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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28 08:28:52
Name   No.42
Subject   한 폭의 그림같은 직장 이야기 #1
피꺼솓 스토리가 유행인듯 하여 저도 줄 서 봅니다.

저의 사회 첫 직장은 게임회사였습니다. 한 때 잘 나갔으나 그 영광의 퇴색을 막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려오던 그런 회사였지요. 그 잘나가던 한 때에 제가 매진했던
게임을 탄생시킨 곳이라서, 저 나름대로 청운의 꿈을 품고 입사했습니다. 제가 입사한 부서는 회사의 IP를 이용한 OSMU사업을 담당하던 부서였지요. 잘 나가는
브랜드라면야 IP를 이용한 사업도 잘 나갑니다. 하지만 내리막의 자락에서는 그만큼 힘든 일도 없지요. 회사에서 걸출한 후속작을 내주지 않는 다음에야, 끝물의
메인 브랜드를 어떻게든 굴리며 근근히 버텨야 하는 부서였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국진이빵을 팔아야 하는 부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 부서 나름대로
역전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직개편때에 신사업분야 개척을 천명하고 그 방향으로 부서의 진로를 전환하려는 계획을 본부장이 가지고 있었고, 저는
바로 그 계획을 구체화하고 실행하기 위해 입사했습니다. 네, 입사전에 템퍼링이 있었습니다. 전 대학원에서 게임의 한 분야에 대해서 연구를 하였고, 선배들과
이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플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본부장과 접촉이 있었고, 그 계획을 맡아보고자 하는 의욕으로 입사한 것이지요.

다만 한국에서 기업의 계획이라는 게 그렇게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안한 회사의 현실과 맞물려 계획의 실행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저는 그냥
말단 사원으로서의 잡무나 하면서 한동안을 지냈습니다. 업무량도 적지 않았습니다. 입사하자마자 신년회, 사업설명회 등 굵직한 행사 주최를 담당하게 되어서
그야말로 1분도 쉬지 못하고 달려다녀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래도 소녀시대 섭외해서 행사때 9명 악수 다 해본 것은 자랑) 그 와중에 조직개편과 구조조정이
있었습니다. 회사는 적자 연타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대규모 감원을 선택했지요. 본부장의 정치력으로 일단 본부와 부서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대신
뭔가를 내보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입사 전부터 계획한 신사업 구상안과 입사 후 틈틈이 만들어두었던 몇몇 기획안을 제출하고 경영진 PT를 치뤘습니다.

단 하나의 기획안 만이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 때 버려진 게임 기획안 중 하나인 리듬액션 게임은 몇 년 후에 다른 곳에서 거의 그대로 출시되었습니다. 제목이
유비트였던가...) 문제는 승인을 해주면서 경영진이 던진 한 마디죠. '회사 예산 지원은 없으니 부서 내에서 해결하세요' 넵. 게임을 만드는 데 회사 돈을 쓰지
말고 만들랍니다. 온라인 플랫폼이 아니어서 쉽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말만 만들어보라고 하고 실제로는 조용히 부서 정리하고 나가라는 것인지 모를
말이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본부장, 팀장, 차장님, 과장님 전부 한숨만 쉴 때 였지요. 해결책은 있었습니다. 항복하고 퇴사. 혹은... 국가지원과제를 따서
예산을 벌어오는 거였습니다. 어쨌든 온 부서가 이 계획 하나에 밥줄을 건 상황이라서, 못먹어도 고!라는 사인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보고 기획안을 보다
이쁘게 각을 잡아 정비하라는 오더가 내려오죠. 어쨌든 그 기획안에 구구절절하게 써있는 말들을 죄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전 부서에 그걸 직접 쓴 저
하나였습니다. 부서가 사업부서라 그런지 몰라도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겜알못, 겜맹 수준이었거든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대학원시절부터 선배와 함께
구상해온 것들을 기획서 안에 담았습니다. 선배는 그와 관련한 개발력을 갖춘 벤처기업을 창업한 상태였지요.

