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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5/19 00:57:33
Name   한아
Subject   이브 온라인 이야기 – 2


8.
지난 글에 다뤘던 ‘신뢰’에 이어, 이브 온라인의 두번째 매력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이것은 이브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장본인이며, 동시에 이브에 깊숙한 파고들기 요소를 심어주는 양날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브 내의 대부분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살펴본다면 게임 바깥에서 보시는 분들이
이 게임이 어떤 게임인지 이해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복잡한(=난해한) 컨텐츠’입니다.


[이브 온라인 생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T3 생산 개요... 인데 이중 절반은 저도 뭔소린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게임이 이브 온라인 같았다면, 제 취미는 아마 게임이 아니라 독서였을 겁니다.
그만큼 단순하게 ‘이브 온라인의 컨텐츠 설계는 훌륭하다.’ – 라는 일방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없을 정도로 단점이 크고 분명합니다.
초보자는 기본적으로 이 게임을 받아들이기 너무 어렵습니다.

왜 어려운지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살펴봐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와우로 대표되는 유행하는 MMO 장르의 헤비 게이머는 아니지만, 이런 류의 게임들을 라이트하게 즐겼던 시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MMO들이 더 익숙합니다.
잠깐의 튜토리얼이 지나가면, 퀘스트를 줄 NPC들이 잘 설계되어 있고,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서 전투, 생활, 활동 등의 컨텐츠를 자연스럽게 익혀 나가는 방식.
캐릭터의 역할 분담이 잘 – 그리고 명확히 - 되어있고, 파티를 이루어 가며 PvP건 PvE건 즐기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좋은 판타지 세계관.

이런 개념이 기존에 제가 갖고 있던 기본적인 MMO였고,
여러 MMO가 이것저것을 신선한 시도들을 많이 했지만 기본적인 틀 자체를 뒤엎어버린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브 온라인을 시작하게 되면 기존 MMO와는 너무 낯선 개념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러한 MMO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는 아니지만, 무언가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브 온라인이 와우가 출시되기 전에 출시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적게 받은 부분도 있을 겁니다.
물론 와우 전에 에버퀘스트라는 훌륭한 레이드, 어그로 시스템을 갖춘 MMO가 있었지만, 오히려 이브 온라인은 울온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퀘스트 중심과 파티 시스템이 강조되지 않은 이런 MMO는, 요즘 수명이 다해 찾아보기도 힘들뿐더러,
울온 세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제게는 빡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브 온라인의 게임 컨텐츠는 그 어디서도 구현해내지 못한 새로운 무언가는 아닙니다.
차라리 대세가 된 와우류 MMO 보다 더 고전적인 1세대 MMO를 닮은 모습이 눈에 많이 띄고,
그러한 장르가 거의 사장된 요즘, 그래서 더 신선해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9.
서론이 길어졌는데, 몇 가지 예로 그 속을 살펴보려 합니다.
어느 MMO든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조작이 있습니다.
WASD의 걷기, 적을 선택하기, 그리고 스킬 단축키를 활용한 공격. 이것을 기본으로 많은 직업군이 갈라지며 여러가지 역할이 나뉩니다.

이브 온라인은 일단 이동하는 것부터 너무 어려웠습니다.

캐릭터가 땅을 딛고 서있는게 아닙니다.
앞, 뒤, 왼쪽, 오른쪽의 2D 개념이 아닌 텅 빈 우주공간에 캐릭터를 대신할 함선이 둥둥 떠있습니다.
제가 이동을 하고 싶다면, 어디로 이동할 것이며, 그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x축 y축 뿐만이 아닌 z축의 움직임까지 고려해야 되니 땅을 딛고 서있는 기존 2D방식의 이동이 아닙니다.
그래도 우주 공간을 향해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는 방향이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현재 성계에 우주 공간에 떠있는 요소들의 정보를 테이블로 정리해놓은 오버뷰.
메인 화면을 안봐도 이것만 있으면 조작이 가능하고, 반대로 이게 없으면 아주 간단한 이동도 못한다.]


