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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06 21:15:22
Name   tannenbaum
Subject   8살 시골소년의 퀘스트 수행 이야기.
때는 바야흐로 실록이 우거진 1982년 여름 전라도 어느 깊은 시골마을. 두둥탁~!!

여름방학을 한 저는 매일매일 탱자탱자 노는 게 너무나 좋았습니다. 매일 그 더위 속에서 왕복 두시간씩 학교에 다녀오지 않아도 된다는 건 넘나 좋았습니다. 매일 메리랑 산으로 들로 쏘다니면서 삐비도 뽑아먹고 포리똥(보리수열매) 뜯어 먹고 목마르면 계곡물 먹고 나무 그늘에 잠도 자고.... 하지만 그렇게 놀면서도 시때로 고추밭에 주전자로 물 길어 날라 물 줘야 했었고 고구마 밭에 보초서며 고라니며 날짐승들 쫒아내야 했었습니다. 방학이었지만 학교 다닐때보다 더 바쁘게 지내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니 서울 살때 전철이랑 기차 타봤제잉? 집에만 있으믄 심심한께 광주가서 기차타고 막내 삼촌한테 다녀 와라잉'
'응 알았어. 어딘데?'
'어. 너 수원 알제? 그 우짝에 안양이라드라'

할머니는 저에게 전라도 깡촌마을에서 안양에 계시는 막내 삼촌댁까지 중요한 서류를 배달하라는 미션을 주셨습니다. 미션을 받은 저는 마구 신이 났습니다.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듯 마음은 한들거렸고 괜시리 기분이 좋아 붕붕 날아 다녔습니다. 드디어 미션 수행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길이 멀어 서둘러 일어난 저는 졸린 눈을 비비벼 이른 아침을 먹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난 할머님은 나무도시락에 시금치, 단무지, 계란만 들어간 투박한 김밥을 싸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참으로 먹으라며 사이다 한병, 삶은계란과 서류봉투, 참기름 몇병을 제 가방에 담아 주셨습니다. 말려 놓은 취나물 한가득 보자기에 담아 손에 쥐어주시며 기차시간 놓친다며 빨리 가라고 하셨죠. 할머니께 꾸벅 인사를 드리고 신난 마음에 폴짝 폴짝 뛰면서 읍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아침이슬 내린 길을 한참을 걸어 읍내에 도착하니 광주로 가는 버스 시간이 약간 남았습니다. 정류장 의자에 걸터앉자 바로 앞 점방에 깔린 과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새우깡, 맛동산, 초코파이, 돈부과자, 티나크래커...... 침이 꼴깍 꼴깍 넘어가는 걸 억지로 참으려 고개를 돌려 도로만 멀뚱이 쳐다봤지만 머릿속에서는 온갖 과자들이 뛰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머릿속은 정신없이 계산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광주까지 버스가 150원, 광주에서 안양까지 2000원, 광주터미널에서 광주역까지 시내버스 50원.......  시뮬레이션이 끝나자 예산 중 약 2천원 가량이 남았습니다. 그 금액에서 안양에 다녀와 문방구 건담프라모델 1500원을 써도 500원이 남는다는 결론에 이르자 저는 당당하게 점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100원짜리 새우깡을 들고 광주행 시외버스에 올랐습니다. 근데 분명 아끼고 아껴서 먹었는데 새우깡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막 서운해졌습니다. 그때쯤 차비를 받으러 차장 누나가 제 자리로 왔습니다.

'어디까지 가니?'
'광주요~~♬'

차장 누나에게 150원을 내밀었지만 누나는 왠일인지 씩 웃으면서 괜찮으니 너 새우깡이나 하나 더 사먹어라 이러더군요. 그래도 난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는 마음에 두어번 더 내밀었지만 누나는 웃으며 머리만 쓰담쓰담 해주었습니다. 네. 맞아요. 버스비를 내밀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받지 말아라 받지 말아라~' 주문을 외웠습니다. 주문이 통했던걸까요? 끝까지 차장 누나는 차비를 안받았고 전 속으로 아싸!! 를 외쳤습니다. 한시간 반가량을 달려 대인동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지금은 유숙헤어지만 당시엔 대인동에 터미널이 있었습니다) 터미널에서 역까지는 걷기에 상당한 거리였지만 전 돈을 아끼려고 눈누난나 걸어갔습니다.  

