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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08/25 06:26:28 |
Name | 호라타래 |
Subject | 10년전 4개월 간의 한국 유랑기 #3 |
광주에 도착한 처음 며칠 간은 친구네 집에서 지냈다. 도착한 날은 피시방에서 밤을 지샜다.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아침에 광주 북구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거지 꼴인 나를 보고 친구는 웃었다. 친구의 집에서 목욕을 하자마자 쓰러져서 잠들었다. 당시 나에게서는 냄새가 많이 났다고 했다. 몇 년 후에야 알려준 사실이다. 이 친구는 게임을 통해서 알게 된 친구이다. 나는 동네, 학교, 동아리 등 사회 내 존재하는 여러 집단들을 통해 관계를 맺은 친구들 뿐만 아니라, 고 3 이후 게임을 통해서 알게 된 몇몇 친구들 중에서도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가 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이 친구의 어머님도 마찬가지였다. 첫 날은 쓰러져 자는지라 몰랐다. 둘이 광주를 구경하고 돌아온 둘째 날 아침, 잠결에 내 신분을 의심하는 친구 어머니의 걱정을 들을 수 있었다. 꽤나 오래 있었으니 민폐였다. 어찌되었건 내 삶의 기반을 내 손으로 세워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광주에서 하고자 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전남대 로비에서 자는 것은 많이 추웠다. 추위로 오들오들 떨다가 신문지를 끌어모아서 라이터로 불을 지피는 정신나간 짓을 하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은 제대로 붙지 않았다. 예전처럼 밖에서는 못 자겠다 싶었다. 학교 근처에서 저렴한 사우나를 찾았다. 3000원이었는지, 3500원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영업 시간이 새벽 2시 정도까지였던 것은 기억에 난다. 저녁에 사우나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새벽에 나와 피시방에 들어갔다. 광주 여기저기에 있는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에 지원서를 넣었다. 물론 될리는 없었다. 자소서를 거짓말로 작성했다면 모를까, 요령 없던 당시는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곧이 곧대로 적어냈으니 말이다. 어떤 수를 써야할까 고민하며 전남대 근처를 소요하던 중 벽에 붙여진 팜플렛이 눈에 들어왔다. 인력소개소였다. 인력소개소를 나가서 일을 한다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있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또다른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고등학교 동문회장 선배님의 영향이다. 사회 혹은 노동시장의 바닥을 맨몸으로 헤쳐나가는 것을 감수할 마음만 있으면, 돈을 가지고 사람을 휘두르려는 수작을 견뎌낼 수 있으리라고 강조하고는 했다. 그러면서 노하우도 몇 개 알려주셨다. '어차피 선착순이 중요하니 최대한 일찍 나가라', '처음 나가면 며칠은 무조건 허탕이다', '일을 못나갈 것 같다고 실망하지 말고 끈덕지게 붙어있는 모습을 소장에게 보여라' 등등이었다. 그 말처럼 처음 며칠 간은 허탕이었다. 오전 6시까지 나가서 9시까지 앉아 있어도 일이 없었다. 다음 날은 5시 반에 도착해서 9시까지 기다렸다. 사흘 째부터는 문을 열기 전인 5시부터 나가있었다. 그 때부터 '시다'로 일을 따라다닐 수 있었다. 그마저도 다른 아저씨들은 다 일을 나가고 나서 뒤늦게 땜빵으로 나간 것이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평소에 일을 나오던 전남대 '얼라'들이 시험 기간이라 다들 공부하고 있기에 내가 끼어들 기회가 있던 것이었다. 한 번 일을 나가니 다음 날부터는 일을 따라나갈 수 있었다. 새벽 5시에서 반 사이에 소개소로 가서, 아침 8시부터 일을 시작하고, 5시 반 전후로 일을 끝내고 나면 일급 6만원이었다. 그 중 인력소개소에 내주는 10%를 제하고 나면 54,000원이었다. 초창기에는 매번 다른 직종에 시다로 따라나섰다. 그 중 기억나는 경험이 두 개가 있다. 첫째는, 순천 고속버스터미널 2층 리모델링 공사에 샤시 기술자를 따라 나섰던 기억이다. 1층에 있는 공구함에서 2층에 있는 기술자에게 도구를 전달해주는 일이었다. 사투리와 처음 듣는 용어가 겹쳐서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여러번 되물어도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샤시 기술자에게 욕을 엄청나게 먹었었다. 평소에 일 나오던 광주 '얼라'들은 아마도 바로바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 아저씨도 나만큼이나 답답했을 터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너가 오늘 일을 못해서 마무리를 못 지었으니, 일급 중 반만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뭐 어쩌겠는가. 기술자는 한참동안 자신도 너만한 나이의 딸이 있으며, 여행하느라 고생이 많고, 오늘 화내서 미안하다 등등 계속해서 말을 했다. 나름대로 타당한 사유는 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다만, 혓바닥이 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건축 공사장에서 삽질을 했던 기억이다. 문자 그대로 삽질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아저씨와 같이 전기 기술자를 따라갔다. 