그래서 첫 튜토리얼부터 오버뷰라는 것을 사용하게 되고, 이것은 이브 온라인의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심이 되는 정보가 모여있는 패널입니다.
WASD처럼 정교하게 한걸음 한걸음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런 조작도 가능하긴 합니다.)
xyz축으로 구현된 공간에 필요한 지점을 미리 저장해두어, 내 함선이 그 방향으로 가게끔 만들 수 있습니다.





10.
물론 우주가 배경인 만큼 이런 단순한 부분은 다른 MMO와 단지 세계관의 차이, 조작 개념이 다름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할 이야기는 서두에 말씀드린 복잡한(난해한) 컨텐츠입니다.
정말 여러가지가 이런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지만 제가 지금 소개해드릴 부분은 전투와 함선 피팅, 그리고 스킬입니다.

이브 온라인 초보가 처음 밟는 단계는 간단한 공통 튜토리얼과 이후 이어지는 직업별 10연퀘입니다.
저는 이 10연퀘 도중에 해맸던 기억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제가 이브 온라인에서 구현된 비교적 작고 초보자들에게 가장 먼저 열리는 프리깃 급의 함선을 타고
NPC 프리깃을 상대하는 것이 저의 퀘스트 목표였습니다.
아직 초보 미션이었기 때문에 난이도는 굉장히 쉬운 상태였죠.
저는 처음부터 써오던 콜벳 급(루키쉽)의 함선을 프리깃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이 추천하는 함선 피팅을 참고하여 새 퀘스트에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콜벳으로도 쉽게 쉽게 터져 나가던 적 NPC의 함선이 더 좋은 프리깃 급을 갖추어 나갔는데에도 잡아내질 못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10초면 때려잡던 적 NPC가 3분여가 넘어가는 포격에도 꿋꿋이 탱킹을 하며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 함선은 적 NPC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지만,
역시 초보 난이도라 그런지 적 NPC도 저를 죽일 정도로 강력하진 못했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발포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죽지 않는 평화로운(?) 교전이 5분여간 계속 되었습니다.



[수많은 뉴비들을 죽인 뉴비용 미션의 마지막 보스 다간(별명은 뉴비킬러) - 한국 유저들 반응: "다간이 또..."]


처음에는 NPC를 잡는게 미션 목표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확인해도, 그 목표를 잡는건 확실했고, 다른 웹사이트 검색에도 적 함선은 그냥 평범한 몬스터 1에 불과했습니다.
이전에 더 낮은 급의 함선으로도 잘만 때려잡던 녀석을 왜 못 잡을까?
그렇게 8분여간 양측이 소득없는 무한 교전을 하고 있을 때, 제 앞에 반복적으로 잠시 띄워졌다 사라지는 컴뱃 로그 메시지들을 읽게 됩니다.
Your turret misses its target.
Your turret misses its target.
Your turret misses its target.

일단 제 DPS가 약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공격이 일제히 다 빗나간다.
기존의 MMO라면 적 민첩이 매우 높거나 제 민첩이 매우 낮아
회피율 vs 명중률 싸움에서 제가 진 것이었겠지만, 상대는 초보 미션용에 맞춰진 NPC.
그렇게 모든 공격이 빗나갈 정도로 민첩 3000같은 압도적인 스펙일 리가 없습니다.





