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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5/09 18:10:26 |
Name | 기아트윈스 |
Subject | 논쟁글은 신중하게 |
논쟁을 포커로 비유하자면 논증과 팩트체크는 기술/손패의 영역이고, 자존심과 평판은 판돈배팅에 가까워요. 배팅을 안하고도 포커를 칠 수는 있지만 그건 인센티브가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서 잘 안하지요. 고릴라랑 캥거루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에 대해서 논쟁이 붙었다고 해봐요. 거기에 걸려있는 게 없는 사람, 즉 '판돈'이 없는 사람은 에라 아무나 이겨라 하고 거기 안끼어요. 다만 이 문제가 동물학 학회에서 제기된 거라면 동물학자로서의 자존심과 명예와 쟙과 페이와 커리어와 평판을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게 되지 않겠어요. 화려하고 정밀한 논증과 팩트제시가 이어지겠지요. 그런데 공개 커뮤니티에서는 본인이 원치 않았는데도 본인 판돈이 자동 배팅되는 상황이 생겨요. 예컨대 일진이 교실 한가운데서 '내가 짱이야 슈밥. 이의 있으면 덤비고 쫄리면 X지시든가'라고 외쳤다고 생각해보세요. 여기서 나서지 않으면 자신의 자존심과 평판은 자동으로 깎이는 거예요. 그러므로 원하지는 않았지만 교실 안의 모든 이들의 판돈은 강제로 인출되어서 싸움판에 걸려버린 셈이에요. 이렇게 강제로 소환된 이상 '소환에 불응한다'는 선택지는 없어요. 치기 싫으면 판돈 포기하고 다이(die)하는 수 밖에. 모두가 나서지 않고 다이해버리면 일진은 확고한 종주권/패권이라는 전리품을 판돈으로 챙겨갈 거고 나머지 학생들은 거기에 암묵적으로 종속되는 형태로 판돈을 헌납하게 될 거예요. 그러므로 이러한 광역소환 주제들, 예컨대 '정치'나 '종교' 같은 것들을 주제로 논쟁거리가 등판했을 때 누군가가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캥거루 vs 고릴라 논쟁 구경하듯 하하호호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 사람은 원치 않게 자기 돈이 자동으로 배팅되었지만 그냥 '다이'하고 나서지 않은 것 뿐이에요. 내 지지후보가, 내 지지정당이, 내 신앙이, 내 직업이, 내 삶의 의미가 공격당하는 걸 보면 상처를 받지 왜 안받겠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이 포커판에 본격 참전하자니 현실적으로 손패가 딸릴 수가 있어요. 쪽수가 부족하거나 무기가 부족하거나 시간이 없거나 기타 등등. 그러므로 내 감정의 얼마만큼이 배팅되었는지, 승산은 얼마나 있는지를 눈대중으로 셈해보고 그냥 속상함을 감수하고 다이(die) 하는 거지요. 그래서 정치글 같은 거, 사람들이 감정의 동요 없이 읽을 수 없는 주제로 글을 쓸 때는 원치 않게 소환되어 강제배팅당할 독자들을 배려하는 게 중요해요. 여기에는 기교가 필요한데, 제 경우는 글이라는 미궁으로 초대된 독자들에게 적당한 출구를 하나 이상 제시하려고 노력해요. '나는 비록 이쪽 출구로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이 원치 않는다면 미궁 곳곳에 비상구를 만들어놨으니 중간에 판돈 챙겨서 그곳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같은 느낌. 이와 반대로 좀 위험한 글은 (커뮤티니라는 맥락에서 위험한 글) 광역소환 뒤 출구를 하나만 파놓고 압박하는 글이지요. 제가 이런 글을 안썼다곤 못하겠는데 (...) 현재의 홍차넷 분위기상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그렇다고 또 판돈포커를 전혀 못치게 막아버리면 커뮤니티가 급격히 노잼화할 수 있어요 'ㅅ';; 프로야구가 일년 내내 시범경기만 한다고 생각해봐요. 그걸 누가 봐요. 야구판 멸망하겠지요. 그러니 광역소환형 말고 국지소환형 '작은' 주제가 자주 등판하고, 해당 주제에 관심 있는 소수 유저들이 그때그때 판돈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 포커판 밖의 유저들은 하하호호 웃으면서 팝콘 먹는 정도가 가장 바람직해보여요. 광역소환은... 아예 안 걸 수는 없으니 걸기는 걸되 조금 더 신중하게 하는 게 좋겠구요. 타임라인에서 관련 글이 십여개 정도 올라왔는데 어디다 댓글을 달아야할지 헷갈려서 티타임에 올려봅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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