광주역에 도착해 기차요금표를 보니 안양까지 소인 통일호 좌석은 2000원 입석은 1700원이었습니다. 300원이면 새우깡이 세봉지.... 전 망설이지 않고 입석으로 끊었습니다. 표를 끊고 보니 시간이 한시간 이상 남았습니다. 먼저 할머님이 시킨대로 공중전화로 안양 삼촌에게 전화를 해 1시차로 끊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날 아침 일찍 밥을 먹었던 탓에 벌써 배가 고파왔습니다. 역 광장 벤치로가 할머님이 싸준 김밥과 사이다를 꺼냈습니다. 아뿔싸..... 병따개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이다는 포기하고 대나무도시락을 열어 김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웬 아저씨(지금 생각하면 고딩들) 둘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 나무도시락을 모르는 분들을 위한 그림. 대패처럼 얇은 나무와 종이로 된 도시락이 있었습니다.

'맛있냐? 사이다 따줄까?'
'네!!!'

그 고딩들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서 사이다를 뚜껑을 따서 주었습니다. 감사하다 김밥 먹으라 내미니 너나 먹으라 하고 이것저것 제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묻는대로 안양에 심부름 간다. 아침에 할머니가 왕복 여비하라고 총 000원을 줬는데 돈 아낄려고 기차표가 원래 2000원인데 1700원 입석으로 샀다. 술술술술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이것저것 묻던 그 고딩들은 씩 웃더니만 광장 끝쪽으로 갔습니다. 김밥을 다 먹고 도시락을 버리러 쓰레기통으로 가니 좀전의 그 고딩들이 절 손짓해 불렀습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전 쪼르르 그 고딩들에게 갔습니다. 그 고딩들은 갑자기 제 뒷덜미를 잡더니 광장 끝 골목안으로 절 데려갔습니다.

'너 가출한거 다 알아. 가출한 애들 경찰들이 잡아가는 거 알아? 몰라? 우리가 너 가출한거 봐줄테니까 아까 표 끊은거랑 돈 가진거 다 내놔'
'안돼요. 안돼요. 차비해야 돼요'
'너 진짜 혼 좀 날래?'

그 일행 중 한명이 제 배를 찼습니다. 아!! 진짜로 찬건 아니구요. 그냥 겁만 주려고 툭 찬 정도였습니다. 설마하니 아무리 막나가는 고딩이라도 여덟살짜리 꼬마애를 있는 힘껏 걷어차겠습니까. 가슴에 안고 있던 취나물 보따리가 완중체역할을 하기도 했구요. 하나도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너무 무섭고 겁이 났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돈을 다 뺐길거고 기차여행도 못하고 다녀와서 건담 프라모델도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이상황을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제 결론은 살작 맞아 아프지는 않지만 최대한 아픈척 소리지르자였습니다. 취나물보자기를 끌어 안고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으아아아악~~ 왜 때려요!! 으아아아아악~~ 내 차비야 내 차비야~~ 꺄아아아아아아~~'

순간 골목 끝에서 기차화통같은 굵은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야 느그들 그라고 딱 서있어. 이런 00 호로상노무00들이. 대빡에 피도 안마른 000들이 애델꼬 시방 삥을 까야? 눈깔도 까딱하지마 이 000놈들아. 확 아가리를 조사불랑께'

웬 덩치큰 군복을 입은 아저씨가 성큼성큼 오더니 그 고딩들을 쥐어 패기 시작했습니다. 그 고딩들은 잔뜩 쫄아서 찍소리도 못하며 줘 터지다 꽁지 빠지게 도망을 갔습니다. 고딩들을 쫒아 보낸 그 군인아저씨는 저를 일으켜세우며 괜찮냐 물었습니다. 순간 무섭고 겁나고 서러웠게 풀리면서 저는 울음보가 확 터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저를 화장실로 데리고가 세수를 시키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 주었습니다. 대합실에 앉아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고 조잘조잘 말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들은 그 군인은 픽 웃더니 매점에 데려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쥐어주었습니다.