11.
이브 온라인에는 크게 터렛, 미슬(Missles), 드론의 세 가지 무기가 있습니다.
물론 스마트 밤과 같은 다른 무기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큰 세 종류를 꼽자면 말이죠.
그 중 저는 터렛 무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 터렛 무기에는 데미지 뿐만 아니라 연사속도, 포탑의 선회력, 적중 사거리, 유효 사거리, 탄약 등 여러가지가 구현되어 있습니다.
이 터렛도 다시 나누어 보자면, 근거리 무기와 장거리 무기가 있습니다.
근거리 무기는 데미지가 높고 포탑 선회력이 매우 빠른 대신, 사정거리가 지나칠정도로 짧습니다.
장거리 무기는 사정거리가 굉장히 길어서 적을 카이팅하거나 적의 사거리 바깥에서 타격할 수 있지만, 데미지도 낮고, 포탑 선회력이 매우 낮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가지 낯선 용어랑 마주치게 되는데요,
‘포탑 선회력’이라는 개념이죠.
기존 MMO에서 그냥 적을 향해 원거리 무기를 사격하면 일단 가서 맞고, 명중률 vs 회피율 계산을 했던 것과 다르게,
이브의 터렛은 적 함선의 속도가 포탑 선회력보다 빠르면 포탑이 발사를 해도 맞추지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스타1의 미사일 터렛을 떠올려 봅니다.
이 귀신 같은 방어 건물은 자신의 사정거리에만 들어오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 사정거리 안의 모든 적을 100% 맞춥니다.(버그 빼고)
하지만 이브 함선에 장착된 포탑들은 그렇게 고개를 빨리 돌리지 못합니다.


[포탑 선회력의 개념을 설명해 놓은 이미지 - 위: 적정 선회력, 아래: 느린 선회력(빗나감)]






앞선 상황에서의 100% 확률로 적 NPC를 맞출 수 없는 일은, 제가 초장거리 무기를 끼고, 초 근접전을 벌인 탓에 있습니다.
새로운 프리깃을 쓰기 전에 초보용으로 받았던 콜벳은 이 근거리 교전에 적합하게 디자인되어 있었거든요.

결국 NPC와의 10분여간의 사투 끝에, 웹페이지 검색과 고수 파일럿들의 조언으로
저는 그 NPC와의 거리를 한참 벌린 후에 제 터렛을 맞출 수 있었고,
맞추기 시작한지 10초도 되지 않아 그 함선은 우주의 먼지가 되었습니다.





12.
그러니까 이런 식입니다.

지금이야 아주 기본적인 전투 개념이고, 내가 만든 함선이 어떤 스타일의 전투에 적합한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비싸고 좋은 장비를 갖추었다고 해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외부의 MMO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래서 내가 맞출 수 있는 최고의 만렙, 혹은 최고의 장비]가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이브에 등장하는 함선 크기를 비교해놓은 이미지]

프리깃은 초보 때 탈수 있는 첫 함급인 만큼 초보 함선으로 분류되기 쉽습니다.
함급은 콜벳 – 프리깃 – 디스트로이어 – 크루져 – 배틀크루저 – 배틀쉽 – 드레드넛 – 캐리어 - 타이탄의 순으로 올라가고,
처음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는건, ‘그러니까 이브는, 타이탄을 타는게 가장 고수고, 엔드 컨텐츠는 타이탄에서 즐길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터렛을 놓고 비교해보자면, 꽤 많이들 애용하는 배틀쉽 급의 함선은 터렛만으로 제 프리깃을 거의 잡을 수 없습니다.
이브의 함선은 크기가 커질수록 무거워지고, 속도가 느려집니다.
또한 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포를 장착하지만, 이 무기들은 매우 느립니다.
반면 제 프리깃은 딜량은 낮지만, 매우 가볍고 빠르죠.
배틀쉽의 무겁고 강력한 포로는 포탑 선회력이 너무 느려서 제 빠른 프리깃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굉장히 날랜 X-wing. 거함 거포로 이런 함선은 잡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함선은 DPS가 약해, 거함을 침몰시키기도 어렵다.]

스타워즈를 떠올려 볼까요.
밀레니엄 팔콘은 굉장히 빠르지만 전투 함선이 아니니 잠시 제쳐두고,
X윙의 전투 장면을 떠올려 보시면, 거대한 함선들 사이를 누비면서,
적의 사격은 회피하고, X윙의 레이저는 거대한 적의 함선 또는 구조물들을 피격합니다.