전기 기술자는 일을 못나가서 처량하게 앉아있는 두 명이 불쌍하다며 우리를 데리고 갔다. 둘이서 하루종일 모래를 펐다. 아저씨는 자신이 조선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라고 했다.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다만 일하는 폼새가 나처럼 어설프기는 했다. 젊은 공사 감독은 왜 이렇게 일이 느리냐고 투덜거렸다. 전기 기술자는 공사 감독이 가고 나서 니미 씨펄을 반복하며 감독을 욕했다. 해가 저물어 일이 끝났다. 감독이 다시 돌아와 왜 일이 느렸는지 재차 물었다. 기술자는 나와 아저씨를 탓하면서 욕했다. 이 새끼들이 꾀부리고 설렁설렁 일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저씨는 기술자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비위를 맞추는 그 언어들에는 나에 대한 비난과 책임 전가도 은근히 섞여있었다. 정산을 위해 소개소 근처에 내렸다. 아저씨는 나를 부르더니, 자신이 오늘 일을 잘 못했던 것을 소개소에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실소가 절로 나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의 악다구니였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허나, 당시에는 화가 나고, 어이없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인간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가졌다. 이런 모습들을 마음에 새기고자 하는 것도 여행의 목적 중 하나였다. 거대한 악이 아닌 사소한 악들.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부딪칠 모습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며칠 후 차선공사에서 시다로 일하게 되면서 그런 생활은 변하게 된다. 시내에 있는 한 주차장에 주차 기호를 긋는 일을 따라갔다. 나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은 몇 명의 형들도 소개소에서 함께 따라갔다. 여행이라는 말에 그들은 신기해하며 저녁 때 잘데 없으면 자기네 자취방에 놀러오라고 그랬다. 그리고서는 일을 하던 중간에 도망갔다. 담배를 물고 말없이 기계를 굴리는 30대 중반의 형과 남은 일을 마저 끝냈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려는데 문득 오늘은 어디서 자냐고 물었다. 아까 만났던 사람들의 자취방에 가보려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형은 그 사람들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이런 작은 일을 하다 말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 믿을 만한 인간일 가능성은 낮아보이니 가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 형과는 1주일 후 다시 만나게 된다. 다음 날, 소개소에 나갔더니 차선공사 쪽에서 시다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어제 거기인가? 하고 있는데, 소장이 내가 어제 나가봤다며 얘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다른 회사였다. 어제 어깨너머로 봐뒀던 것이 있어서 눈치껏 일을 따라갈 수 있었다. 어제 같이 일을 했던 형에 대해 말을 하니 안다는 눈치였다. 사장은 그럭저럭 내가 쓸만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5일 정도 출장 나가서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소개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일을 하면 수수료를 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도 시켜준다니 쾌재를 불렀다. 그날 밤 잠은 회사에서 잤다. 아침에 회사 아저씨들을 도와 장비를 챙겼다. 충청도로 이동했는데, 정확한 위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속도로 건설 현장이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당시 같이 일을 나갔던 사람은 나까지 총 여덞이었다. 팀은 둘로 나누어 운영했다.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나름 또렷하게 기억한다. 백묵을 묻힌 두꺼운 줄을 바닥에 두고 튕겼다. 하얗게 찍힌 일찍선 위에 페인트를 묻힌 붓을 들고 일정한 간격으로 찍었다. 그 후 아저씨들이 기계를 통해 선을 그으면 밤에 반짝이라고 작은 구슬 알갱이들을 뿌렸다. 기계의 속도를 따라가야 했기에 뛰어다니기가 일쑤였다. 뛰어다니다가 페인트라도 흘리면 쌍욕을 들었다. 다른 것에는 대부분 관대했으나, 재료에 있어서만큼은 모두가 예민했다. 차선이 다 그어지고 나면 지나가는 차들이 페인트를 지우지 않도록 라바콘을 내려놓았다. 시간은 금새 흘렀다. 저녁을 먹고 여관에 들어가면 금새 잠이 들었다. 아저씨들은 다방에서 커피를 주문하고서는,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나를 놀렸다. 나는 눈앞에서 이상한 광경이라도 펼쳐지면 어쩌나 하면서 난감해했다. 다행히 '오봉'들과 아저씨들 사이에서는 질펀한 농담이 오갈 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름 그 안에서도 거친 사람도 있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인력소개소에서 보던 사람들보다는 덜했다. 그렇게 5일이 지나 광주로 돌아왔다. 5일 간 일한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보니 기분이 흐뭇했다. 