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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6/22 16:47:33
Name   흑두견
Subject   나의 연극이야기
"두견아, 너 이제 목소리가 트였대. 교수님이 지나가면서 보시고 그러시더라."

선생님의 잔심부름을 맡아서 하던 한 동기 여자애가 말을 전해왔다. 그래? 그런가? 하긴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다.
얼마전부터 소리가 쭉쭉 뻗어 나간다. 그리고 그게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 자신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에서 안정적으로 울려퍼질때 알수없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동기여자애가 전해준 교수님의 그 말씀이 내 인생을 크게 흔들어 놓으리란 것을...


"두견 병장님도 제대하시기 전에 분대장 한번 하셔야지 말입니다."
"분대장? 뭐하러."
"그 목소리로 '조종간 위치 안전' 하시는 거 한번 듣고 싶습니다."


웃기고 있네. 그래도 난 안할거다 분대장 따위.
입대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병장을 달았다. 이병 5개월, 일병 6개월, 상병 7개월..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다. 하지만 아직 9개월 남았다.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은 공군, 군견소대. 군견과 함께 활주로를 산책..이 아니라 순찰을 도는 근무를 한다. 개 훈련은 덤이다. 그리고 공군이기에 병장이 긴것도 덤.
분대장 할때가 되긴 했는데...사실 적성에 맞지 않는다. 옛날엔 나도 계급 차면 당연히 분대장 할 줄 알았었는데 계급이 차니까 하기 싫어졌다.
이유는 별 거 없다. 지루해서. 가뜩이나 긴 군생활, 지루하긴 싫다. 새벽에 활주로라도 나가면 좀 자유롭잖아.
하지만 활주로 나가는 것도 좀 지겨워졌기에 난 운전병을 지원했다. 뭔가 새로운 배울거리. 그게 내가 긴 군생활을 버티는 방법이었다.
길고 긴 군생활을 보내는 방법은 다들 가지가지였는데,어떤 녀석들은 제대 날까지 하루 하루 달력의 날짜를 지워가기도 했다. 난 그 녀석들에게 그건 어리석은 짓이라며
놀렸다. 그러면 시간 더 안가- 하면서. 그리고선 생각했다. 하루 하루 즐겁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제대 날이 다가와 있을거야- 라고. 날짜를 세고 있는 저녀석들보다
한차원 높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며, 난 스스로 뿌듯해 하고 있었다.


"두견아, 우리 268일 남았다."


친절하기도 하지. 내 동기 경민은 매일 날짜를 센다. 달력을 시커멓게 칠해가며.


"나한테 알려주지 말라고."
"그래도 알고 있어야지. 아직도 268일이나 남았어."
"...고맙다."


퉁퉁한 얼굴 위에 안경을 얹은채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저 녀석을 어찌 하오리까. 녀석의 이름은 김경민. 내 동기다.
나이는 나보다 한살 어린 빠른 85년생. 그리고 매일 나에게 제대까지 남은 일수를 알려주는 친절한 녀석이다.


"쑥씨는 연락 없어?"
"내가 안하는 거야."
"그래? 이제 잊었어?"


잊었었지. 니가 말 꺼내기 전까지는.


"너 좀 가면 안되것냐?"
"왜 그래?"
"내가 이제 그 얘기 안한다고 했잖아. 쓸데없는 얘기 하지말라고 좀!"
"사람 붙잡고 얘기 할 땐 언제고."


또 저 미소. 퉁퉁한 얼굴에 입이 작다보니 얼굴이 얄밉게 보인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 한창 첫사랑의 열병에 빠져있을때 지겹게 얘기한 건 나일테니.
생각해보면 난 위로를 얻고 싶을때만 저 녀석을 붙잡고 내 얘길 한 것 같다. 모두들 그럴테지만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 달라고 강요를 한 것일터.
녀석은 스폰지 같아서 뭐든 잘 들어주고 뻔한 대답을 한다. 그래서인지 나랑 잘 맞는 구석도 있다. 나는 급하고, 할 말은 해야하고, 직선적이라 동기가
나와 비슷한 녀석이었다면 벌써 여러번 사고 쳤을지도 모른다. 녀석 덕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참았기에 별 탈 없는 군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군대같이 합리적이지 않은 곳에서는 급진적인 생각이 도움이 안될때가 많으니까.


