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11/06 15:17:00
Name   프렉
Subject   화장실에 갇혔던 이야기.
5년 전의 일이다.

나는 첫 직장을 정리하고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접에서 일이 꼬였다. 면접관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스킬을 사용해서 나를 흔들었다.
가족들에겐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집을 나섰는데.. 실망이 컸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한 달 정도 놀면서 다른 직장을 구했다. 영업직이었다.
입사할 때는 가을이었는데 내가 남쪽 출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금새 추워지면서 겨울이 찾아왔다.

하루 일과는 간단했다. 출근해서 장부 정리하고 CS좀 받고-사실 이게 주 업무였다-담당구역 돌면서 점포관리하고.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루틴이지만 영업직의 절반은 사실상의 발품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체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그래서 퇴근 후 내 방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샤워였다. 뜨거운 물 샤워.
주인 아줌마가 호언장담했던 것 처럼 새 집에 새 보일러를 자랑했던 나의 월세방은 온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나왔다.

노동으로 흘린 땀에 찌든 몸에 뜨거운 물을 끼얹고 가만히 서있는 그 10초가 영원처럼 느껴졌었다.
그렇게 새 보일러의 온수를 음미하면서 천천히 머리도 감고, 샤워타올에 거품도 좀 내서 몸도 씻고.. 배고픔을 인지하기 전까진 제일 좋은 시간이다.

그렇게 다 씻고 문고리를 당겼는데... 안 열린다.





혹시나 싶어 다시 당겨봐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계속 당겨도 보고 문고리를 양 손으로 잡은채로 문을 살짝 들여올려도 봤지만 안 열린다.
바닥에 고여있던 물들이 꺼어억 소리를 내면서 하수도 밑으로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 멘탈도 시궁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로 화장실에 갇힌건가??? 샤워하다가? 왜? 아니 문이 왜 안 열리지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소리치면 밖에 들리나? 창문도 없는데? 이런 시팔?!




씩씩대면서 문을 부술듯이 당기고 때리고 했던 건 그 무렵이었다.
이승탈출 넘버원에선 이럴 때 침착하고 상황을 살피라며 자막으로 나가지만 내가 당사자가 되니 침착이고 나발이고 본능이 이성을 줘패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문고리랑 씨름을 하고나서 진짜로 안 열린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는 정말 별 생각이 다들었다.
이렇게 되면 굶어죽는 건가, 나체로 발견되나? 화장실에 뼈만 남은채로 죽는건가. 이렇게 죽는건가 진짜로..................

알몸 상태에서 가만히 있으려니 몸이 식었다. 물을 틀어보니 아직은 온수가 나온다. 온수를 틀어서 다시 몸에 뿌렸다.
추위가 가시긴 했는데 수증기가 올라와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정신력이 바닥나니까 몸에 힘이 빠졌다.

좁은 화장실이라 바닥에 엉덩이 깔고 앉으니 바로 옆에 변기가 보였다. 어제 청소해서 그런지 변기가 참 깨끗했다.


잠깐 변기?




변기에서 이어진 자유연상법이 휴지걸이에 다다르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집 휴지걸이는 공중화장실의 단단하고 굵은 철제가 아니라 인테리어용 얄쌍한 물건이었다.

사람이 위급 상황에 처하면 알 수 없는 힘이 나온다는건 사실이었다. 힘을 주고 휴지걸이를 당기니까 바로 뽑을 수 있었다.
휴지걸이의 커버가 단단한 스테인레스라는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걸쇠 쪽에 커버를 밀어넣으면서 문고리를 다시 당겼다.

그렇게 영원같은 시간이 지나서 뭔가 걸리는 소리가 나더니 화장실 문이 열렸다.

아...........



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751 도서/문학선귤당 선비님 3 aqua 17/12/10 4015 7
    6749 일상/생각내가 싫어할 권리가 있었을까... 25 tannenbaum 17/12/10 4157 7
    6706 도서/문학모리 요시타카, <스트리트의 사상> 서평 3 선비 17/12/04 4758 7
    6689 일상/생각바나나빵 10 SpicyPeach 17/12/01 3984 7
    6666 육아/가정짧은 유치원 이야기 13 CONTAXS2 17/11/28 4636 7
    8499 음악대머리의 나라 10 바나나코우 18/11/10 3974 7
    6562 도서/문학인생의 베일 14 호라타래 17/11/10 5546 7
    6548 음악Cool Jazz - 그대여, 그 쿨몽둥이는 내려놓아요. 4 Erzenico 17/11/07 3715 7
    6542 일상/생각화장실에 갇혔던 이야기. 10 프렉 17/11/06 4657 7
    6510 일상/생각독일 대학원에서의 경험을 정리하며: 4편 16 droysen 17/11/02 4944 7
    6442 일상/생각성소수자에관한 인식변화 회상. 4 하트필드 17/10/21 4180 7
    6382 도서/문학미로의 날들 4 알료사 17/10/07 4070 7
    6370 IT/컴퓨터모델러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4 aqua 17/10/05 4309 7
    6368 육아/가정재미있는 덴마크의 성 문화 11 감나무 17/10/03 11162 7
    6349 일상/생각삐딱했었구나... 싶습니다. 20 켈로그김 17/09/27 4313 7
    6309 일상/생각불혹의 나이는 .. 개뿔. 19 한달살이 17/09/20 5358 7
    6271 음악[번외] Charlie Parker & Dizzy Gillespie - 같은 듯 많이 다른 비밥의 개척자들 2 Erzenico 17/09/13 3856 7
    6243 일상/생각Open to.. 12 벤젠 C6H6 17/09/07 3076 7
    6232 기타연느 생신 맞이 연덕후가 그냥 올리고 싶어서 올리는 영상 하나 ㅋㅋㅋㅋ 5 elanor 17/09/05 3635 7
    6196 오프모임노래 같이... 들으러 가실래요? 9 와인하우스 17/08/29 4015 7
    6152 의료/건강[kormedi] 문재인의 식약처, 트럼프의 FDA 10 Zel 17/08/23 5447 7
    6148 일상/생각잡았다 요놈!! 13 세인트 17/08/22 3594 7
    6141 문화/예술브로드웨이와 인종주의 - 흑인 배우가 앙졸라스를 할 때 16 코리몬테아스 17/08/22 7827 7
    6135 일상/생각우리 시대 새로운 화폐, 치킨. 5 프렉 17/08/21 5848 7
    7291 오프모임3/31(토) 부산 봄맞이 벚꽃놀이 모집!(펑) 11 나단 18/03/27 4654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