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3/19 05:23:38
Name   알료사
Subject   가난한 사람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소설 제목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이후 쓴 모든 소설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의 제목에 부제로 쓰여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 죄와 벌' '가난한 사람들 - 악령' '가난한 사람들 - 백치' '가난한 사람들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이런 식으로요.

죄와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한 이유에 대해서 초인사상이니 비범한 사람이니 무슨무슨 복잡한 철학적인 평론을 많이들 하는데,

저는 확신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무슨 생각으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도끼를 들게 했는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해서 하숙집 월세 낼 돈이 밀렸고, 가난해서 여동생이 매춘에 가까운 결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했고, 가난해서 옷도 남루하게 입고 다녔습니다.

그의 모든 망상이 그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너무도 찌질하게, 가난한 사람의 운명에 저항하는 길이 악덕 전당포 주인을 살해하는 것으로 해결될거라고, 그리고 거기에 말도 안되는 명분들을 끌어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 명분들이 얼마나 찌질한지 잘 알기에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위악적으로 굴었습니다.

찌질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는게 차라리 나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었던 저는 라스콜리니코프에 너무도 절절히 감정이입했고, 동족혐오의 심리로 그를 혐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철저하게 짓밟고 패배시켰습니다.

죄를 지은 이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 - 사랑 - 라스콜리니코프와 똑같이 가난한 사람이었던 소냐를 등장시켜 그 가혹한 형을 집행시켰던 것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수사관 포르피리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자신의 범행방식과 은폐수법을 완전히 까발리면서 잡을테면 잡아 보라고 도발했습니다.

하지만 소냐를 보았을 때부터 두려움과 불안함에 휩싸였습니다.

자신과 똑같은, 아니 자신보다 훨씬 더 가난한 사람.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신과는 다르게 정정 당당하게 운명에 맞서고 있는 사람.

자신이 쓴 답안지가 틀렸음을 명명 백백하게 증명해내고 있는 사람...

그래서 소냐를 만날 때마다 겁주고 괴롭혔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애써 보아도 모든게 헛수고라고.

당신은 몸을 팔다가 병에 걸려 죽을 것이고 먹고 살 길이 없어진 동생들도 똑같은 처지가 될거라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불쌍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만, 정말로 불쌍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사랑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벌한건 소냐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찾아가 우리는 증거가 없어 너를 잡을 길이 없다, 고 솔직하게 백기를 들고,

하지만 너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자수하라. 최대한 정상참작 해주겠다. 고 권합니다.

찌질하기 그지없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문>에 대해서 <청년의 우수가 깃들여 있다>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해주기까지 하면서.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굴복합니다.

자수를 하면서도 오기를 부리던 그의 못난 자존심은 시베리아 유형지까지 찾아온 소냐의 무릎을 끌어않고 펑펑 울면서 무너져 내립니다.

많은 독자들이 라스콜리니코프의 그와 같은 패배를 마음에 들지 않아하고 갑작스럽고 근거 없는 회개라며 비판합니다만,

그런 분들께 저는 죄와벌의 첫 세 페이지만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합니다.  

그의 찌질한 망상이 아직은 새싹으로 자라고 있을 때, 그 자신이 얼마나 그 새싹을 제거하고 싶었는지 그의 독백으로 잘 나타나 있다고.


'죄와 벌' 은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박하고 야비하게 만드는지 너무도 무섭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청년은 가난한 청년만이 싸울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괴물과 싸우다가 패배하고, 가난한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오기와 자존심으로 그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발버둥치고,

가난한 사랑만으로만 가능한 구원을 받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모든 과정을 조금도 미화시키지도 않고 동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었던 저는 더 크게 위로받고 더 크게 용기를 얻었습니다.




타임라인에 쓸 잡상이 자꾸 글자수 때문에 티게로 넘어오네요 .. ㅋ  네, 어느 자학적인 의사분 때문에 쓰게 된 글은 맞지만 저격은 아니에요. 원래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인데 마침 가난을 이야기하시길레 속에 불끈 하고 나오는게 있어서 토해 봤어요... ㅎ



10
  • 춫천
  • 추천합니다.
  • 이런 글 좋아요
  • 도끼는 추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018 기타가격이 꽤 저렴한 대신 운영체제랑 HDD 빠진 삼성 오디세이 GS800 가감없는 리뷰. 1 ronia 18/08/08 4575 0
14912 일상/생각가격이 중요한게 아님 8 후니112 24/09/09 2823 0
13015 경제가계부채에서 고정금리와 변동금리 비율은? Leeka 22/07/23 3912 0
13450 정치가까운 미래는 햇살 가득한 평화? 새로운 암흑시대? 열한시육분 23/01/03 3163 1
13883 일상/생각가끔 이 세계가 또다른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할때가 있습니다. 6 큐리스 23/05/19 3288 0
13069 IT/컴퓨터가끔 홍차넷을 버벅이게 하는 DoS(서비스 거부 공격) 이야기 36 T.Robin 22/08/08 5912 24
8928 일상/생각가난한 마음은 늘 가성비를 찾았다 15 멍청똑똑이 19/03/04 6112 43
6058 일상/생각가난한 배부름. 11 프렉 17/08/04 6250 16
5228 도서/문학가난한 사람 48 알료사 17/03/19 6186 10
5107 일상/생각가난한 사랑 노래 20 열대어 17/03/08 4653 19
5643 일상/생각가난한 연애 10 tannenbaum 17/05/15 4544 16
9199 일상/생각가난한 월급쟁이 이야기. 22 세인트 19/05/15 7535 15
1116 IT/컴퓨터가난한 자(?)의 블랙베리 - 타이포 키보드 10 damianhwang 15/09/29 11092 0
10972 일상/생각가난해야만하는 사람들 51 rustysaber 20/09/20 7625 22
5949 일상/생각가난했던 젊은날 24 soul 17/07/14 5703 19
418 도서/문학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박가분 그리고 장정일 38 뤼야 15/06/24 14817 0
9489 오프모임가로수길! 목요일! 점심! 먹어요!(식당 마감) 49 나단 19/07/30 6237 5
4646 일상/생각가마솥계란찜 6 tannenbaum 17/01/17 4818 13
3813 일상/생각가면 13 elanor 16/10/03 3947 0
14172 일상/생각가문의 영광. 3 moqq 23/10/08 3274 0
7322 일상/생각가방을 찾아서 : 공교로운 일은 겹쳐서 일어난다. 10 化神 18/04/03 5444 9
12493 도서/문학가벼운 독후감: "의사 생리학" - 루이 후아르트 6 열한시육분 22/02/05 5242 8
1319 요리/음식가볍게 써보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간단한 치킨 리뷰. 12 관대한 개장수 15/10/22 12729 4
4525 일상/생각가볍게 적어보는 2017년 계획 17 쉬군 17/01/03 4303 0
846 기타가볍게 풀어 보는 장기 묘수풀이 (댓글에 해답있음) 7 위솝 15/08/26 6363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