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11/04 03:27:54
Name   우분투
Subject   외국인 선생님과의 이야기.
제가 초등 고학년일 무렵 학교마다 영어 원어민 선생님이 한 분씩 들어오셨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말하는 것을 배운 편이다 보니 전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죠. 저희 학년에는 저와 비슷한 성향의 친구가 몇몇 있어서 쉬는 시간, 점심 시간마다 찾아가 다같이 수다며 보드게임이며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저희를 학생이 아니라 꼬마 친구 대하듯 해주셨고, 담당하시는 한국인 선생님도 호의적이셔서 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씩은 선생님이랑 선생님 와이프 되시는 분이랑 다같이 저녁도 먹고 어떤 어학원도 제공해주지 못할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다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진학했죠. 중학교는 가까운 곳이어서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찾아가 수다 떠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적적해 보이셨어요. 너희 졸업 이후로는 이야기하러 오는 학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좋아하고 잘생기고 스쿠터 타고 다니는 멋쟁이 미국형이었는데 직장에서 마땅한 말상대가 없으니 외로우셨던 거죠. 앞서 이야기한 담당 한국인 선생님도 타 학교로 전근가신 상태였구요.

중3 때쯤 공립 초등학교에서 더 이상 원어민 선생님을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지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한 모양이었어요. 선생님도 자기는 학기말까지만 근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더 자주 찾아갔죠. 어느 날은 당시 사춘기 절정이던 제가 선생님께 우리나라의 입시 제도가 어떠하고, 그것의 문제는 무엇이고 이런 글로벌 시대에 어쩌고 떠들고 있으니 절 지긋이 보시다 한 마디 해주셨습니다.

“...You are growing as a smart young man."

그 말을 하실 때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 감사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초4 때부터 중3 때까지 보셨습니다. 처음 만날 때는 코찔찔이였던 아이가 사춘기를 맞아서 키가 크고 목소리가 변하고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하는 과정을 지켜보신 거죠. 떠나실 때가 되니 그간 저의 성장이 새삼스레 실감나시는 듯했습니다. 나의 한국생활은 너가 있으니 충분히 의미 있었다는 느낌. 저는 유독 선생님께 사랑받는 편이라 이후로도 많은 선생님이 절 예뻐해 주셨지만 그런 애정을 받은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얼마 후 선생님 부부는 파라과이로 떠나셨습니다. 본래 미술 전공이라 그곳에서 미술을 가르치기로 하셨다더군요. 최근에는 다시 미국에 계십니다. 긴 연락은 가끔씩 이메일로 하고, 페이스북 친구이기도 해서 댓글도 달고 서로의 근황을 알고 지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자기랑 와이프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변함이 없으신 듯하고, 지난 미국 대선 때는 민주당원으로서(?) 열심히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셨습니다. 저는 저대로 공부하기 싫은 야자시간이면 영작해서 이메일을 보내고 대입에 성공했다고 자랑도 했습니다. 관계는 계속해서 갱신될 예정입니다.

저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관찰자로서 성장을 기억에 담으시며 증거가 되어주시죠. 동시에 부모님은 여러 조언과 함께 나침반이 되어주시지만, 아무래도 성장기의 부모자식 사이에는 풀리지 않는 문제도 종종 생깁니다. 관찰하며 증거가 되어줄 또다른 어른이자, 어른으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낮은 시각에서 함께 고민해준 친구가 저의 사춘기와 함께 했음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9
  • 두 유 노 찬호팍?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962 도서/문학도서: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 4 우연한봄 23/06/07 2251 0
13917 기타미술 숙제로 귀신을 그려와라 8 우연한봄 23/05/26 2288 0
13863 기타민감 vs 예민 7 우연한봄 23/05/16 4370 1
13862 일상/생각선거때 집토끼, 산토끼 표현 15 우연한봄 23/05/16 2253 0
13847 기타형사에게 걸려온 보이스 피싱 우연한봄 23/05/13 1888 0
13832 일상/생각진통제 종류 간단 구분 4 우연한봄 23/05/09 1995 3
13776 영화오스만 제국의 꿈 2 감상 우연한봄 23/04/22 2292 0
13761 일상/생각부상중에 겪어본 이모저모 6 우연한봄 23/04/17 1742 10
13957 기타가시화 되는 AI 저작권 1 우연한봄 23/06/06 2150 0
13948 기타심심해서 적어보는 연표 우연한봄 23/06/04 1640 0
13940 일상/생각신문고로 민원 하나 넣어봤습니다 4 우연한봄 23/06/03 2180 0
13937 일상/생각셀프 세차장 가격들이 쭉쭉 27 우연한봄 23/06/02 2532 0
13928 일상/생각금일 아침의 여파 우연한봄 23/05/31 1729 1
13958 기타재한 외국인들이 보는 장단점 4 우연한봄 23/06/06 2381 0
8552 오프모임(마감)<굴파티> 6인 팟으로 한 분만 더! 30 우분투 18/11/21 4781 6
8540 오프모임(마감)11월 23일 금요일, 신촌 바틸트 <굴파티> 100 우분투 18/11/18 6254 11
8235 일상/생각냉동실의 개미 4 우분투 18/09/16 4957 15
7614 일상/생각특별하지 않은 6 우분투 18/06/02 4549 24
5795 일상/생각외고에 관한 이야기들. 43 우분투 17/06/15 4817 6
4893 일상/생각음철 올리니까 좀 깨네여 21 우분투 17/02/16 3635 1
6524 일상/생각외국인 선생님과의 이야기. 2 우분투 17/11/04 3608 9
14274 일상/생각가정파탄... 숨이 막히네요 22 우리학년 23/11/14 3025 0
11303 일상/생각열아홉, 그리고 스물셋 14 우리온 21/01/01 3999 37
9010 오프모임끝) 쭈꾸미 같이 드실 사람! 82 우리온 19/03/28 5558 11
6299 일상/생각언론, 섹스토스, 행복 22 우리아버 17/09/17 5270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