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11/14 19:27:57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한단설] 아브라함과 이삭
"차동현씨"

낭랑한 호명에 이어 모자(母子)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들 이름이 동현인가보다. 나이는 어림잡아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정신과가 처음인지 조금 불안해보인다는 것 외엔 평범하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아들이 게임중독인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엄마는 착하던 아들이 몇 개월 전인가부터 하교후 PC방을 들리기 시작했으며, 언제 언제는 심지어 저녁먹을 때가 되어서야 들어온 적도 있으며,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도 며칠 후엔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며, 심지어는 계속 말리는 자기에게 소리지르며 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이 자제력을 잃은 것을 보니 중독이 틀림없다고 결론내린 엄마는 '꼬박꼬박 교회도 잘다니고 정말 착한 앤데' 하며 말을 흐린다. 개신교. 아마도 모태신앙. 체크.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드님과 이야기를 좀 해볼 테니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엄마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단도직입.

"그래, 동현이는 무슨 게임 하니?"

아이는 약간 당황해했다. 대개 아이들은 자신이 정신과에 찾아와야 할만큼 [중독]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예상 질문과 모범 답변을 생각해보며 온다. 답이 바로 안나온다는 건 예상 외의 질문이란 것. 뭐, 상상하기 어려웠겠지. 엄빠가 애가 하는 게임이 뭔지에 관심이 있었다면 여기까지 데려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답이 늦기에 저격을 시도해본다.

"몇 개월 전부터면... 디아블로2?"

"어, 맞아요."

동공이 커진다. 자 이제 결정타 나가신다.

"넌 뭐키우니. 아저씬 폴암 바바리안(Polearm Barbarian) 이야. 아시아섭 맞지?"

정신과의사노릇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역시 의표를 찔린 내담자의 표정을 볼 때가 아닐까. 동현이는 가장 예상하기 어려운 곳에서 만난 바바아재에게 신나게 자기 게임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처음엔 팔라딘을 키웠는데 성장에 한계를 느껴 아마존으로 갈아탔다고 한다. 아마존은 바바리안 못지 않게 훌륭한 사냥능력 + 가이디드 애로우에 힘입은 준수한 PK 능력을 겸비한 밸런스 좋은 캐릭터이다. 게임의 문법을 잘 파악하고 있고, 또 첫 선택을 고집하지 않고 OP로 갈아탄 걸 보면 결단력, 판단력, 균형감각이 모두 괜찮다. 아이템 파밍 수준은 조금 미진하지만 그건 초딩이라는 걸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

"그래서, 조던링 하나 없는 거니?"

약간 의기소침해 한다.

"시간이 없어서요. 엄마는 아예 피시방을 못가게 해요. 그래서 수업 끝나자마자 뛰어가서 학원가기 전까지 잠깐 하거나, 아니면 아예 학원을 띵까고 가는 수밖에 없어요. 하루에 한 시간도 하기 힘들어서 만렙 찍고 이만큼 한 것만해도 친구들이 쩔해줘서 간신히 한 거예요."

교우관계도 괜찮네. 체크.

"그럼 집에 늦게갔다는 건 메피잡다가 그런거니?"

"네. 와. 아저씨 진짜 다 아시네요. 템이 안좋아서 메피를 그렇게 빨리 못잡아요. 가끔 쩔뚝이한테도 죽구요. 엄마한테 안 들키려면 빨리 돌면 메피 두 마리, 아니면 한 마리 밖에 못잡아요. 두 번째 잡을 때 실수가 많이 생기면....집에 늦게 가게 되고...혼나고 그래요."

"그렇구나. 자 일단 이거 적어줄테니 친구등록하렴. 이건 아저씨구, 이건 아저씨 아들이야. 아무한테나 아저씨 이름 대고 말 걸고 방 파면 돼. 조던링 하나는 있을 거고, 그 외에도 아저씨가 있다가 아마존 템이 쓸만한 게 있나 좀 살펴볼께. 졸업템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당장 네가 쓸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 옵 비교해보고 받을 거 받아가렴."