배틀쉽이 스킬 요구량도 많고 [프리깃이 할 수 없는 많은 양의 탱킹이 가능하고 여러가지 미션 수행 능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느리고, 육중하고, 피격범위도 넓습니다.
포탑으로 작은 프리깃을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대신 프리깃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만은 없으니, 대 프리깃용 소형 드론을 탑재하여 프리깃들을 상대합니다.
배틀쉽의 포탑으로 프리깃을 상대하는 것은, 극단적인 비교를 해보자면 [모기를 자주포로 잡는 것과 비슷]합니다.





13.
이것은 다른 MMO와 다른 전투 조작 혹은 전투 개념이기 때문에 낯설어서 어려울 순 있어도,
흥미를 가지고 숙지만 하게 되면, 주사위 굴림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는 다른 MMO들보단 어렵겠지만,
초보가 뛰어넘지 못할 수준의 장벽은 아닙니다.
진짜 장벽은 이 개념을 알게 되고, 내 함선을 피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전에 '유명한' 이브의 경제 시스템을 맛뵈기로 짚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함선은 타 MMO의 갑옷 아이템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영구적이지 않고, 파괴된다는 점입니다.
흔하게 퍼져있는 이브 온라인의 오해 중 하나는 마치 디아블로의 하드코어 모드처럼
이브에서 함선을 터뜨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식의 소문입니다.
저는 이것보단 리니지와 비교하고 싶습니다.
리니지에서 캐릭터가 죽게되면 일정확률로 아이템을 떨구게 됩니다.

이브에서 죽게 될 때는 함선은 파괴되지만, 그 안에 피팅 된 모듈들은 50% 확률로 드랍되거나, 아예 소멸됩니다.
다른 게임처럼 죽어도 내구도만 깎인다던지,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부활하지 않습니다.
죽게 되면 쓰던 장비는 잃게 되며, 빈 몸으로 부활합니다.

디아블로 하드코어처럼 죽으면 끝은 아닙니다.
하지만, 공들인 함선은 파괴되기 때문에 다시 그 함선을 맞출 돈이 없다면, 같은 수준의 함선을 재구매 하기 어렵습니다.
전에 탔었던 비싼 함선보다 작고 값싼 함선을 타야 될 수도 있죠.
만약, 와우에서 캐릭터가 죽음을 맞이하면, 입고있던 갑옷, 무기, 신발 등은 50%의 확률로 그 자리에 드랍되거나 소멸되고,
부활은 맨몸으로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이브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나 경제시스템에서는 말이죠.
아이템이 특정 캐릭터에 귀속된 게 아니라서 누구든 떨군 아이템을 집어먹을 수 있고, 이는 끊임없는 PvP를 유도합니다.
그리고 50%의 확률로 아예 소멸되기 때문에, 한번 얻으면 영원하게 유지되는 장비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파괴되고, 계속해서 우주먼지가 되어 사라집니다.
물론 그런 고급 장비들을 얻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든 그 가치에 해당하는 돈(ISK)만 있다면 다시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극악의 드랍률을 가진 반복적인 파밍을 할 필요 없이, 내가 경제력이 충분하다면,
지금 파괴된 최고급의 장비들을 1분 뒤에 다시 상점에서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이브의 경제를 굴립니다.
함선은 끊임없이 소모되는 소모품이고, 이브 유저들은 지속적인 소비를 합니다.
이브 내의 95%이상의 아이템 – 함선, 모듈, 탄약, 건물(구조물) 등은 유저가 직접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비 수요과 돈을 벌기 위한 생산 공급이 맞물리면서, 이브의 경제가 굴러갑니다.


