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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4/10 22:38:24 |
Name | P.GoN |
Subject | 어떤 술집에 대한 기억 |
#1. 산적 같지. 딱 이미지 그대로네. 수염난 바텐더 뒤로 붙어 있는 포스터가, 그 바텐더와 꼭 닮아서 웃음을 터뜨렸었어. 소환사의 협곡에서, 나의 유일한 라이벌이던 그 바텐더는 게임에서 보던 모습처럼 강인해 보였는데. 마지막에 입가심으로 시킨 데낄라 선라이즈를 휘휘 젓어버린거 빼고는, 참 좋은 인상이었지. #2. 너랑 같이 여길 오지 않았어서, 다행이야. 그 아이와 처음 데이트 했던 곳이 신촌이었으니까. 같이 오코노미야끼를 먹고, 독수리약국 뒤편의 까페까페 2층 테라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그 다음에 맥주를 한잔 하고 널 바래다 줬었는데.. 둘이 같이 신촌에 온게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때 내가 잘 아는 가게라며 너를 데리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친구 놈과 같이 칵테일을 마시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났었었지. 아마 한 겨울이나 봄이 오기 직전의 계절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언제나처럼 갓파더를 시켰을 거고, 그 친구는 러스티네일을 시켰었던가.. #3. 한 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때는 평범한 이름의 평범하지 않은 바텐더가 맞아 줬던것 같아. 그러고보니 기분이 조금 꿀꿀할 때였나, 작은 항아리 같은 모양의 잔에 담아준 불그스름하고 독한 칵테일이 기억이 났었는데, 아직도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4. 굉장히 오랜만에, 특별한 손님과 같이 갔을 때, 사장님이 그랬던게 기억이 나. 갑자기 훅 어른이 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왔다고 바에 처음 와 봤다는 그 아이가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괜히 허세도 한번 부려봤던 것 같아. 얼마나 웃겼을까? #5. 내가 한번 죽었던 것 같았던 그 날에, 호텔방에 덩그러니 남아있기가 무서워서 찾아갔을 때. 조금은 무심한 듯 내 얘기를 들어주던게 기억이 나네. 그때 거길 가지 않았으면 난 아마 어디선가 흑역사를 하나 더 만들었을 지도 모르니까. 그 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할지.. #6. 뜸하게 일년에 많아야 한두번 씩 찾아갔을 때마다 얼굴 보기 힘들어서 그 후로 조금 뜸해졌던것 같아. 시간이 엇갈렸던지 사건이 엇갈렸던지.. #7. 그렇게 취해서 간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기필코 가봐야 겠다며 술에 취한 몸뚱이를 끌고갔지. 바 안에서 내 늦은 새해 인사를 받는 바텐더는 몇년 전 모습 그대로네. 취해서 가게에 손님이 나 밖에 안 남을 때까지 수다를 떨다 집에 오니 뭔가 속이 후련했어. 고마워요, 내 나이든 친구님. ------------------------------------------------------------------------- 왠지 술 한잔 하고 싶은 기분인데 내일 일찍 출장이라 술은 안 되겠고해서 퇴근하고 주저리 주저리 일기 쓰듯이 늘어놔 봤네요. 잘 자요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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