'다음부터는 모르는 사람이 말 걸면 대답하지 말고 덩치 큰 아저씨들한테 달려가서 저 사람들이 돈 뺐을려고 그래요 말해야돼. 알았지?'

그러는 사이 기차시간은 다되었고 플랫폼까지 들어와 절 바래다주었습니다. 기차에 올라타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자 창밖에서 씩 웃던 모습은 흐려지긴 했지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제 비명을 듣고 온건지 절 골목으로 데려가는 걸 보고 온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때 그 군인아저씨는 어찌나 멋지던지요. 캡틴아메리카 쌈 싸먹고도 남지요. 암요 암요. 맨끝 좌석 등받이 뒤의 조그만 틈으로 기어 들어가 저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까 바닥에 굴렀을 때 참기름 병이 깨지진 않았을까 가방을 열어보니 다행이 삶은 계란들은 다 뭉개졌지만 참기름 병들은 무사했습니다. 참기름병들이 깨져서 혼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소주병은 세계제~~~일!!. 한두시간 쯤 지났을까요.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절 누가 깨웠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눈을 떴습니다. 대학생정도 되어보이는 서울가는 누나들이었습니다.

'얘. 너 여기서 뭐하니?'
'안양가는데요.'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혼자 가요.
'어머~ 얘 좀 봐. 자기 혼자 안양간대. 꺄르르르르. 얘. 너 누나들이랑 저기에 같이 앉아서 갈래? 여기 불편하잖아.'

그렇게 전 누나들 사이에 앉아 가게 되었습니다. 누나들은 이것저것 묻었고 저는 또 조잘조잘 대답을 했습니다. 할머니에게 퀘스트를 받아 서류랑 참기름을 안양 삼촌댁에 배달가는 중이며 시외버스 차장 누나가 버스비를 안 받았고 광주역에서 양아치들 만났는데 군인아저씨가 때려주고 아이스크림 사줬다 등등등..... 아주. 누가 툭 건드리면 줄줄줄줄 자동으로 읊어댔었습니다. 누나들은 뭐가 그리 재미 있는지 제가 한마디 할때마다 리액션이 참 컸습니다. 지금이야 그 얼굴도 생각이 안나지만 디게 이뻤다는 기억은 있습니다. 라벤더 향이 났던것 같기도 하네요. 누나들이 사주는 우유, 과자, 오징어 주는대로 받아 먹다 전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쯤 잤을까요. 안양역 다왔다며 절 깨웠습니다. 취나물보따리와 가방을 챙겨 멘 뒤 누나들에게 인사를 하고 안양역에 내렸습니다. 아침이슬 보며 출발한 하루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참 길고 긴 하루였습니다.

개찰구를 나오니 바로 앞에 마중을 나오신 막내 삼촌이 서 계셨습니다. 제 퀘스트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제 퀘스트 보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삼촌의 용돈.
할머니가 주신 여비 나머지(내려올 땐 삼촌과 함께 내려와서 나머지돈 다 굳었습니다. 아싸!!!).
문방구 베스트 아이템 건담 프라모델.

그리고.... 추억 한토막....
그 군인아저씨랑 서울가던 누나들 잘 살고 있겠죠.


p.s.1 - 본문의 금액들은 오래전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얼추 생각나는대로 적었습니다.
p.s.2 - 본문은 논픽션 90에 픽션 10정도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p.s.3 - 어린애를 혼자 먼길 보내는 게 위험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 시대에는 드문일이 아니었고 세상이 다 내맘같다 생각하셨기 때문일겁니다. 제 할머님에 대한 비난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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