광주에는 같은 게임 모임에 있는 형들이 꽤나 있었다. 주말에는 그들을 찾아보거나, 처음 광주에 도착했을 때 만난 친구와 놀고는 했다. 여행 이전부터 나는 워크래프트라는 그 게임에서 작은 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름 모임에 대한 애정은 컸다. 여행 중에도 꼬박꼬박 필요한 일은 처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모임 형들을 찾아다닌 이유는 내가 마스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모임 내에서는 유랑을 갔다는 녀석이 어찌 일은 다 하면서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인식도 있었다. 그건 감탄이라기 보다는 약간은 조롱에 가까운 뉘앙스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 작은 모임 내에서도 인간 관계는 복잡했다. 내 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회원들도 꽤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만 하면 되겠거니 생각하고는 했다. 어차피 운영진 위치에 있으면 욕을 먹을 수 밖에 없으니까. 몇 주간 일에서 돈을 꽤 벌었으니 사치를 부려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찜질방에서 잠을 잤다. 전남대 남쪽에서 저렴한 찜질방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뭘 그렇게 아득바득 아꼈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당시 인식 속에는 여관이 4만원, 5만원 하는 공간으로만 박혀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난다만 찜질방에서 만났던 한 아저씨는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우주인의 후손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였다. 교과서 역사는 대규모로 조작되었다고 힘을 주어 역설했다. 딱히 할 일도 없던지라, 그리고 당시에는 그런 성격이었기에 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나름 반론도 해가면서 말이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지리에는 무척 밝은 분이었다. 역사에 대한 내 반론을 들으면서 아저씨는 질색을 하더니, 너는 배움이 짧아서 나의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이라 끊었다. 그렇게 잠을 자는데 이불이 없어서 추워하자 아저씨는 하나 있는 이불을 나에게 덮어주었다. 그 뒤로 다시 본 적은 없었다. 그 다음 주에는 다시 A 형과 일을 했다.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은 지난 주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이 A 형이 일하는 회사에 있다가 따로 독립해서 나간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편의상 지난 주에 일했던 회사를 ㄴ A 형이 속한 회사를 ㄱ이라 부르도록 하자. ㄱ 회사는 광주 내에서 상당한 역사를 지닌 회사라고 했다. 그러나 사장이 병들어 누운 이후 사모가 전권을 쥐게 되었고, 운영 방침의 차이로 반발해서 나간 사람들이 ㄴ 회사를 차렸다는 것이었다. 일이 끝난 후 A 형은 사모에게 나를 데리고 갔다. 실질적인 사장이라 부를 수 있는 사모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면서 혀를 찼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날부터 나는 ㄱ 회사에서 잠을 잤다. 사모는 아예 고정으로 여기서 일을 하라고 했다.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고정으로 함께 일하면서 해남-진도 등지를 오갈 인력을 필요로 했다. 사모의 의도는 인력소개소에 떼이는 금액을 제하는 것보다는 많이, 그러나 6만원보다는 적게 돈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소파에 누워서 잠을 자는 그 느낌이 좋았다. 멀리 출장을 나간다는 것은 환영이었다. ㄴ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4명이었다. 앞서 설명했던 A 형.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전문가였던 B 과장님. 사장 부부의 아들인 C 형, 그리고 나와 비슷하게 고정 알바생으로 일을 하고 있던 D 형이었다. 해남에 있는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일은 진도대교부터 황산면으로 이어지는 도로 구간의 작업이었다. 모든 구간을 다 작업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업해야 하는 양은 상당했다. 그새 요령이 많이 붙어서 일은 능숙해졌다. C 형은 나를 많이 귀애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가족의 일을 종종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걸어 내려와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안쓰러워 하고는 했다.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를 묶어보도록 한 후, 여자 애라고 해도 믿겠다고 웃고는 했다. B 과장님은 40대 후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30대 중반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아내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다. 