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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2/29 17:00:30
Name   tannenbaum
Subject   옛날 이야기 - 2

외할머니의 본처가 내어 준 땅은 드넓은 평야도 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도 아니었다. 산 아래로 흐르는 조그만 개천을 따라 옹기종기 펼쳐진 그저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이었다. 하지만 그런 땅이라도 전답 한 뼘 없는 가난한 동네 소작농들에게는 식구들 입에 풀칠이라도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혹시나 내년에 소작을 못하게 될까 지주의 마름에게조차 벌벌 길 수 밖에 없었다. 일제시대부터 그 땅을 관리하던 할아버지의 아주 먼 친척이라는 김씨 아저씨의 도움으로 면 소재지에 집을 얻고 명의를 정리했다. 그렇게 첫 번째 가을걷이가 시작될 무렵 부산 본가에서 사람이 외할머니를 찾아왔다.

본가에서 온 그 사람은 젖먹이였던 내 어머니를 안고 있던 외할머니를 마당 가운데 무릎을 꿇렸다 한다. 그리고 모진 말로 왜 약조를 지키지 않느냐 동네가 떠나가도록 호통을 쳤다 한다. 돌아가는 길에 당장 외삼촌을 호적에서 지우지 않으면 이 집과 전답을 모두 빼앗고 길바닥으로 쫒아내겠노라 했다 한다. 강제로 외삼촌의 적을 지워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우시던 할머니는 결국 타지에 어렵게 살던 남동생 내외에게 연락을 했다. 땅 일부를 정리해 얼마간 목돈을 쥐어 주고 동생 호적에 외삼촌을 양자로 입적시키셨다.

[첩년]

사람의 혀라는 건 정말 무섭다. 인터넷은 커녕 전화 조차도 몇 없던 그 깡촌 시골마을에 어찌 그리 빨리 알려졌는지.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의 첩이었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본처에게 쫒겨나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사실이 동네에 퍼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다. 소문은 눈덩이 굴러가듯 커져 가난한 어부의 딸이었던 외할머니는 오늘은 기생이 되었다가 내일은 양공주가 되기도 했다. 우둔하고 순박한 시골 사람들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놀이거리를 찾은 그만큼 잔인하고 집요했다. 땅을 빌린 사람들은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지만 돌아서면 손가락질 하며 숙덕거렸다. 면 소재지 학교에 다니던 외삼촌도 첩년의 자식이라고 참 모질게도 놀림을 받았다 한다. 그래서였을까. 외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좋은옷, 좋은신발, 시골에서 보기 힘든 구두를 신기고, 도시락 하나도 호사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라도 동네 사람들에게 자식들만큼은 쉬이 보이게 하고 싶지 않으셨겠지.....

생각해보라. 1950년대, 서른도 안된 과부, 본처에게 쫒겨나 시골로 오게된 젊은 애기엄마... 동네 젊은 총각부터 칠순을 넘긴 노인네들까지 남정네들이란 남정네들은 어떻게든 외할머니를 한번 건드려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그나마 외할머니의 땅을 빌어짓는 사람들은 차마 그러하지 못했으나 다른 사내들이란 사내들은 술취해 밤에 찾아와 대문을 부서져라 두드린 적도 부지기수였다. 오죽했으면 해가 지면 대문 밖으로 아예 나가지 않으셨을까..... 호시탐탐 외할머니를 어찌 해보려던 남자들은 외삼촌이 고등학생이 되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었다. 돌아가신 분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외삼촌은 어지간한 왈패보다 더하신 분이셨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안 좋은 점들만 물려 받은 듯 불같은 성격에 고등학교 적부터 읍내로 광주로 패거리를 몰고 나가 싸움질을 하고 다니셨단다. 좀더 나이들어서는 술, 도박, 주색까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젖먹이적부터 본가에서 그 구박과 천대를 받았고 머리가 커져서는 동네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자라왔으니 나라도 미쳐 돌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럴때마다 외할머니는 경찰에 찾아가 뇌물을 주고 외삼촌을 빼오는 것이 일상이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삼촌은 사업을 하겠노라 외할머니의 땅을 일부 정리해 부산으로 떠나셨다. 남아 있는 땅으로 내 어머니와 같이 사시다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어머니를 입학시키셨다. 그렇게 쓸쓸히 자식들을 기다리는 어느 날 이었다. 고3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온 어머니는 어릴적 친구네 집에 놀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친구네 집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교대를 졸업하고 고향의 국민학교로 부임해 근무 하시던 내 아버지이시자 외할머니 땅을 소작짓던 소작농의 큰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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