쪽지를 들고 멍하니 날 쳐다보는 동현이에게,

"이럴 땐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이제 엄마랑 교대 할래?"

라고 친절히 일러준다. 동현이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고, 이어서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는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다.

"중독...맞나요?"

허허 그럴리가. 고작

"하루에 한 시간 게임하는 게 중독이면 대한민국 초/중/고등학생의 9할은 게임중독입니다. 동현이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 그런가요? 그러면 그 피씨방인가 게임방인가도 계속 가고 그러다가 귀가까지 늦고 그런 건요? 아무리 말을 해도 말을 안들어요."

"피씨방에 가는 것도, 그러다 귀가가 늦는 것도 결국은 집에서 못하니까 그런 거예요. 집에 컴퓨터가 없거나, 그 컴퓨터로 동현이가 하는 게임을 할 수 없거나, 혹은 할 수 있어도 사실상 못하게끔 눈치를 주거나 하니까 밖에서 하는 거지요. 말씀하신 부분이 우려되신다면 컴퓨터를 새로 장만하고 눈치 안보고 집에서 게임할 수 있게 자유를 보장해주면 돼요."

"아니, 그런데, 그게,"

마음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딜 넣을 각이다.

"공부 안하고 게임하는 게 걱정이시죠?"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정신과 선생님이 어떻게 애한테 게임을 시키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걸렸다. 이니시가 제대로 들어갔다.

"어머님, 교회다니시나요?"

"네? 네, 그런데요.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럼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도 아시겠네요."

"아 그거야 당연히...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데 하나님께서 구해주시는 거잖아요."

"들어보세요. 아브라함은 100살이 되어서야 이삭을 얻었어요. 대체 얼마나 이쁘고 귀여웠을까요. 세상 모든 걸 다 주고 싶고, 잘못되지 않기를 온 마음으로 빌며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 자식을 그르치는 건 보통 이런 마음이에요. 자식을 하나의 독립된 사람, 나와 같은 당당한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나의 자식, 나의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아이를 질식시켜요. 성경을 빌려 말해보자면,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삭도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자기 아들로 여겨 애지중지하는 건 하나님의 아들을 도둑질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마음 속에 있는 네 자식으로서의 이삭을 죽이고, 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존중하며 보살피라고 명하신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지금 마음 속에서 동현이를 죽이지 않으면 나중엔 정말로 동현이가 죽을지도 몰라요"

엄마가 울먹거린다. 사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이 느낌을, 매일매일 자기 자식을 마음 속에서 죽이는 이 기분을 알고 있다. 아이는 점점 더 자라고, 점점 더 나와 같은 어른이 되어간다. 언젠가는 울타리를 깨고 나가, 죽든 살든 오롯이 자신의 책임으로 야생에서 살아갈 것이다. 자식이 잘 나갈 때의 영광을 나의 것으로 돌리지 않는 겸손함은 오히려 쉽다. 자식이 험한 길을 골라 깨어지고, 쓰러지는 고통을 겪는 걸 보면서 '그래, 그것도 너의 선택이요 너의 책임이요 너의 십자가다.'라며 삼키고 넘어가는 것은 무척 어렵다. 자기 손으로 아들을 묶어 칼로 내리치는 아브라함의 마음 만큼 어렵다.

"그럼, 그럼 이제 어떡해야하죠? 제가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어머님, 저는 이삭을 데려오는 아브라함을 많이 봤어요. 아브라함은 이구동성 이삭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기실 거의 대부분은 아브라함 자신의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경우였지요. 동현이에겐 아무 문제가 없으니 다음주부터는 어머님만 오세요. 몇 주 상담 받고 나면 많이 좋아지실 거예요. 아들과의 관계도 개선될 거구요. 아! 컴퓨터랑 게임 사주는 거 잊지 마시구요. 디아블로2라고 있어요. 가능하면 어머님도 같이 해보는 게 좋아요. 아들을 이해하려면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게 중요해요. 아시겠죠? 같이 해보세요."




