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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11/17 04:40:35 |
Name | 커피최고 |
Subject | 신칸센, 세계최초의 고속철도 - 소고 신지와 엘리트 네트워크 |
누가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철도는 국가의 신경망이다" 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근대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철도는 정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철도는 분열되어있던 각 지역을 하나로 묶어 총체적인 국토를 형성하게 만들었죠. 이처럼 근대의 상징으로서 여겨지는 철도는,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수탈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만주와 우리 한반도가 대표적인 경우겠고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일본의 자본주의는 유럽 열강에 비하면 그리 성숙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자연히 일본 국내 물동량은 그리 많을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당시 일본 철도에 자문 역할을 해주던 영국은 작은 열차를 운행하자고 조언했습니다. 이른바 "협궤" 열차죠. 하지만 한반도와 만주는 수탈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표준궤를 깔았습니다. 더 많이, 더 빨리 자원을 가져와야했으니깐요. 보통 철도는 100여 년을 가는 인프라입니다. 2차대전 즈음해서 협궤가 노후화되어가고 있었고, 때마침 전쟁을 위한 자원도 더 신속히 수송할 필요가 있어서 수립된 계획이 바로 "광궤 신칸센" (새로운 간선) 계획입니다. 말이 광궤지 실제로는 표준궤 사이즈입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하는데, 당시 일본의 모든 에너지와 자본이 군부에 몰빵되다보니, 거대한 철도 인프라를 깔만한 여력이 없던 거죠. 뭐, 아무튼 일본은 패망합니다. 맥아더 미군정의 최우선목표는 일본으로부터 군국주의 색깔을 쫙 빼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미쯔비시 같은 전쟁 관여 기업들을 죄다 해체하였습니다. 동시에 관련 인재들 역시 공직으로부터 추방하였죠. 교통 인프라도 비슷한 노선에서 개편을 추진했습니다. 국가 주도의, 집단적인 느낌을 주는 철도를 대체할 교통 수단으로서 보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마이카" , 즉 자동차를 미래 교통 수단으로서 밀어붙였습니다. 이렇게 철도와 도로교통이 경쟁하게 됩니다. 하지만 도로교통쪽이 워낙 유리할 수 밖에 없던 것이, 미군정이 강력하게 요구했던 바이기도 해서 일본의 무역 및 산업 정책을 관장하는 통상산업성(MITI) 측에서는 이미 일본 국민차&고속도로 건설 플랜을 1950년도에 수립해놓은 상황이었거든요. 월드뱅크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차관을 지급하면서 생겨난 것이 도메이, 메이신 고속도로와 토요타 자동차입니다. 도로교통이 이렇게 여객수송의 파이를 뺏어가는 와중에, 항만교통이 화물수송의 파이도 마저 뺏어가는 상황이었으니 철도 입장으로서는 발을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죠. 더군다나 군국주의 시절 해외파견갔던 인력들이 국내로 돌아오면서 조직 자체도 지나치게 비대해졌습니다. 이런 내외적인 상황이 맞물리면서 일본국철에 막대한 적자가 쌓이게 됩니다. 항공교통까지 등장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철도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 질서있는 퇴장만이 남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55년, 일본국철 사장 자리가 비게 되었습니다. 근데 누가 이런 난국에서 그 자리에 앉고 싶겠어요? 고생고생 끝에 일본정부가 지명한 인물이 바로 소고 신지(十河 信二) 입니다. [가운데 일흔 넘은 할배가 소고 신지] 도쿄제국대학 법대 출신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양반입니다. 그러나 군부 꼰대들 밑에서 일하긴 싫어서 철도쪽에서 일했던 사람이죠.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였기에 은퇴한 상태였고, 일본철도 올드보이들이 모인 자문 기관의 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폭탄이 돌고 돌아 이 영감한테까지 오게 된 겁니다. 철도에 애정이 있었던 거겠죠, 제안을 수락한 소고 신지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1. 경영의 민주화는 개나 줘버려라. 독재, 결코 다시 독재! 당시 미군정의 요구로 인해 정부의 일개 부서였던 철도청은 일본국철이라는 공기업의 형태로 바뀌어있었습니다. 정부 부서 관계자와 민간주주들로 구성된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일본국철이 운영되었는데, 자기는 이런 판에서 일 못하겠다는 겁니다. 일본 정부는 흔쾌히 수락합니다. 뭐 살날도 얼마 안남은 영감탱이가 뭘 어쩌겠어? 하면서요. 이렇게 소고 신지는 대표이사로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2. 2차 대전 직전 수립된 광궤 신칸센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자. 소고 신지는 철도의 질서있는 퇴장을 잠자코 볼 요량이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철도를 살려낸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무조건 속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하이테크로 철도를 무장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들 노망났다고 비웃었습니다. 영감은 친위대를 조직할 필요가 생겼고, 제일 먼저 일본국철에서 자신의 계획에 찬동하면서도 능력있는 인재들을 발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친위대장을 찾아냅니다. [나중에 69년도에는 일본 우주항공개발기구(JAXA)의 초대 이사회장으로도 임명되는 먼치킨, 시마 히데오] 바로 이 시마 히데오(島 秀雄)라는 사람입니다. 근데 사실 찾아냈다기에는 어폐가 있는게, 시마 히데오의 아버지와 소고 신지가 절친 사이였거든요. 이른바 엘리트 네트워크인 셈이죠. 워낙 똑똑했었나봅니다. 이 사람 역시 도쿄 제국 대학 출신입니다. 공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군부에서 스카웃하려고 했다네요. 그러나 이 양반은 군사무기를 만들기는 싫다면서 근대국가의 핵심 인프라인 철도 쪽에 몸담습니다. 특히 유럽의 선진 철도 기술을 염탐하는데 주력하였죠. 사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달성하긴 했지만, 유럽열강에 비하면 많이 뒤처진 상태였기 때문에 산업스파이들을 유럽에 많이 침투시켰다고 합니다. 