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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1/27 22:06:39
Name   은우
Link #1   본인
Subject   그녀는 언제나 보라색 가방을 메고 다녔다
20대의 초, 미대생에겐 언제나 과제가 있었다.
과제라는 건 별것도 없다. 지랄맞게 오래 걸린다는 점만 빼면.



그러다 보면 주변에 남는 건 오로지 같은 미대생뿐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문득 배가 고파지기 시작할 때면 이미 자정은 넘은 경우가 허다했다.
삼삼오오 모여 무엇인가 먹고 있기라도 하면 그나마 나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두 세시간 눈을 붙인 뒤 아침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꿋꿋히 버텨내야만 했다. 내일의 내게 미안해지고 싶지 않다면.





미대생들은 쉽게 눈에 띄었다.
단지 그들이 가진 커다란 종이나 스케치북, 그림 도구들이 그들을 구별하게 하는 건 아니였다.
퀭한 눈, 지친 걸음걸이, 내일을 알 수 없는 표정까지.
그런 사람들이 보였다.
단순히 지친 게 아니였다. 그들에게선 눈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던 나는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나도 점점 그들과 비슷해져갔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그 날도 이전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내가 여섯시간 동안 그린 그림은 기초도 제대로 안 잡힌 쓰레기였고 옆에 있던 사람은 한 시간만에 자리를 접고 일어섰는데 나보다 그림이 나아보였다.
주변을 둘러봤을 땐 금요일 밤의 학교에 남아있는 건 내가 유일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스케치북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그린 그림들이 한없이 미워졌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스케치북을 모두 찢어서 버리고 나서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서 바깥을 나섰다.

달은 이미 하늘 가운데 올라 있었다.
담배 연기를 한껏 들이마쉰 뒤 내뱉은 다음 하늘을 보니 달이 뿌얬다.
마치 내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실력도 없는 입만 산 미대생. 갑자기 담배 연기가 역하게 느껴졌다.


피던 담배를 발로 눌러서 끄고 들어가보니 몇번인가 지나치면서 본 누군가가 내 스케치북을 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가 내 물건을 건드리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그때는 더 심했다.
내가 그림을 못 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것만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보여주면 안 되는 내 치부였으니까.



"그거 제꺼에요"
그녀를 그 정도로 근거리에서 보는 건 처음이였기에 화를 낼 순 없었지만 내가 먼저 꺼낸 말은 그 노트 그 자리에 그대로 내려놓으라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보라색 가방을 메고 있던 그녀는 그때서야 내가 들어온 걸 눈치채더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먼저 자기소개부터 하는 걸 듣고 있자니 그 뻔뻔함이 오히려 화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녀가 동기라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수업을 같이 들은 건 아니였지만 그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원피스와 이상하리라만큼 무거워 보이는 보라색 가방을 메고 다니는 건 멀리서 보기에도 흔치 않았으니까 기억할 법도 했다.




"그림 잘 그리시네요"
그녀가 천천히 노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갈 수도 있던 그 말이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퍽이나요. 근데 그 쪽은 남의 물건 함부로 건드신 거 사과도 안 하세요?"
입에서 말이 아닌 얼음조각이 뱉어지는 듯한 기분이였다.
내 자존심이 꺾인 듯한 기분에 남을 비난하면서 그러한 감정을 떨쳐내고 싶어하는 내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초라했지만 이미 나간 말은 이미 그녀의 얼굴과 내 얼굴 사이에 남아 있었다.

"죄송해요. 아까부터 계속 그리고 계셔서 궁금해서 그랬던 거에요."


"이리 주세요"
펼쳐진 페이지에는 비행선이 그려져 있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업'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지만 마무리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린 그림이였다.
분명히 내 머리 속에서는 훨씬 더 잘 그린 그림이였는데 막상 손으로 그리고 나니 하나도 마음에 든 구석이 없어 넘겨버렸던 비행선이 펼쳐져 있었다.


"픽사 애니메이션 좋아하시나 봐요."
여섯 시간동안 앉아서 픽사 애니메이션 시퀸스를 그리고 있었으니 당연한 질문을 그녀는 한 것인데
왜 근데 그 때에는 그 질문이 비꼬는 것처럼 들린 건지 모르겠다.

"네"
짧게 대답하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녀만 가면.

그녀는 갑자기 노트북을 꺼내더니 잠시 할 일이 있다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그녀는 잘 몰랐는지 자기 이야기를 조금 하더니 자기 그림을 보여주었다.
동양화를 배우다가 디자인과로 왔다더니 그림 실력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출중했다.

또다시 자괴감을 느꼈다.

그 때 그녀가 그린 다른 그림이 보였다.
동양화적으로 재해석한 픽사의 애니메이션 '카'의 주인공 라이트닝 맥퀸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을 보고 내가 한 얘기는 칭찬은 당연히 아니였고 그렇다고 질투나 부러움 또한 아니였다.

"전 '카'가 진짜 저평가되있다고 생각해요"
맥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런데 그녀의 답변이 더 의외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카' 정말 좋지 않아요?"
이어지던 그녀의 말고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동자에서 어떻게 말 할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눈빛이 보였다
내가 바라던 내 모습이 그녀에게서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몇마디 더 나누고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지나간 뒤로 왠지 모르게 그림이 조금 잘 그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학기를 마치기 전까지 몇번이나마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다시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나중에 듣기로 그녀는 학교를 그만뒀다고 했다.
아주 오랜 뒤에 친해진 그녀를 알던 한 친구의 말로는 그녀가 내 그림 칭찬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과연 그녀는 왜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그 전에 얼굴 딱 한 번 본 사람을 왜 칭찬했던 걸까.



지금도 난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 그리기를 절대로 포기하진 않을거라는 걸, 그녀는 아마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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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입니다.





8
  • 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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