가끔 회식을 할 때면 5.18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하고는 했다. 그 당시에는 중학생이셨을까. D 형은 자상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좀 더 일을 많이 하면서 나를 쉬게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는 했다. A 형은 한창 신혼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면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고는 했다. 그렇게 다섯이서 작업한 길을 몇 년 뒤 군대에서 차를 타고 지나게 되지만,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다시 해남을 오게 될지는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언제나 다섯이서 함께 일을 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광주에 일이 생기면 1~2명씩 다른 작업을 하러 올라가고는 했다. 해남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로 주말에 광주 올라오면 C 형의 집에서 잤다. C 형은 자신의 삶에 회의를 많이 느끼고 있었다. 나에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면 작아지는 어깨를 볼 수 있었다. ㄴ 회사에서 일을 한지 2주차 주말쯤이었다. 하루 정도 일찍 올라와서 목요일 저녁부터 쉬고 있었다. 같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C 형의 친구가, 사흘 정도 C 형과 둘이서 광주 시내에서 들어온 작은 일을 한다고 했다. 별명이 해골이라는 그 형은 밤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인하대 올라가면 이쁜 동생들 소개시켜주나? 아니면 누나들 소개시켜주나?". 지금이라면 이죽거리면서 그러겠노라 대답했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어쩔 줄 몰라서 쩔쩔매기만 했다. 그런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지쳐서 잠들기 전까지 해골 형은 장난을 쳤다. 사흘째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 밤은 편히 잘 수 있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해골 형이 갑자기 내 손을 붙잡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는 꼭 행복하라고,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한참을 멍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만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2주차 중반부터는 A 형과 나, D 형 셋이서 해남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매주 팀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분위기는 달랐다. B 과장님이 팀장일 때는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술을 한 잔 하고 들어가서 자는 식이었다. A 형이 팀장일 때는 식사를 마친 후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는 일정이었다. 그것보다도 더 큰 차이가 있었다. A 형은 사모의 운영방침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식사비와 새참비를 지나치게 아낀다는 것이었다. A 형은 꾀를 냈다. 나에게 돈을 빌려 필요한 추가 금액을 사용한 후, 사모에게 청구하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나를 인질로 삼은 셈이었다. 현실적인 계산을 하면서도, 사모는 내 처지를 동정하고 있는 차였다. A 형은 그 점을 이용했다. 자기 선에서 돈 나가는 것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속셈은 눈에 뻔했다. 내가 손해볼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허나 거부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D 형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나를 위로했다. A 형은 내가 자신을 욕하지 않는지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람은 항상 반성하며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사람이 보이는 질박함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즈음에 주말에 서울에 한 번 올라갔다 내려온 적이 있었다. 게임 모임 내 오프라인 모임을 성사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해야 할 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해야한다는 마음만이 강했었다. 정확하게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할 일이 있어서 들렸다 내려간다는 말에, 부모님은 역시 너란 녀석은 참 특이하다며 혀를 끌끌 찼다. 4주차에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모두가 해남으로 내려왔다. B 과장님이 팀장을 다시 맡으면서 A 형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모두가 몇 주간 있었던 일을 암암리에 공유한 것인지, 식사를 하고 나서도 A 형의 주변에서 담배를 피거나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A 형에 대한 실망이 컸었다. 