시마 히데오는 20년대 말에 그 팀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그는 유럽에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일본은 그 때서야 열차 속도가 막 110km를 통과하는데, 유럽은 이미 실용화가능한 300km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다만, 유럽에선 그것이 큰 이익이 아니라고 봤기에 실용화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시마 히데오는 이 경험을 토대로, 일본철도를 살리기 위해선 이러한 속도를 철도에 구현해내어 비행기와 경쟁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소고 신지와 의기투합할만하죠. 근데 머리와 몸통만 있으면 뭐합니까, 팔다리가 있어야죠.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할 기술자들이 없다는 게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의 공직 추방령 때문에 당대 일본 최고의 기술자들은 때마침 모두 백수였죠. 이들은 국철 산하의 철도기술연구소에서 몽땅 스카웃해갑니다. 분야 가릴 것 없이요. 심지어 공군 관련 기술자들도요. 그리고 이런데서 의도치않은 화학 작용이 일어나는 법이죠. 당시 신칸센 연구팀이 마주한 기술적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 280km를 돌파할 때 나타나는 스네이크 현상 2. 디젤 기관이 무거워서 300km를 돌파하기가 힘들다능 ㅠ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공군 기술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특히 두번째 문제 해결 방안이 그렇게 심플했다고... "음, 가벼운 비행기 엔진을 달죠?" ㅋㅋㅋㅋ 네, 아무튼 이렇게 기술적인 난관들은 착착 해결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대대적인 공사는 늘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에 맞닥뜨리기 마련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고 신지의 플랜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 반대를 극복하고 공사 진행 컨펌을 받을 수 있게 된 힘이 바로 소고 신지의 도쿄 제국 대학 법대 엘리트 네트워크입니다. 자신의 아들뻘 후배들이 50년대에 막 만들어낸 공룡여당이 자민당이었거든요. 제도는 결국 형식적인 틀에 불과하고, 그 동력 자체를 분석하기 위해선 이런 인맥을 파악해야하는 거죠. 소고 신지는 자민당 구성원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고속철도의 유용성에 대해 설득하였습니다. 자민당 인사들도 공공 인프라 사업이 잘 진행되면 자신들의 집권에 유리해지기 때문에 점점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철도 공사는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그 도중에 혹시라도 갓 만들어진 자민당이 집권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가능성까지도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돈도 없었고요.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도로교통 때처럼 월드뱅크의 차관을 가져오고, 그 채무를 일본 정부가 지는 것으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부족한 재원도 메우고, 국제적 관계가 형성되어버렸으므로 프로젝트 추진의 의무까지 생기게 된 것이죠. 그 다음 문제는 국민적 반발이었습니다. 아니 안그래도 사양산업이라던 철도에, 그것도 엄청난 적자를 짊어지고 있는 일본국철에 저런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는다고????? 화가 나지 않을 국민이 없겠죠. 그래서 꼼수를 씁니다. 아예 새로운 기관인 "철도건설공사"를 만들어 회계에 장난을 치는 것이죠. 한국 KTX도 나중에 이런 방식으로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을 만들었었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토지 매입 문제였습니다. 신칸센의 첫 레일은 일본의 최대규모 도시인 도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구간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은 모두 산업발전이 활발한 곳이었기 때문에 땅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그래서 자민당 파워를 앞세운 일본 정부는 정말 놀라운 법을 제정합니다. 구체적인 명칭은 기억이 안나는데, 그 내용은 "정부의 공공사업과 관련된 토지는 일단 정부가 수용한 뒤, 협상한다." 이었습니다. 시장경제고 나발이고 매우 강압적인 조치죠. 일본은 이처럼 국가권력이 매우 막강한 곳입니다. 이렇게 신칸센을 위한 토지도 확보하게 됩니다. 자, 55년만 하더라도 철도산업은 사양산업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의 56년 소고 신지가 대표 이사로 취임하고, 57년 본격적인 신칸센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프로젝트 시작과 동시에 이들이 선포한 것은 "64년 도쿄올림픽까지 신칸센을 완성하겠다"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7년 만에 성공해냅니다. 근대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낙후된 협궤철도를 지니고 있던 일본이 사양산업을 혁신산업으로 바꾸는데 걸린 시간이 고작 7년이었던 셈이죠. 이들의 염탐 대상이었던 프랑스는 81년, 독일은 91년이 되어서야 고속철도를 만들어냅니다. 이들이 기술이 없어서 오래 걸렸을까요? 결국은 제도와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였던 겁니다. 과도한 정치권력집중화가 혁신적인 공공 인프라를 만들어내었고, 그 공사기간을 단축하였습니다. 그만큼 국민 세금을 아꼈다는 점에서 볼 때, 어찌본다면 절차적 민주주의를 버리고 결과적인 민주주의를 이루어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국가 중심적 조합주의 모델의 프랑스가 사회 중심적 조합주의 모델의 독일보다 10년이나 앞서 고속철도를 만들어냈다는 점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나 싶네요. 프랑스 국민들이 TGV를 하하호호 타고 다니는 동안, 독일에서는 고속철도 사업을 두고 온갖 로비가 행해졌으니깐요. 물론 권력집중, 국가중심적 모델이 최고다!!! 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공공정책, 그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공공 인프라 산업과 관련해서는 참고할 부분이 있다는 이야기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엘리트, 지식인과 같은 "사람"의 네트워크를 짚어나가는 것에 있다!!! 면서 할 짓 없는 새벽에 산만한 글을 정리해봅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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