기아트윈스 16/10/05 4061 1
3834 과학/기술플로레스섬에서의 왜소화 vs 거대화 6 모모스 16/10/05 7362 5
3835 스포츠[KBO] 김태균 3000루타 달성 + 아직 끝나지 않은 4/5위 결정전 5 Leeka 16/10/05 3045 0
3836 스포츠국내 축구 이야기들 (2) 5 별비 16/10/05 3826 2
3837 일상/생각[펌] 시대로부터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45 기아트윈스 16/10/06 4231 1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