"제대하면 연극 하기로 했어?"
"연극?"


연극을 한다. 이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배우를 지망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일단 사람들 앞에서 배우를 지망한다라고 했을 때와
졸업해서 취직이 목표라고 했을때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일단 개인적으로 느끼는 부끄러움이 있다. 나를 허파에 바람들어간 녀석으로 보진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과, 저 외모로? 라고 생각할까봐 걱정되는 괜한 자격지심. 키는 178. 뭐 한국남자 평균은 넘었으니 다행. 하지만 내 로망인 183cm까진 가지 못했다.
누군가는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고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평범하게 생긴 얼굴을 가졌고, 어깨는 넓은 편이지만 하체와 상체의 길이가 비슷한 비율.
일명 폴더 몸매. 사람들이 하체가 안정적이라 운동하기 좋은 몸이라고 말해주는 것에 위안을... 두자.
어찌됐건 배우라 하면 일단 외형적으로 잘난 사람들을 상상하기 마련이기에 나같이 평범한 사람도 배우를 해도 될까하는 고민을 첫번째로 했었다.
물론 이건 쓸데없는 고민이다. 세상의 모든 배역들이 잘생기고 멋진 사람들만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니까. 다른 고민은 역시 직업의 안정성.
사실 이걸 고민하면 배우를 할수가 없다. 다 감안하고 하는 거니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걸 제치고 난 연극을 하면 즐겁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즐겁다는 것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더 큰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닐까.


"교수님이 극단에서 기다린다고 하셨다며."


그랬지. 그 대단한 분이 그렇게 말씀해주셨는데.. 사실 교수님 입장에선 별 의미 없는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평소 열심히해서 이뻐하던 군대가는 학생에게
격려차 하는 흔한 멘트랄까. 하지만 내겐 그것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노년의 연출가는 웬지 보는 눈이 남다를 것 같고, 그런 그가 나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내게 뭔가 그분만이 알아볼 수 있는 재능이 있어서가 아닐까하는 넘겨짚기.


'나에게 정말 연극배우의 재능이 있다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손해 아닌가. 더구나 난 연극이 좋은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다가도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내 까짓게 무슨 배우야. 그냥 먹고 살 일이나 걱정하자.'
라는 생각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기다린다고는 하셨는데... 아 모르겠다 정말."
"좋아하는거 해야지. 안하면 후회할걸?"


나보다 한살 어린 나의 군대 동기는 항상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어했고, 그래서 어려보였다. 남 고민 들어주는 걸 좋아했지만, 누구나 예측 가능한 말을 해줬다.
하지만 예측가능한 말이라는 것은 결국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지. 난 저녀석에게 저 대답을 듣고 싶어서 항상 고민을 얘기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거 해야 후회없다는 누구나 할 법한 말을 되뇌이며 뛰어들어도 되는 걸까.
매일 동기가 세어주는 날짜를 들으며 난 누구나 그렇듯, 생각만 많은 채 제대를 했다.

생각을 정하지 못한채 제대를 했기에, 그 후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은 이때다 싶어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라는 둥 주문이 많으셨다.
어쨌든 연극만 안하면 좋겠다 라는 마음이셨던 듯. 공인중개사 학원을 다녔지만 책값만 날린채 때려치웠고, 얼마뒤 복학해서는 연극만 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가온 졸업. 항상 미뤄왔던 결정이지만 이제는 선택을 해야했다.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교, 중학교 마치고 고등학교,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 너무나 당연스럽게
거쳐왔고, 항상 끝나면 제시된 다음 문턱이 있었지만 이번엔 없었다. 내가 선택해야했다. 교수님을 찾아가서 연극하고 싶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 분 앞에서 연극하고 싶다고 말하려면 뭔가 대단한 결심이 있어야 할 것 같았고, 나보다 먼저 앞서서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단히 신성해 보였기에...
즐겁다는 이유로 내가 감히 그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곤 했다.

