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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3/27 07:51:19 |
Name | 은머리 |
Subject | 지능과 AI, 그리고 동서양의 차이일 법한 것 |
https://aeon.co/essays/on-the-dark-history-of-intelligence-as-domination 지능은 인간의 능력을 가늠하는 데 필수적이거나 부수적인 기준으로 종종 이용됩니다. 특정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조건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한 예가 되겠네요. 지능지수 같이 인간의 능력을 수치화하는 건 의사라든지 엔지니어라든지 심지어 지도자를 선출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어요. 이런 인간의 지능에도 어두운 면이 있는데 바로 인간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닌, 타인을 어떻게 부리냐를 결정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는 사실이에요. 이 사실은 서양의 역사에 잘 각인되어 있어요. 지능에 대한 서양의 편견의 역사는 식민지화와 노예제를 가능케 했고 인간을 멸족시키거나 살해하는 행위를 합리화하는 근거로도 쓰였었어요. 지능에 대한 신봉은 서양에서는 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플라토에까지 거슬로 올라갈 수 있어요. 플라토는 지적 능력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고고한 가치를 사고하게 만들고 현실에서 진리를 찾는 작업은 이성적인 사고를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하였지요. 오늘날의 이야기로 풀어쓰면 지능을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그의 이런 주장은 저서 < The Republic >에 잘 나와 있는데 그는, 이상적인 통치자는 '철학하는 왕’이라고 했어요. 철학자는 만물의 질서를 잘 풀어낼 줄 알거든요. 게다가 영리한 자들만이 대중을 아우르는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했어요. 지적 엘리트 계급의 통치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했죠. 서양의 이런 사고의 근원으로 말미암아, 서양철학이 기지개를 펼 당시 보통 지적 능력하면 유럽의 교육받은 남성을 떠올리게 되었어요. 여성을 지배하고 하류층을 다스리고 비문명권에 있는 인간이나 심지어 동물을 관장하는 남성으로서의 권리는 하나의 논거가 되었죠. 플라토는 이성의 우월함을 우리가 이룩할 수 없는 유토피아의 것으로 상정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남성을 명백하고 자연스러운 존재라고 했어요. 그 후 2000여년이 지나고도 이런 사고의 고리는 그닥 느슨해지지는 않았어요. 호주의 철학자이며 환경보호론자인 고(故) 발 플럼우드는 그리스 철학대가들의 일련의 주장들이 지능/무지, 이성적/감정적, 정신/몸과 같이 이원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어요.(주:여성학자로서 이러한 이원론을 비판한 호주학자라고 하네요). 남성/여성, 문명적/원시적, 인간/동물 같은 갈림과 마찬가지로요. 이런 이원론은 가치중립적인 게 아니에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명백하게 밝혔듯 이러한 이원론적 접근은 지배/피지배, 주인/종과 같은 관계에도 적용될 수가 있어요. 그걸 몽땅 뭉뚱그리면 가부장적 제도나 노예제와 같은 지배종속관계가 자연스러운 질서의 일부인 것처럼 꾸며낼 수가 있죠. 근대서양철학도 그 명맥을 이어 이원론적으로 출발한 경우가 자주 있어요.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가 심해서 심지어 동물들 사이의 지능차이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인식은 오로지 인간만이 전유하는 것이라면서요. 지능을 영혼의 자질이라고 믿는 성서적 사고를 많이 반영했지요. 데카르트는 자연은 글자그대로 지성이 없고 따라서 고유한 가치도 있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러므로 다른 ‘종’에 대해 압제를 가해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되죠. 지성이 인류를 정의한다는 이러한 사고는 계몽주의시대로 넘어가며 지배적이 되는데 엠마누엘 칸트가 그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어요. 고대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도덕철학자죠. 칸트에 의하면 이성적 사고를 하는 창조물만이 도덕적일 수 있어요. 이성적인 존재만이 ‘사람’으로 불리울 수 있고 사람으로 종결되는 본질적인 가치 자체이지요. 