그렇지만 추운 날 귀가 빨갛다며 자신이 쓰던 귀도리를 씌워주던 일이나, 처음 만났을 때 함부로 사람들을 따라다니지 말라고 조언해주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역시 어쩔 수 없이 나는 호구새끼인 것 같았다. A 형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렇게 한 달 간의 해남 작업도 끝을 맺었다. 광주에서 한 달 반에 걸친 시간을 보내면서 모은 돈은 100만원이 넘었다. 이 정도면 겨울을 나서기에는 넉넉했다. 사진을 찍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 시내에서 똑딱이 디카를 샀다. 다음 목표는 땅끝까지 가는 것이었다. 중간에 할머니가 계시는 신안을 들려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가 계신 곳을 찾아뵈어야 겠다는 생각은 광주에 도착할 때만 하더라도 없었었다. 한창 일을 하다가 어떤 의문이 들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걸어내려와서, 인력소개소를 다니다가, 차선 공사에 속해서 일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이 왜 나는 하나도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일까. 새로운 구간 작업을 위해 빗자루로 하루종일 도로를 닦아내던 날이었기에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나는 왜 지금까지의 여정이 즐겁고 흥미롭기만 한 걸까. 바람이 강하게 불어 낙엽이 위로 치솟았다. 그 모습을 보며 삼라만상이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불가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나는 왜 나일까. 그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낯선 도시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순간에 뇌리를 사로잡은 것은 결국 내 과거의 삶 혹은 가족 등과 나를 분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유복한 집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더욱 더, 내 부모님은 내가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을 억지로 막은 적은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걸어서 유랑하겠다는 이 계획을 막지 않은 것부터가 하나의 사례였다. 그리고 그만큼 나를 사랑해주셨다. 좌충우돌하고 좌절하고, 슬퍼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그런 경험과 감정들이 쌓여 내가 되었다. 그 때도, 그리고 돌이켜보는 지금도 서투르고 이상하지만 나라는 인간의 뿌리에는 '나는 더 좋은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혹은 되겠다'는 일종의 확신과 오기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 감정들은 어디서 왔던 것일까. "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가정해 볼게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고, 실패만 한다고 느끼며, 주변의 누구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아요. 그래도 그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글쎄. 나는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무언가는 존재해야 해. 꼭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 아니라도 되기는 해. 그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던 경험 혹은 자신을 사랑할만한 근거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문회장 선배님은 그렇게 답했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경우에, 뿌리를 차지하고 있는 감정들의 기저에 내가 떠나오고자 했었던 부모의 영향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해보였다. 그렇다면 우리 부모님은 어떤 과정을 걸쳐 지금의 당신들이 되신걸까? 나에게서, 내 부모로, 그 부모의 부모님들로 이어지는 연쇄의 고리를 상상했다. 모든 궤적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몇 가지는 확인할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신안에 가보고자 했다. 광주를 떠나기 전 인력소개소 소장에게 전화가 왔다. 차선 공사에서 일을 하면서 벌었던 돈 중 일부를 달라는 전화였다. 처음 차선공사에 연결되어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 인력소개소를 통해서였으니, 10% 전체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정말 그런가? 생각해보니 글쎄올시다였다. 그래서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날씨가 좋아서 걷기 참 좋은 날이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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