그때 마침, 친하게 지내던 조명 스텝일을 하던 동기형이 한달간 전국투어 공연이 생겼다며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시간을 더 벌수 있는 기회였달까.. 용돈도 벌고. 그래서 난 또 한번 도망쳤다. 선택을 미룬채.  

항상 무대에서 조명을 받다가 뒤에서 조명 작업하는 일을 하니 신세계였다. 너무 힘든 신세계..
전국투어 공연이었기 때문에, 한달간 봉고차로 이동하고 극장 근처에 있는 숙소를 잡아서 잠을 잤다. 배우들보다 먼저 극장에 도착하여 셋업을 하고, 공연 때는
배우들과 함께 움직이며 무대 뒤에서 조명을 만졌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를 해체하고 배우들보다 먼저 극장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박수는 모두 배우들의 몫이었다.
배우를 할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 하지만 이곳의 배우들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실력이 아니라 자세가.
내 착각일까. 남들이 모두 만들어 놓은 곳에 와서 잠깐 옷을 걸치고 슬쩍 연기를 해주고 스텝들 앞에서 거만한 자세로 떠나는 그들의 모습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마치 우리만 주인공이야라고 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신성해 보이지 않았다.
연기 뿐만 아니라 무대와 조명, 소품 모두도 연극이 아닌가. 왜 그들은 연기만 하는 사람일까.
갑자기 교수님의 극단이 궁금해졌다.


'광대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야. 가장 낮기 때문에 남들이 부끄러워서 못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남들이 고고하게 다리꼬고 앉아서 위에서 보고 있을 때,
나 이런 고민이 있어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하고 말하는 거야. 그럴때 그 사람들은 느끼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구나. 이 세상은 외로운 세상이 아니었구나. 그게 바로 우리들의 역할이야.'


내가 본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배우들이 무대를 만들고, 조명을 작업하고, 소품까지 직접 만든다는 그분의 극단은 어떨까. 그곳이라면 진짜 연극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결국 교수님을 찾아갔고, 몇월 몇일 몇시까지 연습실로 오라는 대답을 들었다. 마치 입대 날짜를 받은 것 처럼 긴장되었다.
그 날은 찾아왔고, 난 약속된 시간보다 30분 먼저 연습실 문앞에 도착했다. 두꺼운 철문 안에서는 음악소리와 누군가 노래를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는 순간 쏟아질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한 층 위로 도망갔다가 다시 내려오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30분.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한 층위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가 문득 어린 시절 구름사다리 위에서 뛰어 내렸던 것이 생각났다.
왜 뛰어 내리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구름사다리 위에서 지면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애매한 높이였다.뛰어내리자니 높고,
그냥 내려가자니 뛰어내릴만한. 하지만 뛰어 내리면 어찌 될까 상상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하길 멈추고 그냥 몸을 던진 순간, 모래밭이 눈 앞으로 다가왔고,
난 땅에 나뒹굴었다. 무릎이 내 가슴을 친 것 같았다. 숨이 막혀서 한참을 켁켁거리다 일어났는데, 구름 사다리가 아까처럼 높아보이질 않았다.
다시 구름사다리위로 올라가니, 그것은 더이상 위험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하길 멈추고 문고리를 잡고 돌려서 밀었다. 문이 열리니 하얀 벽이 보였다. 생각한 것 같이 문이 열리자 마자 연습실이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덩치 큰 장발의 남자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 연극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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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을 써보네요. 쓰고 나니 뭔가 거창한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예술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려면 마을에 사는 사람 10명중 9명만 일해도 나머지 한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나머지 한 사람이 예술을 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지요. 실질적으로 그렇지 못해서 그런지 아무튼 예술로만 먹고 산다는게 참 힘든 세상입니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이긴 하지만요. 어찌됐건 제가 연극하면서 겪은 일을 한번쯤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겨우 용기내어 이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너그럽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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