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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31 19:58:48
Name   王天君
File #1   kind_tom.jpg (284.9 KB), Download : 2
Subject   톰 크루즈, 걸음이 굼뜬 사람


친절하다는 것은 관계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기분좋아지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친절한 것은 새삼스러운 상태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친구, 연인, 가족, 심지어 동료 관계에서도 친절한 태도를 향해 우리는 가끔 그 안에 담긴 저의를 의심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라 인식합니다. 여기에서 친절함의 역설이 발생합니다. 친절을 느낄 확률이 낮은 먼 관계일수록 상대방의 친절을 보다 쉽고 크게 받아들이게 되지요. 저는 아직도 후쿠오카에서 출근길(일 것으로 99% 예상되는 행보)에 말이 안통하는 저를 직접 에스코트 해주던 일본 시민을 기억합니다. 새벽 두시 ARS 통화 상에서 제 예매 기록을 일일히 조회하며 제 의문을 확인해주던 대형 극장 직원분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역으로 제가 여행자 숙소에서 카운터를 볼 때 이메일의 어투가 사무적이지 않고 다정해서 되게 기분이 좋았다는 생면부지 손님의 칭찬도 기억납니다.(막상 들떠서 왔더니 숙소 상태가 너무 개판이라 사기 당한 기분이라고 투덜거린 건 함정)

친절하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고려하고 꼼꼼하게 이런 저런 상황을 예측하고, 상대방의 불만이나 요구를 어떻게든 들어주려 하는 이해심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훌륭한 인격의 표출을 우리는 너무 당연한 직업 윤리쯤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저 사람의 정성과 봉사 정신이 내가 지불하는 금액에 포함되어있다 한들 사람의 진심이란 돈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쉽게 판매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받아 마땅한 친절함이란 대부분 입과 눈이 따로 노는 미소라든가, 사람 아닌 거스름돈과 커피를 높여 표현하는 어색한 존댓말이라든가,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 같은 거에서 머무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딱히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이 정도면 기분은 안나쁘고 열심히 하는 것 같으니 넘어가는 수준입니다.

어제 저는 월드클래스급으로 스펙터클한 친절함을 목격했습니다. 톰 크루즈가 내한 행사를 왔고 레드 카펫위에서 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거든요.

영화 광고가 한 20번쯤은 재생되었을 무렵 사회자의 우렁찬 소개와 함께 여러명의 경호인력과 함께 톰 크루즈가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의 환호가 터지자 카메라 플래쉬의 융단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경호원들은 거친 목소리로 다소 격해진 관중들을 달래느라 낑낑댔고 톰은 U를 입가에 걸어놓고서 손을 흔들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일년에 영화 한편이나 볼까 말까 한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살짝 들떠서 고개를 기웃거렸습니다. 저는 아쉽게도 톰의 실물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 곳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늑장 부리다 도착한 행사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어쩔 수 없이 2층에서 멀찍이 떨어진 톰을 전광판과 0.1의 시력을 동원해 구경했지요. 인피니트 공연이 끝나면 팬들이 싹 빠질 것이라는 건 완전히 오산이었고 오히려 백화점의 고객들과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하나 둘씩 무리에 포개져서 구경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의 정수리 냄새를 신나게 맡아야 했습니다.

톰 크루즈의 기록적인 늑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톰을 외쳐댔습니다. 톰은 정말로 한 명 한 명 악수하고, 눈 인사를 나누고, 사인을 해주고, 셀피를 찍어주더군요. 서두르지도, 스쳐가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지인을 발견한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톰은 정말 일일히 사람들에게 다가가 여기저기 튀어나와있는 손과 핸드폰과 싸인지를 거두어 자신의 친절함을 꼼꼼하게 나누었습니다. 사인을 받으면 밀려나야 하는 일반적인 행사와 다른 즐거움이 보이더군요. 차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타의 자발적인 선택을 향해 열심히 구애하고, 또 나에게 베푸는 친절이 끝난 다음에도 바로 곁에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을 계속 감상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던 사람들은 특별한 기분을 느꼈을 겁니다. 행사 일정에 따라 하나 하나 처리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알아보고 직접 다가오는 톰 크루즈의 의지와 선택을  상상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아마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의 사람들이 봤다면 기적과 지옥이 섞여있는 모습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 한명의 사람을 향해 수많은 사람이 아귀처럼 팔을 벌려 뭔가를 갈구하고 울부짖어댔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가면 다른 반대쪽에서는 비명이 나오고 가까이 간 쪽에서는 탄성이 나옵니다. 붉은 카펫 위를 걷는 사람을 향해 계속해서 빛이 쏟아지고 광채가 번쩍거립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붙들렸다가 놓아지는 상황을 반복합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반대쪽을 향해 다가가자 다시 괴성들이 뒤섞입니다. 넘어갈 수 없는 낮은 벽을 두고 수많은 팔들이 이 사람을 향해 뻗어 버둥거립니다. 벽 안 쪽의 사람이 하나 하나 손을 잡고 사각형의 물체를 향해 미소를 짓자 허공을 휘젓던 팔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누그러집니다. 사각형을 함께 바라보며  어깨동무를 하거나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는 자들은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얼떨떨한 얼굴로 화색을 짓습니다. 그렇게 좌우를 천천히 오가며 카펫 위를 걷는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손과 시간을 붙들려서 내내 웃고 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이 사람은 고작해야 앞쪽으로는 열발자국쯤 움직였을 뿐입니다.