----------

자, 이걸로 한 건 했고... 다음 환자는 1시간 뒤니까 컴퓨터부터 켜고...


KiaTwins: 아빠 이시간에 뭐해 ㅋㅋㅋ상담 안해?

Barbariman: 메피 잡지 ㅋ 근데 넌 왜 부캐야?

KiaTwins: 나 팔라딘 접으려고. 아무리해도 안 되겠어.

Barbariman: 그러게 내가 진작 포기하랬잖아 ㅋㅋㅋ 야 근데 왜 소서리스를? 아마존 하라니까.

KiaTwins: 소서가 열라 짱이래. 친구들이 그러는데 일단 웜쓰 다 찍고 나중에 프로즌오브 다 찍어서 화면 밖에서 막 날려도 다 잡을 수 있대. 쩔 해줄 거지?

Barbariman: ㅠㅠ


결단력, 판단력, 균형감각 모두 꽝. 몇 달이나 챠지딘 가지고 고생하더니 결국 바꾼게 프로즌 오브 소서야? 내가 아마존 하라고 그렇게 잔소리했는데? 주여, 당신의 어린양 기아트윈스를 알아서 잘 인도하소서. 아브라함은 이제 모르겠나이다.



5
  • 우왕… 같은 성인인데 생각의 깊이가 다르네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128 일상/생각군 시절 에피소드 -1 12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11/10 3480 1
4129 음악(영어주의, 자막없음 ㅠ) 조성진의 12문답 7 elanor 16/11/11 3936 0
4130 정치최후통첩이론과 po죽창wer 5 불타는밀밭 16/11/11 4718 2
4131 기타학교평가설문에 대한 학생들의 대답 30 OshiN 16/11/11 4891 0
4132 일상/생각군 시절 에피소드 -2 12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11/11 4240 0
4133 문화/예술레너드 코헨 - NPR 방송 3 까페레인 16/11/11 3958 0
4134 일상/생각영화 <색, 계> (와 아주 살짝 관련된 이야기) 16 black 16/11/11 4832 17
4135 방송/연예11월 09일, Ben님을 만나고 온 후기 3 Ben사랑 16/11/11 5267 0
4136 일상/생각꼰대가 싫다. 12 진준 16/11/11 3442 0
4137 일상/생각초행길은 무서웡 9 성의준 16/11/11 3823 8
4138 정치청와대가 11월 12일 집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나보군요. 7 ArcanumToss 16/11/11 4258 1
4139 정치[불판] 12일 민중총궐기 44 Toby 16/11/12 4577 1
4140 게임라이엇의 역대급 신규 스킨. 초월럭스 티져 공개 5 Leeka 16/11/12 6423 1
4141 방송/연예신계 싸이가 2개의 기록을 추가했습니다. 4 Leeka 16/11/12 3451 0
4142 기타코헨... 커버곡. 3 새의선물 16/11/12 3024 1
4143 의료/건강화병과 우울증 3 모모스 16/11/12 6686 8
4144 일상/생각짝사랑 해보고 싶어요! 24 진준 16/11/12 4215 0
4145 정치11월 26일이 기다려집니다 19 Raute 16/11/12 4086 0
4146 일상/생각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후기입니다. 15 nickyo 16/11/13 3988 12
4148 일상/생각낯선 이에게 호의를 베풀지 못하게 되었나봅니다. 39 똘빼 16/11/13 3927 2
4149 일상/생각진정한 친구이자 동료가 있었던 사람 17 swear 16/11/13 5606 1
4150 게임또 거짓말을 한 데스티니 차일드(내용 추가) 13 Raute 16/11/14 5122 0
4151 기타사진이벤트 내일 마감입니다. + 몇가지... 3 난커피가더좋아 16/11/14 3042 1
4152 창작[한단설] 아브라함과 이삭 15 기아트윈스 16/11/14 3841 5
4153 일상/생각후대에게 2 nickyo 16/11/14 4195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