[매달 CCP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하는 이브 온라인 경제 보고서 중 일부]

이브가 PvP 중심이고, PvP에 목을 매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PvP 유저들은 소비를 촉진하고 거대한 이브 경제를 굴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안전하게 절대 죽지 않으면서 PvE만 즐기는 유저들은 지속적인 공급을 가능하게 하며, 이는 이브 경제의 인플레를 초래합니다.
지금도 이브의 물가는 오르고 있지만, 소비 촉진이 없고, 무한 공급이 가능한 타 MMO의 인플레 속도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안정적입니다.
또한 몇몇 MMO의 경우 이 초인플레를 막지 못하거나 무한 공급으로 인한 빠른 컨텐츠 소모로 그 수명을 다한 것을 보면,
이러한 경제구조는 이브 온라인의 컨텐츠 소모 속도와 게임 수명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겠죠.





14.
다시 피팅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미 글이 너무 길어져 끊고 싶습니다만, 서두에 언급한 ‘복잡한(난해한) 컨텐츠’의 마무리는 본론은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터렛을 다시 이야기해보면, 이브에도 타 MMO 처럼 레벨별로 함선에 달 수 있는 터렛이 있습니다.
Tech I 터렛과 Tech II 터렛이 그것이지요.
하지만 Tech I과 Tech II 사이에 Meta Level 이라는 구분이 또 있습니다.
Tech I 기본 터렛은 Meta Level 1 이고, Tech II 터렛은 Meta Level 5에 속합니다.

이 메타 레벨 1과 5 사이에는 2, 3, 4의 각자 다른 세부적인 스펙을 가진 터렛들이 존재합니다.
캡(=타 게임에서의 마나)를 덜 먹는 터렛, 함선이 요구하는 CPU / Powergrid를 적게 먹는 터렛,
데미지가 좀 더 쎈 터렛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스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메타 레벨은 최대 17까지 있으며, 테크2(=메타5) 이후에 메타 레벨6 이상의 아이템은 고급 아이템으로 분류됩니다.
낮은 스킬요구치를 가지면서 테크2보다 좋은 스펙인 경우가 많거든요.

디아블로의 예를 들면 [렙제1 아이템이 만렙 때 낄 수 있는 아이템보다 성능이 더 좋은 경우]가 되겠죠.
아니, 그럼 무조건 전부다 그 템을 끼면 '스킬 올릴 필요도 없고' 좋은 거 아닙니까?


[요즘 핫한 킬보드(롤 OP.GG처럼 킬정보 검색 사이트).
Grand Total 100,000,000,000.00 ISK -> 이브 한달 결제 $15 = 인게임 머니 가치 1,000,000,000.00 ISK -> 현금가치 $1,500 가량이 우주 먼지로...]


여기서 이브의 독특한 경제 시스템이 끼어들게 됩니다.
효율성, 혹은 가성비의 측면에서죠.
저렇게 스킬요구도 낮은데 더 좋은 고급 터렛들은 기본 터렛보다 1000배, 10000배 이상 비쌉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런 비싼 아이템을 장착한채 우주를 돌아다니면, [아주 좋은 사냥감]으로 찍히겠죠.

결국 무조건 다 쓸어버릴 수 있는 우주 패왕급의 아이템을 둘둘 장착한 함선은 [좋은 함선이 아니게 됩니다.]
가성비를 생각하여 적당한 가격에 내가 원하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함선을 만드는 것이 좋은 함선 피팅이 됩니다.
저는 항상 이것을 초보들에게 설명해줄 때 조립 컴퓨터의 비유를 듭니다.





15.
인터넷 & 동영상을 볼 목적으로 GTX 1080이 달린 150만원대의 최고급 게이밍 컴퓨터를 맞추는건 다소 정신나간 짓으로 분류될 겁니다.
물론 인터넷 & 동영상을 볼 때는 아주 쌩쌩 잘 돌아가겠죠.
하지만 이브에선 누군가 그 컴퓨터를 뽀개고 1080을 떼어 달아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도둑질까지 감안했을 때, 인터넷 & 동영상을 볼 컴퓨터는 15~20만원선에 될 수 있으면
아주 값싼, 도둑맞아도 피해가 덜 한 그런 컴퓨터를 맞추게 되겠죠.
그리고 그렇게 싼 컴퓨터는 도둑들이 훔쳐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능의 한계가 있죠.
이런 컴퓨터로는 4K 영상을 본 다던가, 웬만한 게임 구동은 어려울 겁니다.