신선했습니다. 톰 크루즈는 헐리웃을 대표하는 정상급 배우로 머무른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스타 중의 스타입니다. 딱히 자신과 연고가 없는 한국이란 나라까지 날아와서, 이렇게 수고롭게 시간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이 영화의 홍보가 끝나면 몇년간은 다시 들릴 일도 없고 이미지를 굳이 좋게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그저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 앞에서 활짝 웃고 인터넷을 이용해 안녕하세요 정도의 메시지만 보내도 사람들은 고맙다고, 멋지다고 지지해줄 테지요. 자신을 향해 열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찰나의 답례를 던지고 홀연히,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저는 많이 봤습니다. 갈 길이 멀고 바쁜 이들이 자신을 향한 목소리와 손짓에 굳이 머무를 이유는 없지요. 감사한 존재들에게는 이들이 아끼는 재주와 화면 속 모습으로 찾아가면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울 것 없는 톰 크루즈가 서있을 뿐인 제 허리가 아플 정도로 긴 시간을 팬들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서있자니 힘들어서 잠깐 쭈그려앉아있을 떄가 행사 시작한 때부터 한 시간 이십분쯤 흐른 후더군요. 그 동안 톰은 내내 웃고 열심히 싸인요청 악수요청 사진요청을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지치지도 않나봐요. 분명 50살을 넘긴 톰 크루즈보다 훨씬 더 우람하고 지치지 않는 스타들은 계속 나타날 겁니다. 그렇지만 레드 카펫에서 인상 찌푸리는 일 없이 웃고 악수하며 행사 내내 버틸만큼 체력 좋은 스타를 다시 볼 일이 있을까요?

잘 빠진 미남 미녀들은 많이 봅니다. 이 좁은 대한민국만 해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조각처럼 생긴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요. 그럼에도 이들은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저 같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세계를 살아갑니다. 이들이 카메라에 더 자주 비출수록, 이들을 선망하고 추종하는 사람들과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톰 크루즈는 그렇게 멀어진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와 아뜩할 정도로 멀고 먼 거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스타들도 얼핏 본 적이 있다고 자랑을 하고,  아직도 수많은 타블로이드지의 먹잇감이자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오르내리고 있지요. 아마 수많은 피로와 긴장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겁니다. 자신의 독보적인 위치를 멀리서나마 뽐내고 슬쩍슬쩍 흘려줄수도 있었겠지요. 일은 일로, 사생활은 사생활로 그렇게 팬들의 사랑과 열광을 편하게 만끽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톰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기대 이상으로 그는 가까이에서, 성실하게 팬들을 대했습니다..

그 어떤 꿍꿍이가 있을지 전 모릅니다. 흔들리는 위상을 아시아에서나마 잡기 위한 언론 플레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팬들에게 서비스를 베푼 후 호텔 방에서는 욕을 내뱉으며 불평불만을 했을수도 있겠지요. 레드 카펫 위에서 내내 다른 생각을 하며 꼭두각시처럼 매너가이 행세를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격했고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건 톰 크루즈가 두 시간 내내 현장에서 팬들 한명 한명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려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진의가 무엇이 되었건, 톰 크루즈는 친절하려고 애썼고 정말로 친절했습니다. 가만히 서서 구경하기도 힘든 두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주었고 거리낌 없이 손을 잡아주었으며 자신의 시간을 팬들과 함께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만약 제가 이등병이고 수많은 군 장성들을 두 시간 내내 대접했어야 하는 자리에서도 그 만큼의 정성을 보일 수 있었을지 전 모르겠습니다.

본래 더 일찍 시작되었어야 했던 행사는 톰이 걸어서 30초 거리를 두 시간 동안 걷는 바람에 예정보다 한참 더 늦게 시작했고 굉장히 짧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톰은 곧바로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을 찾아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눴고 연신 감사를 표했습니다. 슈퍼 스타, 액션 배우, 미남, 단신, 수리 아빠, 사이언톨로지, 소파, 킬러스마일 등 수많은 수식어가 있음에도 앞으로 전 톰 크루즈 하면 kind라는 수식어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될 겁니다. 실물을 봤다는 사실보다, 정말 질릴 정도로 열심히 친절한 모습에 더 큰 감격을 느낍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 준 톰을 보며 어리지도 않은 제가 새삼 사람들에게 친절해야겠다는 생각을 곱씹습니다.

@ 어떤 팬이 무려 사진을 두번이나 찍었습니다. 이 상도의(?)에 어긋난 행동에 사람들이 좀 격분하더군요. 어떤 여성 팬분은 싸인에 악수에 포옹까지 하자 주변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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