이 시기였습니다. 팀장이 외부업체 사장이라면서 왠 젊고 어수룩한 이 하나를 달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요. 뭐 팀장도 팀장 나름대로 뭔가를 할 테니 제가 다 알지는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본부 주간업무록과 회의록을 기록 정리하여 문서로 남기는 것은 제 일이기에 당연히 저는 그와 관련한 것도 알고 있어야 할 터였습니다.
그렇게 제가 기획안을 다듬어 제출한 지 1주일이 지나서 국가과제 지원 마감일이 5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야 저는 그 사장이 우리와 무슨 관계인지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획한 게임을 개발할 외주업체랍니다. 사실 저와 본부장은 따로 내정해둔 업체가 있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뜬금없이 뒷통수에 홍두깨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제 선배의 회사였습니다. 제 기획안은 시리어스 게임이 주체였습니다. 이에 그냥 재미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학문적인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일반 개발업체에 맡겨서 될 일은 아니었지요. 애초에 제가 입사한 것도 사전에 본부장님이 이 계획에 관심을 두고 제 선배측과 접촉하여 연구원 중 하나를
데려가서 컨소시엄 담당으로 쓰겠다는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면접을 본 3명 중에 가장 겜돌이였던 제가 뽑혔던 것이구요. 그런데 이제와서 다른 업체와 일을
진행한다면 선배들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부장은 그에 대한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일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것은 정치와
배신의 현장이었던 겁니다. 차장님선은 몰라도, 본부장과 팀장까진 제가 어떤 과정으로 입사하게 되었는지, 저와 그 업체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인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나름 괴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본부장과 팀장이 돌려 돌려 전달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너 없어도 그냥 네 기획안 들고 고 할거다.
넌 여기서 이 일 할래 아니면 선배들이랑 의리 지켜 나갈래? 어차피 늬들이 뭐 만들어도 우리보다 늦을 거니까 맘대로 해봐.' 솔직히 박봉에, 살인적인 업무량에,
그다지 밝지만은 않은 미래... 전 더러운 꼴 보면서까지 붙어있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과 의논했습니다. 본부장이 배신했습니다. 어쩔까요. 선배들은
의외의 답을 줍니다. 뭐 어쩌겠냐. 그냥 거기서 만들어 봐라. 시장이 뚫리면 우리가 나중에 만든 것도 빛을 보기 쉽겠지 뭐. 제가 회사가 꼴이 별로라서 나가고
싶다고 했지만, 첫 직장 3년 못채우면 네 경력도 모양새 그렇게 좋지 않으니 시집살이 하는 기분으로 참아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이 왔습니다.

사실 본부장은 한 때 경영진이었던 제 선배 중 하나의 줄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이였습니다. 선배는 그야말로 키워준 개에게 물린 꼴이 되셨죠. 그리고 저는 그런
본부장의 모습을 다 알고도 그와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솔직히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수년간 종이와 화면 위에 문자와 그림으로만 남겨왔던
기획안을 실제로 완성시켜보고자 하는 욕심도 컸지요. 선배들에게 죄송했지만, 너무나 고마웠던 격려를 받고 다시 일에 매진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과제 지원서는 자신있으니 자신이 처리하겠다던 팀장이 제게 국가과제 지원에 제출할 서류들을 던져주며 한 번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대학원에서
연구비 따겠다고 지원서 쓰며 지새운 밤이 적지 않은 저였죠. 그런데, 그가 던져준 지원서의 꼬라지는 그야말로 처참해서 가관도 못될 정도였습니다. 기초적인
맞춤법에서부터 엉망진창에 편집상태가 걸레짝인 것은 둘째치고, 적당히 제가 준 기획서 문장들의 머리 꼬리만 복붙하다보니 의미가 뒤죽박죽이 되어 기획의
본질은 전혀 내보이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팀장에게 솔직한 감상을 들려줬습니다. 너무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대로 제출했다간 절대로 과제
따낼 수 없을 거라고 말이지요. 지원 마감은 이틀이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난감함을 넘어서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팀장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뚱하게 한
마디를 던져줍니다. '그래? 그럼 네가 좀 고쳐서 다시 써봐.' 까버리고 싶은 작자가 까는 소리로 저보고 까라는데 어쩌겠습니까, 까야지요. 전 회사에서 48시간
가까이 잠 한 숨 자지 않고 지원서를 썼습니다. 3일째 같은 옷을 입고 떡진 머리로 앉아있는 저를 보고 회사 동료들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지요. 실신 직전에
간신히 지원서를 완성했습니다. 팀장은 얼른 집에가서 씻고 옷갈아입고 오랍니다. 제출하러 가자고.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아서 제출에 성공했습니다. 이 때
열심히 달린 추가근무수당요? 안줍디다. 리미트 오버라고.

그리고는 일상 잡무에 치여가며 과제 선정 발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꽃이 피는 계절, 안좋은 일이 벌어진다는 징크스가 있는 제 생일이 다가오는 어느 날,
과제 선정 발표가 있었습니다. 합격이었습니다. 회사와 부서의 이름으로, 저는 1억 2천만원이 넘는 지원금을 받아들게 되었습니다. 입사 이후 두번째로
저는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물론 소녀시대 악수 대첩이었죠.)

글이 길어지고, 아침 식사가 급해진 시간이라 이만 줄이고 다음에 이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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