제가 함선 피팅을 컴퓨터 조립에 비유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하나의 터렛 모듈에는 최대 17가지의 스펙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터렛 모듈에 해당할 뿐,
함선에는 가속 모듈, 탱킹 모듈, 전자전(타 게임에서의 Crowd Control; CC기) 모듈 등 여러가지를 부착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종류도 각각 적게는 5종에서 많게는 15종 이상씩 됩니다.

터렛도 단순히 장거리 10종, 근거리 10종이 끝이 아닙니다.
사용하는 탄약에 따라, 에너지 터렛(레이저빔), 프로젝타일 터렛(재래식 총알, 포탄), 하이브리드 터렛(레이저+재래식 짬뽕) 세 종류로 나뉩니다.
탄약도 각각 터렛 종류에 따라 10종류로 나뉩니다.
이것은 단순히 터렛을 예로 든 것이며, 탱킹의 경우에도 아머 탱킹, 실드 탱킹으로 나뉘며, 이러한 모듈의 종류는 수백, 수천가지입니다.





16.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 그냥 던져진 뉴비가 있습니다.


[피팅 시뮬레이션. 뉴비 A: "이, 이게 뭡니...?"]

아쉽게도 2017년 현재까지는 피팅에 관한 개념을 잡을 수 있는 자세한 튜토리얼 같은 건 없습니다.
뉴비가 피팅 창을 열어보면 반기는 것은 이런 다양함을 뛰어넘어서는 복잡하고 난해한 수십종류의 모듈들입니다.
마치 초보자가 컴퓨터 조립을 할 때 만나는 수많은 종류의 부품들 – 메모리, 하드, CPU, GPU, 파워와
그것을 스펙 별로 생산하는 수많은 스펙의 제품들, 회사들을 봤을 때 멘붕이 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어느정도 하려면, 어떤 종류의 모듈이 있는지, 어떤 효과를 내는지, 기본 개념이라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어떤 목적으로 무슨 함선을 타고 싶은지라도 계획이 서야 하는데,
이제 막 시작한 초보자가 이브 온라인에 어떤 종류 컨텐츠들과 어떤 수준의 난이도가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들죠.

물론, 컴퓨터 조립도 각종 정보사이트에서 10만원대 / 20만원대 / 50만원대 / 100만원대 등 여러 추천 견적을 미리 작성해두어
초보자도 쉽게 조립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브에도 많은 선배 파일럿들이 이런 초보자용 함선 피팅을 공유하고 있으며, 직접 만든 피팅을 손 봐주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이제 시작한 뉴비들에게는 거의 재미있게 즐기면서 배우는 게임이 아닌,
내 함선 안 터지려면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되는 ‘공부’를 강요하는 모양새로 던져지고 있어,
너무 가혹한 것이 현실입니다.

롤에서 어떤 순서대로 아이템을 고르느냐, 혹은 스킬을 어떤 순서로 찍는지도 초보들에게는 만만찮은 일인데,
이브에서 위의 이야기는 단순히 함선 피팅에 관련된 게임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스킬을 어떤 효율로 찍으냐, 생산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등 이브의 모든 컨텐츠는
집요하게도 저런 세부 디테일과 효율을 따지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이것은 이브 뉴비들에게 거대한 정보 폭탄을 던져줍니다.

하나 하나 익혀나가면서 연습하면서 배우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막대한 양의 정보들을,
아무런 준비 단계 없이 알아서 받아 먹거라 하고 그냥 던져줘 버린다는 느낌이죠.
이것이 [이브 진입 장벽의 아주 커다란 부분이자, ‘어렵다’의 실체]입니다.





