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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1/17 19:39:06
Name   tannenbaum
Subject   가마솥계란찜
혹시 다들 드셔본 적 있으시려나 모르겠네요. 무쇠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뜸들이기 직전 올려서 쪄낸 계란찜이요.

시골생활이라는게 그리 녹녹치 않아서 계란을 모으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마당에 풀어 놓고 키우는 닭들이 집안 여기저기에 숨겨 낳은 계란들을 보물 찾기 하듯 모아냅니다. 얌전히 닭장에 낳아주면 계란 모으기가 참 쉬운데 이 소심한 닭들이 알을 감추고자 하는 본능인지 뭔지 꽁꽁 숨겨서 낳기도 합니다. 집 뒷산으로 오르는 외얏나무 아래 풀숲에서 한알, 대나무 밭에서 두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툇마루 밑에 세알.... 한참을 그렇게 찾다보면 바구니는 가득 차곤 했습니다. 가끔 갓 낳은 계란을 줍기도 하는데 따끈따끈한게 왠지 느낌이 좋았던 기억도 납니다. 물론 저는 풀숲을 뒤지고 다니느라 그새 그지꼴이 다 되었지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계란들은 그림이 떡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아진 계란들은 다음 오일장에 내다 팔기 위한 것이었지 우리 식구들 몫은 아니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1981년 즈음 할머니 따라 장터에 나가 '계란 한바구니에 천원~~' 외치곤 했습니다. 계란을 일찍 다 파는 날이면 할머니는 짜장면을 사주셨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할머니 따라 장에 가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어떤날은 계란을 다 팔았는데도 중국집을 패스하고 그냥 집으로 가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날은 짜장면 사달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입만 댓발 나와서 툴툴거렸던 기억도 나네요. 집안이 형편이 그리 넉넉치 못해 짜장면 한그릇 500원도 아쉬워서였는데 저도 참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모아판 계란들은 겨우내 입을 점퍼가 되기도 했고, 한참동안 들어오지 않았던 아랫방 백열등이 되기도 하고,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의 약이 되기도 했습니다. 잘해야 일, 이만원 남짓한 계란 값은 시골살이에 숨통이 틔이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날이면 날마다 계란 주으러 온 집안을 뒤지고 다니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작은아버지 식구들이 시골 할머니댁을 방문했었죠. 무슨 날이었는지는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안나네요. 치매는 아직 아닌 것 같은디.... 당연하지만 다섯살이던 사촌동생도 같이 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사촌동생이 너무 반가웠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더 없이 기뻐하셨습니다. 매일 보는 저보다야 1년에 몇번 볼까말까한 사촌동생이 더 반가운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그땐 저도 국민학생이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사촌동생만 이뻐라 하는 두분이 조금 미웠습니다. 사촌동생놈도 괜시리 얄미워졌구요.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작은어머니께서 광에 들어가시더니 모아논 계란 통에서 계란을 세개 꺼내오시는 겁니다. 평소 할머님께 계란 후라이 해달라고 찡찡댈때마다 장에 팔아야 되니 안된다 하셨던 기억이 났습니다. 어라. 저 계란 건들면 안되는데. 장에 팔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제가 그 계란 손대면 안되요 작은어머니께 말 한건 아니구요 속으로만 생각했지요.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네다섯살 아이들이 시골에서 담은 김치, 텃밭의 나물, 겨우내 담가 놓은 짠무무침.. 이런 반찬이 지아무리 맛있다해도 어린애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은 아니지요. 제 사촌동생도 할머니 장독대표 반찬들을 좋아했을리 만무하구요. 그래서 작은어머니는 계란찜이라도 해서 비벼주실 요량으로 계란을 광에서 가지고 나오셨던거지요.

예상대로 저녁상에는 무쇠가마솥 표 계란찜이 올라왔습니다. 파 향이 살작 더해진 고소한 계란찜 냄새는 입안에 침이 고이기에 충분했습니다만....... 작은어머니는 계란찜 그릇에 바로 밥을 비벼 들고 밥투정하며 돌아다니는 사촌동생을 쫒아다니며 먹이셨습니다. 무슨 자존심이었는지 나는 절대 저 계란찜이 먹고 싶지 않다는 듯 일부러 계란찜 그릇을 외면하며 된장국에 밥을 후다닥 비웠습니다. 그리고 00이 만나기로 했다며 방을 나와 키우던 메리를 데리고 뒷산에 올랐습니다. 그때는 작은어머니도 밉고 사촌동생도 밉고 할머니도 미웠습니다. 나한테는 장에 판다고 손도 못대게 했으면서 사촌동생한테는 세개나 줬다고 겁나 미웠던거죠. 생각하면 조금 민망하네요.

나중에 나중에 명절에 작은어머니에게 그때 이야기를 했던적이 있습니다. 그날 저도 그 계란찜 무척 먹고 싶었다 말씀드리니 기억도 못하시더라구요. 그리 먹고 싶으면 나도 달라고 말을 하지 그랬냐? 그리고 그때가 언제적인데 아직까지 담고 있었냐며 쪼잔한 놈 소리만 들었다지요. 다시 생각하니 또 억울해질라 그러네요. 헤헤.

다음날이었나 다다음 날이었나 작은집 식구들이 돌아간 날 저녁이었습니다. 평소처럼 밥상을 펴고 수저를 놓고 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할머님이 대접에 계란찜을 만들어 들고 오셨습니다. 족히 열개 분량은 되어 보이는 푸짐한 계란찜이었습니다. 게눈 감추듯 계란찜 대접에 얼굴을 파묻고 먹었습니다. 할머니도 다 보셨던거죠. 입맛만 다시고 있던 제 모습을요. 말은 안하셨지만 당신 속은 또 얼마나 상하셨을까요. 계란 그깟게 뭐라고 손도 못대게 하고 달라는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제 모습이 가슴에 걸리셨던거지요. 그날 이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무쇠솥에 올려 계란찜을 해주셨습니다.

마당에 풀어 키운 유기농계란인 탓도 있겠지만... 이 나이적까지 그날 먹었던 계란찜보다 맛있는 계란찜은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유기농계란+무쇠가마솥+할머니손맛 콤보를 그 어떤 계란찜이 대적할 수 있을까요? 아마 죽을때까지 그 맛을 다시 경험하긴 어렵겠지요.



으아... 할머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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