존재만으로는 이성적일 수 없어서 상대적으로 열등한 가치인 ‘things’가 존재할 수는 있는 거지만 우리는 이성이 있으므로 ‘things’를 우리 마음대로 다룰 수가 있는 거죠. 칸트에 의하면 이성적인 존재 (오늘날의 언어로는 지능적인 존재)에는 무한한 가치와 고귀함이 있고 이성적이거나 지능적이지 못한 존재에는 그것이 전무해요. 사실 그의 주장은 그보다 더 세련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아이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닮아 있어요. 자연스러이 본디 주인인 사람이 있고 본디 종인 사람이 있으며 지능이 이를 분간한다고 하는 것이죠. 이런 기조의 사고는 식민지화 논리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이에요. 비백인종은 덜 지능적이니 스스로나 자기들의 땅을 통치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므로 백인이 수고로이 짐을 떠짊어 지면서까지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영토를 차지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지요. 인류를 정의하는 것은 지능이고 그들은 덜 지능적인 탓에 덜 인간적이니까요. 덜 인간적이므로 전적으로 도덕적일 수도 없는 존재니까요. 따라서 그들을 노예화하는 것은 아주 합당한 것이었죠. 다윈의 진화설이 대두되면서 이런 식민정당화는 과학에까지 손을 뻗치게 돼요. 지능이 유전적이라면 마침 다윈의 자연선택설도 솔깃하겠다 우생학을 파고들며 덜 지능적인 존재는 인위적으로 퇴화시키고 고도의 지능을 장려해야 할 것이란 사고에까지 이르죠. 따라서 우생학과 아이큐가 같은 시기에 태어나게 되었고 그 후 수십년 동안 아이큐 점수가 형편없었던 유럽과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임신을 못하도록 강요당하기도 했어요. (주 : 금시초문. 또잉). 이런 인류파괴적인 근거로서가 아니더라도 지능지수는 사회적으로 꽤 가치있는 어떤 잣대로 사용되기도 해요. 특정 학교의 입학조건이기도 하고 도널드 트럼프 같은 경우 자기 휘하 행정관료들의 평균 아이큐가 높다며 으시대기도 하죠.(주: 뻥쟁이라 진짠진 모르겠고 여튼 아이큐에 대해 사회가 그만큼 좀 쳐주니까요). 여튼 이런 2000여년에 걸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 온, 지능에 대한 때로는 신화적이랄 만한 서양의 신봉에 비추어 보건데 수퍼스마트한 AI 내지 강인공지능의 도래를 앞두고 있다고 하는 지금 수퍼지능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서양의 모습은 뭔가 '먹어 본 놈이 안다'는 느낌을 주지 않나요? 뉴욕의 학자이자 과학기술자인 케이트 크로포드가 그런 말을 해요. 악당 인공지능을 상정하고 두려워하는 건 유독 서양 백인 남자들 사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고요. 다른 이들은 백인남성이 자청했던 오랜 지배를 견뎌왔고 아직도 현실의 압제자들에 맞서는 데 분주한 반면 백인남성들은 항상 그 상위의 자리에 있었어요. 새로운 우월자가 나타나면 백인남성우월주의를 정당화하던 자기네들이 곧 패배자가 돼요. 물론 강인공지능에 대해 순전히 과학적으로 우려할 만한 이유가 없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우리 인간은 지능이라는 걸 가지고 서로에 대항하는 데 지나치게 소비해왔단 말이죠. 이 또한 해가 될 수 있거든요. 강인공지능을 마냥 신뢰하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면야 역시 하나의 무지로서 커다란 위협일 수 있겠지요. 그치만 지능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다면 서양남성들이 수퍼지능을 대하는 자세가 어땠을지 곱씹어 생각해 볼 필요는 있어요. 플라토는 철학자란 것은 본디 타고나길, 사색하기보다는 인간을 아우르는 수완이 뛰어난 법이라 꾀어 왕으로 추대할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동양의 전통적인 사고는 권력의 마수에 사로잡히는 것이야말로 헛되며 그러한 경망을 멀리하고 매일의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말로 지성인이라고 했어요. 만약 이런 동양적 사고가 팽배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 모두 지능인이란 통치하여 마땅한 자라고 생각하기 보다 세속의 욕망을 떨치고 멀찌감치서 중용의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이며 또는 평화와 계몽을 장려하는 사람이 가장 영리한 이라고 사고한다면 말이에요. 그래도 여전히 우리보다 영리한 로봇을 두려워하게 될까요?? [주 : 라고 기사에서 말하고 있네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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