17.
이 때문에 많은 이브 유저들은 뉴비에게 우호적이자 동시에 공격적입니다.
이 어려움을 경험하고 어느정도 극복하여 살아남은 유저들이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신규 유저 유입에 방해가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질문하면 많은 부분, 굉장히 친절하게 알려주려고 하고, 뉴비 친화적인 커뮤니티가 굉장히 많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선배 파일럿들이 다 인정하는 부분이죠.
‘그거 어렵지? 나도 알아. 나한테도 어려웠어.’
영어가 어려운 국내 유저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영어권 초보 유저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영어권 초보 커뮤니티도 굉장히 많이 활성화 되어 있습니다.


https://wiki.eveuniversity.org/Turret_mechanics
[이브 초보들을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얼라이언스의 위키 중 터렛 작동 방식을 설명한 페이지]



[이름도 이브 유니버시티(이브대학교). 방대한 량의 위키를 정리하고 있으며, 각종 뉴비 지원 정책(무료 스킬, 함선, 전담 멘토 등)을 펼치고 있으며,
인게임에서 유저들을 모아, 강사(=베테랑 플레이어)들이 주기적인 강의도 하고 있다. 강의 스케쥴(링크): http://calendar.eveuniversity.org/
1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도 1,500여명의 유저들이 소속된 거대 꼽이자, CCP에서 유니위키를 공식 가이드로 인정했다.]



하지만 공격적이기도 합니다.
난 아무나 못하는 겜을 할 줄 알아, 라는 기묘한 자부심과 함께,
공들여 가르치던 뉴비가 결국 이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게임을 접을 때 오는 허탈감 때문에,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게 좋다.’라는 조언이나,
‘그렇게 할꺼면 가서 와우나 해.’ 같은 발언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난해하고 복잡한 컨텐츠들은 아주 깊은 파고들기 요소를 플레이어에게 던져줍니다.
컴퓨터 견적을 잘 내는 것도 실력인 것처럼 함선 피팅을 잘하는 것도 하나의 게임 능력이 되고,
또한 이런 것을 공유할 수도 있기 때문에 커뮤니티나 타인들에게 자랑을 할 수 도 있겠죠.


[검색에 걸리는 수많은 피팅 가이드들]

함선 피팅을 잘 한다고 전투를 잘하는 건 아닙니다.
전투를 잘 할 수 있지만, 정말 기괴한 함선을 타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함선 피팅 자체가 하나의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되어, 거대 꼽, 혹은 얼라이언스에는 각자만의 함선 독트린이 존재하며,
이를 연구하는 부서나 맴버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이전 글의 설명했던 FC, Fleet Commander들은 이런 정보들에 익숙하고 경험이 있어야,
자신의 함대를 어떤 함선으로 꾸릴지, 약점이 어디인지,
상대는 어떤 피팅으로 구성된 함대를 끌고 나타나는지를 읽을 수 있어야 전투, 혹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컨텐츠의 구성은 유저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선택지를 던져주며,
유저들은 오늘도 끊임없는 선택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컨텐츠들이 여러가지로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안좋은 선택지만 잔뜩 모아 놓은 함선이 나올 수도 있고,
유행따라 함선이 바뀌기도 하고, 패치에 따라 사장되는 함선도, 다시 빛을 보는 함선도 나옵니다.
함선 종류만도 300종이 넘어가고, 그에 따른 모듈들은 수천가지에,
각자 필요로 하는 목적과 구성이 다르니, 함선 피팅만으로도 끊임없는 즐길거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초보가 자신에게 던져지는 무자비하고 무책임한 정보 폭탄을 극복해 냈을 때,
이브 유저들이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이브의 컨텐츠 설계 방식입니다.

너무 길어졌군요.
다음 글에선 이브에서 무엇을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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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를 듣고서는 꼭 해보고 싶었지만 엄두를 못냈던 게임인데, 이렇게라도 친근하게 접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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